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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천문학의 역사를 말할 때 자연 과학 중에 가장 오래된 학문이라는 표현을 쓴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천문학이란 고대에는 생존과 직결된 학문이었기 때문이다. 멀리 보자면 시리우스가 해가 뜨기 직전에 나타나면 나일강이 범람하는 계절이라는 것을 배운 고대 이집트가 있고, 가까이 보자면 북두칠성이 인간의 죽음을 관장한다고 믿은 고대 중국인들이 있었다. 이외에도 아일랜드의 뉴그레인지(Newgrange) 신석기 무덤이나 한국에서 발견되는 고인돌 돌지도, 마야 문명의 천문대 등 고대 천문학은 지구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다.
이 당시 천문학은 천체의 규칙적인 운동을 파악하는 것이 주 업무였다. 이러한 규칙성을 알아야 해가 뜨고 지는 것을 이용해 시간을 정의할 수 있고 역법을 만들어 농사는 물론이요 수렵이나 겨울 대비 같은 것을 할 수 있었을 것이며, 일식, 월식 같이 천문 현상들을 가지고 각종 의식들을 행할 수 있었을테니 말이다. 스톤헨지도 거대한 달력이었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
지금으로부터 3천 년도 더 된 옛날의 일들이지만 이 일들이 알게 모르게 우리 생활 속에 녹아 들어와 있다. 달력도 고대 천문학이 틀을 잡아놓은 것이고[2] 신문에 있는 점성술이나 오늘의 운세도 고대 천문학의 산물이다. 별자리들도 메소포타미아의 목동들이 만들어 놓은 것이 전해져내려온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발전하던 천문학은 고대 그리스 시대를 전후로 동아시아와 유럽/중동의 방향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이 당시 천문학은 천체의 규칙적인 운동을 파악하는 것이 주 업무였다. 이러한 규칙성을 알아야 해가 뜨고 지는 것을 이용해 시간을 정의할 수 있고 역법을 만들어 농사는 물론이요 수렵이나 겨울 대비 같은 것을 할 수 있었을 것이며, 일식, 월식 같이 천문 현상들을 가지고 각종 의식들을 행할 수 있었을테니 말이다. 스톤헨지도 거대한 달력이었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
지금으로부터 3천 년도 더 된 옛날의 일들이지만 이 일들이 알게 모르게 우리 생활 속에 녹아 들어와 있다. 달력도 고대 천문학이 틀을 잡아놓은 것이고[2] 신문에 있는 점성술이나 오늘의 운세도 고대 천문학의 산물이다. 별자리들도 메소포타미아의 목동들이 만들어 놓은 것이 전해져내려온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발전하던 천문학은 고대 그리스 시대를 전후로 동아시아와 유럽/중동의 방향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동아시아는 적어도 청동기 시대 때부터 별을 관측하였다. 고인돌에 새겨진 별자리 모양의 구멍들이나 고분들의 벽화들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경남 의령군의 고인돌이나 평남 증산군 고인돌 등으로 봤을 때 기원전 2천 5백년 경에서부터 이런 흔적들이 발견된다. 다만 시대가 시대다보니 문헌적인 기록은 전무한 상태여서 어느 정도의 전문성을 가지고 연구했는지는 미지수다.
중국에서는 기원전 5세기 이전에 3원 28수라는 개념이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이십팔수에 대한 묘사는 사기나 고구려 고분에서도 나타난다. 진파리 4호 무덤과 덕화리 2호 무덤에서 28수가 그려져 있다.
동아시아의 대표적 천문관인 혼천설과 개천설도 중국에서 비롯되었다. 개천설은 주나라 때, 혼천설은 후한 때에 등장하였다. 물론 혼천의 역시 고대부터 비롯된 정도로 역사가 깊다.
동아시아에서 사용하던 역법도 중국의 것에 영향을 받기 시작하던 때로, 상나라의 원시적인 태음태양력에서 시작하여 전욱력(진), 태초력(한), 의봉력(당) 순으로 발전한다.
