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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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ΕΛΛΑΣ / Ἑλλάς
screen-shot-2021...
고대 그리스 문명의 영향권.
기원전 9세기~기원후 6세기
위치
정치 체제
국가 원수
주요 사건
기원전 800년 암흑시대 종결
기원전 494년 페르시아 전쟁
기원전 460년 펠로폰네소스 전쟁
기원전 337년 필리포스 2세의 그리스 통일
기원전 336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등장
기원전 146년 로마 공화국의 그리스 정복
서기 600년 고대 그리스의 종결
종결 이후
 
 
 
 
 
 
 
 
 
 
 
 
 
 
 
 
 
 
 
 
 
 
 
 
 

1. 개요2. 범주
2.1. 암흑시대2.2. 암흑시대 이후
3. 지역4. 역사5. 언어6. 종교7. 정치
7.1. 민주주의의 발상지
7.1.1. 아테네 이전의 민주주의7.1.2. 초창기 민주주의의 발달
7.2. 아테네 민주주의
7.2.1. 민회7.2.2. 정치가7.2.3. 공동체를 위한 봉사7.2.4. 시민 종교7.2.5. 장례식7.2.6. 평의회와 다른 관직들
7.2.6.1. 공직 추첨제7.2.6.2. 500인회7.2.6.3. 법정7.2.6.4. 행정 체계
7.2.7. 도편추방제
7.3. 민주주의 이념
7.3.1. 자유와 평등7.3.2. 개인적 자유7.3.3. 발언의 자유7.3.4. 추첨과 보수7.3.5. 공공성 및 책무성7.3.6. 민주주의와 법치
8. 사회
8.1. 여성의 지위
9. 군대10. 교육11. 경제12. 문화
12.1. 철학
12.1.1.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12.1.2. 소크라테스 이후 철학
12.1.2.1. 플라톤의 혼합정치와 근대국가
12.1.3. 헬레니즘 철학
12.2. 건축12.3. 미술
12.3.1. 조각12.3.2. 도자기12.3.3. 회화
12.4. 문학
12.4.1. 비극
12.5. 복식12.6. 식문화12.7. 음악12.8. 과학기술12.9. 의학12.10. 스포츠12.11. 동성애
13. 관련 도서14. 여담15. 외부 링크

 
 
 
 
 
 
 
 
 
 
 
 
 
 
 
 
 
 
 
 
 
 
 
 
 
 
 
 
 
 
 
 
 
 
 
 
 
 
 
 

1. 개요[편집]

 
 
 
 
 
 
 
 
 
 
 
 
 
 
 
 
 
 
 
 
 
 
 
 
 
 
 
 
 
 
 
 
 
 
 
 
 
 
 
 
고대 그리스 혹은 고전 그리스는 기원전 1100년경부터 기원전 146년까지 지금의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튀르키예 서부 해안 지역[2]에서 고대 그리스어를 쓰고 그리스의 신들을 믿거나 문화로 받아들였던 도시국가들의 흥망성쇠 시대를 가리킨다.

고대 로마와 더불어 서양고대를 대표하는 문명이며 유럽 문명, 문화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한때 아테네, 스파르타 등을 중심으로 찬란한 문명의 꽃을 피웠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활발한 정복활동으로 전 지중해권에 퍼져나가며 헬레니즘 문화를 이룩했다. 이후 고대 로마를 거쳐 동로마 제국, 중세 서유럽, 이슬람 제국, 르네상스에까지 영향을 끼치며 말그대로 서양 문화의 근간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서양 문화가 19세기와 20세기를 거치며 전 세계적인 영향력을 투사하고 있는 걸 생각하면 실로 현대 문명의 기틀이라고도 할 수 있는 문명.

학문 면에서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일단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교과서에서 접하는 고대 철학자의 큰 지분을 그리스 혹은 그리스계 철학자가 차지한다. 이 그리스 철학자들의 사상은 중세, 근대, 현대의 철학, 특히 계몽주의합리주의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데모크리토스원자론, 에우클레이데스(유클리드)수학, 프톨레마이오스천문학, 히포크라테스의학 등 웬만한 학문 분야들은 고대 그리스를 거치지 않은 게 없다.
 