중국에서는 기원전 5세기 이전에 3원 28수라는 개념이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이십팔수에 대한 묘사는 사기나 고구려 고분에서도 나타난다. 진파리 4호 무덤과 덕화리 2호 무덤에서 28수가 그려져 있다.
동아시아의 대표적 천문관인 혼천설과 개천설도 중국에서 비롯되었다. 개천설은 주나라 때, 혼천설은 후한 때에 등장하였다. 물론 혼천의 역시 고대부터 비롯된 정도로 역사가 깊다.
동아시아에서 사용하던 역법도 중국의 것에 영향을 받기 시작하던 때로, 상나라의 원시적인 태음태양력에서 시작하여 전욱력(진), 태초력(한), 의봉력(당) 순으로 발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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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동아시아 천문대인 첨성대 | |
삼국시대부터는 주로 일식과 월식의 예측, 역법적인 측면으로 발달하였다. 삼국사기를 보면 거의 기원 원년 경의 일식 현상도 기록하고 있고 일본서기에는 백제가 일본에 역박사와 천문박사를 보냈다는 기록 등으로 볼 때 상당 수준으로 천문학이 발달했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의 천문학은 한국과 중국에 비해 늦게 시작되었다. 위에도 서술하였지만 일본서기에 보면 백제의 원가력이나 신라의 의봉력 같은 역법 등을 얻어서 사용하였다. 특히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고구려와 백제의 학자들이 일본으로 일부 망명하면서 체계를 갖추고 발전하기 시작했다. 키토라 고분의 성도는 고구려의 성도가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7세기 즈음부터는 일식과 월식 같은 현상들을 체계적으로 관측한 기록이 남아있다. 하지만 헤이안 시대 이후 전국 시대 등의 혼란기를 거치며 일본의 천문학은 정체기에 들어서서 발전하지 못했다.
송, 원, 명을 거쳐 천문학 연구 권한이 중국에 절대적으로 독점되어 간다. 그에 따라 원 때 등장한 수시력과 명 때 등장한 대통력도 역법의 기준으로 자리잡는다. 동아시아 최고(古)의 석각천문도도 이때 등장하는데, 1247년 원 시기에 제작된 소주천문도로, 한국의 천상열차분야지도보다 약 150년가량 빠르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천문학자로는 원의 곽수경을 들 수 있다. 또한 중국은 중동의 천문학자들을 대려와 역법 및 천문학을 연구했다.
1200년대 중동 천문학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1200년대에는 지금의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등의 서유럽에서도 아랍어 책 번역해서 공부하던 시절이다.
고려시대 천문학은 고려사나 각종 고분들을 통해 알 수 있다. 서운관이라고 천문 관련 관청을 따로 만들어 체계적으로 관리했다. 일식, 월식, 유성, 유성우는 물론이고 태양 흑점 변화, 변광성, 심지어는 오로라 관측도 남아 있다.
조선시대에도 고려와 마찬가지로 국가 기관에서 주관했다. 서운관->관상감->관상소로 이름이 바뀌면서 계속 존속했다. 과거 제도에서 음양과를 통해 천문학 관련 기술관을 뽑았을 정도로 조선 역시 천문학을 매우 중시했다.[4]
조선 초 태조(조선) 때 고려 이전 자료를 보정한 천상열차분야지도를 제작했다. 세종대왕 시대에 이르러 절정을 맞았는데, 역법 제작, 간의 같은 천문기기 제작, 서적 발행을 맡게 해 유명한 칠정산과 천문유초가 제작됐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는데, 이 당시 천문은 오직 명의 황제만이 다룰 수 있었으며 천문을 명 황제의 허락 없이 한다는 것은 사형에 가까웠다. 이러한 국제 정세 속에서 세종대왕은 명 황제 몰래 천문학을 한 것이었고 명의 사신이 올 때 대간의대를 옮겨야 하는 사례를 여러 번 볼 수 있다. 이 시기 천문학자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위에 언급한 칠정산과 천문유초를 쓴 이순지이다. 당시 천문학이 워낙 발전해서 구식례 문서에 나오듯 일식을 15분 이내로 못 맞춘 것이 처벌 사유고, 이를 단초로 칠정산을 만들어 수분 단위로 예보할 정도였다.
조선 중기부터는 초신성, 혜성을 장기간 추적 관찰한 성변측후단자를 계속 남겼다. 주변국들도 천문 기록은 했지만 방향, 색 등 동향을 장기간 추적 관찰한 경우는 드물어 가치가 높고 현대 천문학계에 고천문학 연구 참고 자료로 언급된 바 있다.
조선 후기에도 자체적으로 서운관지를 남기는 등 계속해서 관찰을 이어간다. 또한 고유의 천문학과 서양의 시계 기술을 접목한 혼천의 및 혼천시계가 만들어 졌다. 다만 역법은 청나라에서 서양 기술을 바탕으로 더욱 정교한 시헌력을 만들어서 조선도 그쪽으로 갈아탔다. 게다가 17세기만 가도 서양의 남반구가 포함된 천문도 등 외래 정보도 벌써 전래됐다.신·구법천문도
1200년대 중동 천문학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1200년대에는 지금의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등의 서유럽에서도 아랍어 책 번역해서 공부하던 시절이다.
고려시대 천문학은 고려사나 각종 고분들을 통해 알 수 있다. 서운관이라고 천문 관련 관청을 따로 만들어 체계적으로 관리했다. 일식, 월식, 유성, 유성우는 물론이고 태양 흑점 변화, 변광성, 심지어는 오로라 관측도 남아 있다.
조선시대에도 고려와 마찬가지로 국가 기관에서 주관했다. 서운관->관상감->관상소로 이름이 바뀌면서 계속 존속했다. 과거 제도에서 음양과를 통해 천문학 관련 기술관을 뽑았을 정도로 조선 역시 천문학을 매우 중시했다.[4]
조선 초 태조(조선) 때 고려 이전 자료를 보정한 천상열차분야지도를 제작했다. 세종대왕 시대에 이르러 절정을 맞았는데, 역법 제작, 간의 같은 천문기기 제작, 서적 발행을 맡게 해 유명한 칠정산과 천문유초가 제작됐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는데, 이 당시 천문은 오직 명의 황제만이 다룰 수 있었으며 천문을 명 황제의 허락 없이 한다는 것은 사형에 가까웠다. 이러한 국제 정세 속에서 세종대왕은 명 황제 몰래 천문학을 한 것이었고 명의 사신이 올 때 대간의대를 옮겨야 하는 사례를 여러 번 볼 수 있다. 이 시기 천문학자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위에 언급한 칠정산과 천문유초를 쓴 이순지이다. 당시 천문학이 워낙 발전해서 구식례 문서에 나오듯 일식을 15분 이내로 못 맞춘 것이 처벌 사유고, 이를 단초로 칠정산을 만들어 수분 단위로 예보할 정도였다.
조선 중기부터는 초신성, 혜성을 장기간 추적 관찰한 성변측후단자를 계속 남겼다. 주변국들도 천문 기록은 했지만 방향, 색 등 동향을 장기간 추적 관찰한 경우는 드물어 가치가 높고 현대 천문학계에 고천문학 연구 참고 자료로 언급된 바 있다.