 
 
 
 
 
 
 
 
 
 
 
 
 
 
 
 
 
 
 
 
 
 
 
 
 
 
 
 
 
 
 
 
 
 
 
 
 
 
 

2. 범주[편집]

 
 
 
 
 
 
 
 
 
 
 
 
 
 
 
 
 
 
 
 
 
 
 
 
 
 
 
 
 
 
 
 
 
 
 
 
 
 
 
 
 
 
 
 
 
 
 
 
 
 
 
 
 
 
 
 
 
 
 
 
 
 
 
 
 
 
 
 
 
 
 
 
 
 
 
 
 
 
 
 
상세 내용 아이콘   자세한 내용은 암흑시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범주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크레타 섬을 중심으로 펼쳐진 미노아(미노스) 문명과 이후 그리스 본토 및 트로이 일대에서 펼쳐진 미케네 문명(에게 문명 시기)을 고대 그리스로 묶어 설명하기도 하나 고전 문화가 꽃피는 후대 그리스와는 차이가 많다. 대체적으로는 도리아인들의 남하로 미케네 문명이 무너지고 기록이 거의 남지 않은 기원전 12세기경을 암흑 시대의 시작으로 본다. 하지만 도리아인들은 이전부터 그리스와 공존했다는 학설도 있고, 소빙기나 전염병 등에 의해 미케네가 멸망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확실한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암흑시대라는 이름에 걸맞게 기원전 1200년 무렵부터 기원전 800년까지 역사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미케네 문명 시기 사용했던 선문자 B가 완벽하게 잊혀져 1차 문헌자료가 전혀 남지 않았고 고고학 유적과 유물만 있는 상태이다. 예전에는 호메로스가 서사시에 묘사한 당대의 상황을 바탕으로 추론해보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바다 건너 히타이트키프로스 역시 미케네 붕괴 후의 그리스 본토와 마찬가지로 수백 년간 문명의 붕괴 상태를 유지했다. 람세스 3세 시대 이집트의 기록에 따르면 그리스인과 수많은 다민족 집단인 바다 민족에 의해 히타이트와 키프로스가 멸망했으며 일부 바다 민족은 가나안팔레스타인 지역에 정착했다고 한다. 성경에서는 블레셋 족이 크레타에서 왔다고 언급하며 실제로 필리스티아의 바다 민족 유해에서 그리스계 유전자가 검출된다. 그리스 본토가 어떻게 멸망하여 암흑기로 빠져들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청동기 그리스 문명이 멸망할 때에 많은 그리스인들이 바다 민족의 일원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2.2. 암흑시대 이후[편집]

 
 
 
 
 
 
 
 
 
 
 
 
 
 
 
 
 
 
 
 
 
 
 
 
 
 
 
 
 
 
 
 
 
 
 
 
 
 
 
 
이후 기원전 800년경부터 그리스 각지에서 도시국가폴리스와 에트노스가 성립한다. 이 폴리스들은 기원전 776년경 올림피아 제전을 통해 동족 의식을 다졌지만 하나의 국가로 통합을 이루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암흑 시대에서 벗어나 그리스 문명이 재건되는 시점을 고졸기라고도 칭한다. 잊혀져버린 선문자 B 대신 페니키아 문자를 차용하여 그리스 문자를 만들어 문자 기록도 재개되었다.

대부분의 폴리스는 처음에는 소왕국 형식이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귀족정 형식으로 변화하게 된다. 나중에는 식민 활동의 활성화와 화폐 경제의 도입, 철 가격의 하락 등으로 평민들 역시 무장을 하게 되었다. 이 평민들이 전투의 중심으로 자리잡게 되자 그들의 발언권이 늘어났고 이후 폴리스는 차이는 있을지언정 통상 참주를 혐오하는 헬라스적 전통을 가지게 된다. 가령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대립 구도 때문에 사람들은 '민주정의 아테나이'와 '과두정의 스파르타'로 단순화시키길 좋아하지만[3], 스파르타만 하더라도 권력의 상호 견제와 분립, 많은 시민들의 참정권 유도라는 훌륭한 전통을 가지고 있었고, 그러면서도 고도의 안정성을 조화시켰다. 그리고 '백성을 노예로 다루는 동방의 굴종적 전제정에 대항하는 사나이다운 자유 헬라스인들'이라는 개념은[4] 헬라스인들이 스스로를 규정하는 정체성이었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폴리스로는 아테네스파르타, 테베가 있다.