조선 후기에도 자체적으로 서운관지를 남기는 등 계속해서 관찰을 이어간다. 또한 고유의 천문학과 서양의 시계 기술을 접목한 혼천의 및 혼천시계가 만들어 졌다. 다만 역법은 청나라에서 서양 기술을 바탕으로 더욱 정교한 시헌력을 만들어서 조선도 그쪽으로 갈아탔다. 게다가 17세기만 가도 서양의 남반구가 포함된 천문도 등 외래 정보도 벌써 전래됐다.신·구법천문도
유럽/중동의 천문학은 동아시아와 핵심적인 차이가 있다면 '망원경'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뒤에서 자세히 다루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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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천문학자라 불리는 탈레스 |
고대 그리스 외에도 이집트라던지 메소포타미아 등지에서 독자적으로 천문학을 발전시켜나갔다. 하지만 현대 우리가 고대 그리스에 중점을 두는 이유는 과학적 방법론을 사용하여 천문학을 비로소 '과학적 학문'이라 부를 정도로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그리스의 천문학자들은 정확한 관측을 하는 데에도 관심이 있었지만 기하학적 모형을 만드는 데에도 관심이 있었다.
흔히들 고대에 맨눈으로 관측한 것이라고 얕보는데 결코 만만하지 않다. 탈레스가 일식을 예측해 전쟁을 멈춘 것이 기원전 585년의 일이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최초의 해시계와 세계지도를 고안한다. 아테네의 메톤(Meton)은 기원전 432년 메톤 주기를 발표한다. 메톤과 동시대인인 에우크테몬(Euctemon)은 메톤과 같이 연구하였으며 지점(solstice, 태양이 적도에서 가장 멀어졌을 때)의 정확한 관측을 하였다. 플라톤은 기원전 380년경 파이돈을 쓰면서 근거를 들지 않은 채 지구가 둥글며 우주의 중심이 지구라고 상상했다. 동시대 사람인 크니도스의 에우독소스(Eudoxus)는 동심천구설을 주장했다.
칼리포스(Callippos)는 기원전 330년 메톤 주기의 4배인 새로운 주기를 찾아내고 에우독소스의 이론을 발전시켰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월식을 관측하다가 달에 드리운 그림자가 둥근 것을 보고는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발견하여 기원전 350년경 천체론이라는 책에 지구가 둥글다고 서술한다. 기원전 135년경 히파르코스가 별의 목록을 작성하면서 별의 등급을 기록한다. 안티키테라 기계가 만들어진 것이 기원전 2세기의 일이다. 2세기경 프톨레마이오스가 그리스 천문학을 집대성하여 알마게스트로 알려진 수학의 체계(Mathematike Syntaxis)라는 책을 만들어낸다.
흔히들 고대에 맨눈으로 관측한 것이라고 얕보는데 결코 만만하지 않다. 탈레스가 일식을 예측해 전쟁을 멈춘 것이 기원전 585년의 일이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최초의 해시계와 세계지도를 고안한다. 아테네의 메톤(Meton)은 기원전 432년 메톤 주기를 발표한다. 메톤과 동시대인인 에우크테몬(Euctemon)은 메톤과 같이 연구하였으며 지점(solstice, 태양이 적도에서 가장 멀어졌을 때)의 정확한 관측을 하였다. 플라톤은 기원전 380년경 파이돈을 쓰면서 근거를 들지 않은 채 지구가 둥글며 우주의 중심이 지구라고 상상했다. 동시대 사람인 크니도스의 에우독소스(Eudoxus)는 동심천구설을 주장했다.
칼리포스(Callippos)는 기원전 330년 메톤 주기의 4배인 새로운 주기를 찾아내고 에우독소스의 이론을 발전시켰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월식을 관측하다가 달에 드리운 그림자가 둥근 것을 보고는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발견하여 기원전 350년경 천체론이라는 책에 지구가 둥글다고 서술한다. 기원전 135년경 히파르코스가 별의 목록을 작성하면서 별의 등급을 기록한다. 안티키테라 기계가 만들어진 것이 기원전 2세기의 일이다. 2세기경 프톨레마이오스가 그리스 천문학을 집대성하여 알마게스트로 알려진 수학의 체계(Mathematike Syntaxis)라는 책을 만들어낸다.
알마게스트를 토대로 천문학을 연구했던 코페르니쿠스는 1543년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De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 전4권)》라는 책을 발표하면서 기존의 천동설을 흔들었다. 1610년 갈릴레이는 망원경을 통해 하늘을 보면서 달의 표면이나 토성의 모양, 금성의 위상변화, 목성의 위성을 관측한다. 그를 통해 지동설의 근거를 찾아낸다. 요하네스 케플러는 1609년 첫번째와 두번째 케플러의 법칙을 발표했으며 1619년 세번째 케플러의 법칙을 발표한다. 코페르니쿠스의 이론도 천체의 운동을 완벽하게 묘사하려면 주전원들이 필요했지만 케플러의 발견으로 인해서 주전원들의 필요성이 사라지게 된다.
조반니 도메니코 카시니 (1625~1712)는 토성 고리의 틈을 발견하고 토성의 위성 4개를 발견하는 업적을 남긴다. 1684년 8월 에드먼드 핼리가 뉴턴을 방문하고 뉴턴이 케플러의 법칙을 유도해 내었음을 알게 된다. 핼리는 뉴턴에게 연구성과를 발표하라 조언했고 1687년 뉴턴이 프린키피아를 출판하게 된다. 뉴턴이 중력의 개념을 통해 케플러의 법칙을 유도해내자 지구상에서 벌어지는 일과 태양계에서 일어나는 일이 별개가 아님이 드러난다. 어떤 이들은 뉴턴이 천체의 운동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이 사건을 천문학 혁명, 과학혁명으로 부른다. 또한 이 때를 기준으로 근대 천문학이 시작되었다고 보기도 하며, 명말청초 중국의 천문대인 흠천감의 주요인사들이 이슬람권 천문학자들에서 유럽의 선교사(아담 샬)겸 천문학자들로 교체되는 천문학 및 과학의 주도권이 중동에서 유럽으로 넘어가는 시기로 본다.
조반니 도메니코 카시니 (1625~1712)는 토성 고리의 틈을 발견하고 토성의 위성 4개를 발견하는 업적을 남긴다. 1684년 8월 에드먼드 핼리가 뉴턴을 방문하고 뉴턴이 케플러의 법칙을 유도해 내었음을 알게 된다. 핼리는 뉴턴에게 연구성과를 발표하라 조언했고 1687년 뉴턴이 프린키피아를 출판하게 된다. 뉴턴이 중력의 개념을 통해 케플러의 법칙을 유도해내자 지구상에서 벌어지는 일과 태양계에서 일어나는 일이 별개가 아님이 드러난다. 어떤 이들은 뉴턴이 천체의 운동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이 사건을 천문학 혁명, 과학혁명으로 부른다. 또한 이 때를 기준으로 근대 천문학이 시작되었다고 보기도 하며, 명말청초 중국의 천문대인 흠천감의 주요인사들이 이슬람권 천문학자들에서 유럽의 선교사(아담 샬)겸 천문학자들로 교체되는 천문학 및 과학의 주도권이 중동에서 유럽으로 넘어가는 시기로 본다.
한스 리페르셰이가 망원경을 개발했다는 소식을 들은 갈릴레이는 망원경을 제작한다. 볼록렌즈와 오목렌즈를 조합하여 만든 갈릴레이의 망원경은 시야가 좁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갈릴레이의 망원경으로 천체를 보는 데 어려움이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갈릴레이의 발견에 의혹을 가지기도 했다. 케플러는 또한 1611년 갈릴레이식 망원경의 단점을 보완한 케플러식 망원경을 만들어서 천문학에 기여한다. 망원경은 사람의 눈보다 빛을 모으는 능력이 뛰어나므로 어두운 천체를 볼 수 있게해주는 역할을 한다. 덕분에 사람의 눈으로는 보기 힘든 어두운 천체들 까지도 관측이 가능해지면서 천문학의 대상이 혁명적으로 늘어난다. 또한 망원경은 사람의 눈보다 분해능이 좋기 때문에 정밀한 관측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프랑스 아카데미에서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전체동안 많은 과학적 업적을 쌓았는데 천문학 분야에서도 많은 중요한 업적들을 쌓았다. 여기 쓸 수는 없지만 대규모 관측을 하고 많은 연구를 했다.
뉴턴 제외하면 대부분은 프랑스 및 프랑스에 영향을 받은 대륙학계가 천문학 및 여러 과학을 발전 시켰다.
레온하르트 오일러는 아이작 뉴턴의 이론을 발전시켰으며 1748년 섭동을 이용해 행성의 궤도를 연구하였다. 조세프 라그랑주는 1772년 라그랑주점을 발견하고 섭동이론을 발전시킨다. 1781년 윌리엄 허셜이 천왕성을 발견한다. 같은 해 샤를 메시에는 103개의 성운, 성단의 목록인 메시에 천체 목록을 발표한다. 여기에 영향을 받은 허셜은 관측을 시작하여 1786년 수많은 성운, 성단의 목록을 발표한다. 피에르시몽 라플라스는 1799년 그 동안의 수학적 발전을 종합하여 천체 역학(Mécanique Céleste)이라는 책을 통해 뉴턴 역학을 새롭게 서술하였다.
한반도에는 조선 후기에 와서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천문학과 유럽 학문의 결합이 이루어졌다. 현종 때 송이영이 만든 혼천시계나 영조 때 만들어진 황도남북양총성도가 대표적이다. 조선 후기의 학자 김영은 유럽의 역법을 도입해 신법중성기를, 조선의 역법을 정리해 국조역상고를 썼다.
실학이 발전하면서 조선의 천문학도 발전을 이뤘다. 천리경 같은 기구들도 들어오며 실학자들에게 자극을 주었다. 조선 후기에는 김석문, 홍대용 등이 지구지전설을 주장하였다.
일본의 천문학은 에도 시대에 이르러 발전하기 시작했다. 시부카와 하루미는 일본 고유 역법인 정향력을 만들기도 하였으며 혼천의, 지구의, 천체 망원경 등을 제작하였다.
뉴턴 제외하면 대부분은 프랑스 및 프랑스에 영향을 받은 대륙학계가 천문학 및 여러 과학을 발전 시켰다.
레온하르트 오일러는 아이작 뉴턴의 이론을 발전시켰으며 1748년 섭동을 이용해 행성의 궤도를 연구하였다. 조세프 라그랑주는 1772년 라그랑주점을 발견하고 섭동이론을 발전시킨다. 1781년 윌리엄 허셜이 천왕성을 발견한다. 같은 해 샤를 메시에는 103개의 성운, 성단의 목록인 메시에 천체 목록을 발표한다. 여기에 영향을 받은 허셜은 관측을 시작하여 1786년 수많은 성운, 성단의 목록을 발표한다. 피에르시몽 라플라스는 1799년 그 동안의 수학적 발전을 종합하여 천체 역학(Mécanique Céleste)이라는 책을 통해 뉴턴 역학을 새롭게 서술하였다.
한반도에는 조선 후기에 와서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천문학과 유럽 학문의 결합이 이루어졌다. 현종 때 송이영이 만든 혼천시계나 영조 때 만들어진 황도남북양총성도가 대표적이다. 조선 후기의 학자 김영은 유럽의 역법을 도입해 신법중성기를, 조선의 역법을 정리해 국조역상고를 썼다.
실학이 발전하면서 조선의 천문학도 발전을 이뤘다. 천리경 같은 기구들도 들어오며 실학자들에게 자극을 주었다. 조선 후기에는 김석문, 홍대용 등이 지구지전설을 주장하였다.
일본의 천문학은 에도 시대에 이르러 발전하기 시작했다. 시부카와 하루미는 일본 고유 역법인 정향력을 만들기도 하였으며 혼천의, 지구의, 천체 망원경 등을 제작하였다.
1859년 로버트 분젠과 구스타프 키르히호프는 스펙트럼을 분석하여 원소를 찾는 방법을 발견한다. 그 후, 이 방법은 천문학에서 널리 쓰이게 된다. 1888년 드레이어(John Louis Emil Dreyer)는 허셜의 목록을 보완한 성운, 성단의 목록인 NGC(New General Catalogue)를 만든다. 성운 중에는 나선모양의 것들이 있다는 것이 알려지고 그들의 정체에 대한 논쟁이 1920년 할로 섀플리와 히버 커티스 사이에 벌어진다. 그 후 1924년 에드윈 허블은 안드로메다 은하가 우리은하 바깥에 있음을 발표한다. 이를 통해 우리 은하 내부에 있는 성운과 우리은하 외부에 있는 은하 사이의 차이점이 이해되게 된다. 1929년 에드윈 허블은 은하간의 적색편이를 발견했다. 이 발견은 팽창우주론에 큰 기여를 하게 된다. 1963년 겉보기에는 별과 비슷하지만 매우 멀리 떨어져 있는 퀘이사라는 천체가 발견된다. 1965년 아노 앨런 펜지어스, 로버트 우드로 윌슨이 우주 전역에 퍼져 있는 마이크로파를 발견했다. 이후 이 마이크로파는 우주배경복사라는 이름을 얻게 되며, 빅뱅 이론의 증거가 되었다.
To confine our attention to terrestrial matters would be to limit the human spirit.
우리의 관심을 지구 상의 문제로만 제한하는 것은 인간의 정신을 제한하는 것이다.
-스티븐 호킹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천문학은 매우 빠른 속도로 발전하였다. 기초 과학에 워낙 빵빵한 지원을 해줘서 그런지 20세기 초부터 걸출한 천문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하야시 경로를 발견한 쓰시로 하야시가 등장한 것도 이 즈음이다. 현재 일본의 천문학은 세계에서 손에 꼽을 정도다. JAXA를 중심으로 천문학과 우주개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한국의 천문학은 일제시대를 거쳐 광복 이후 발전을 시작했다. 1948년도에 서울대학교 천문기상학과가 개설되며 본격적인 교육이 시작되었고, 1967년도에는 연세대에 천문기상학과, 1985년에 경희대에 우주과학과, 이후 80년대 후반에는 충남대, 충북대 등에서 천문 관련 학과를 개설하였다.
1965년에는 한국천문학회, 1974년에는 국립천문대(現 한국천문연구원)가 생겼다. 최근에는 KVN이나 GMT 사업도 하고 있다.
[1] 천문학의 역사를 굉장히 잘 요약한 말이다. 좀 더 의역을 하자면 (우리가 아는 우주의) 지평선을 넓혀가는 역사라는 말이다.[2] 정교한 달력은 물론 이후의 일이다. 일단 하루종일 하늘만 쳐다보는 천문학자들을 먹여 살릴 만한 농업 생산량이 되어야 하고 탄탄한 수학적 기반이 있어야 역법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틀이란 12달 365일 정도를 말하는 것이다.[3] 컴퓨터 시뮬레이션 결과 약 기원전 500년에 만들어졌다는 것이 확인되었다.[4] 단 이 음양과라는 시험은 오늘날로 치면 천문학과 지리학이 짬뽕되어 있는 형태였다.[5] 이 사람이 망원경을 하늘로 돌리고 인류의 역사가 바뀌었다.[6] 망원경의 최초개발자는 갈릴레이가 아니라 네덜란드의 한스 리페르세이(Hans Lippershey)로 1608년에 파이프와 렌즈 2개를 이용하여 최초의 망원경을 발명했다. 갈릴레이는 처음으로 망원경을 하늘을 보는데 사용했지 최초의 개발자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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