본래 이들의 패권은 페르시아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델로스 동맹을 결성한 아테네에게 있었다. 하지만 못지 않은 세력을 자랑하던 스파르타가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결성하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일으키자 델로스 동맹은 무너지게 된다. 이후 폴리스의 주도권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스파르타에게 넘어간다. 하지만 테베를 중심으로 한 반스파르타 연합군이 레욱트라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패권은 다시금 테베에게 돌아간다.

혼란이 거듭되던 동안, 북쪽에서 힘을 키우던 마케도니아 왕국필리포스 2세는 기원전 338년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폴리스군을 격파한다. 고대 그리스는 왕국의 점령을 받기 시작했고 알렉산드로스 3세 시대를 거치면서 완전히 약화되었다. 그 뒤로는 헬레니즘 제국 시대로 접어들며 이전의 문화를 잃어버렸고, 마케도니아 왕국이 고대 로마에 의해 멸망당한 후에는 자치권마저 사라지면서 막을 내렸다.[5]
 
 
 
 
 
 
 
 
 
 
 
 
 
 
 
 
 
 
 
 
 
 
 
 
 
 
 
 
 
 
 
 
 
 
 
 
 
 
 
 

3. 지역[편집]

 
 
 
 
 
 
 
 
 
 
 
 
 
 
 
 
 
 
 
 
 
 
 
 
 
 
 
 
 
 
 
 
 
 
 
 
 
 
 
 
GreeceRegionsEng...
Ancient Regions ...
위의 첫 번째 지도는 현대 그리스의 전체적인 지방을 구분해 표시해놓은 지도인데, 현대 그리스가 고대 그리스의 행정구역 상당 부분을 그대로 따르고 있기에 현대의 지역 구분과 큰 차이점은 없다. 다만 오늘날 튀르키예 땅이 된 이스탄불이나 이오니아, 그리고 북쪽의 북마케도니아 지역 등도 고대 그리스의 영역에 포함되었다.

바로 옆의 두 번째 지도만 봐도 알겠지만 그리스 본토 자체가 워낙 산지가 많고 평야 지방이 적은 지역이다. 그리스 본토 중 제일 하단에 보라색으로 표시된 지방이 펠로폰네소스 반도다. 펠로폰네소스 반도는 크게 7개의 지방으로 또 나눠졌는데 남동쪽을 '라코니아', 남서쪽을 '메세니아', 서쪽을 '엘리스', 북쪽을 '아카이아', 북동쪽을 '코린티아', 동쪽을 '아르골리스', 중앙부를 '아르카디아'라고 불렀다. 그 유명한 스파르타는 남쪽의 라코니아에 있었다.

첫 번째 지도에서 펠로폰네소스 반도 위쪽의 파란 부분이 그리스 본토다. 현재는 그리스 중부라고 더 많이 불리는데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여기가 그리스 문명의 핵심지였다. 서쪽에는 아카르나니아와 아이톨리아가 있고 중앙에 로크리스와 도리스, 포키스 지방이 있다. 한편 그리스 본토 동부 지방은 보이오티아와 아티카, 메가리스 지방으로 나누어 구분했다. 아테네가 있던 곳이 그리스 동부의 아티카다. 그리스 본토에서 위로 올라가면 각각 노란색과 주황색으로 표시된 테살로니아와 에피루스가 보인다. 에피루스 북부는 카오니아, 중부는 몰로시아, 남부는 테스프로티아라고 불렀다.

테살로니아를 거쳐 그보다 더 위로 올라가면 마케도니아 지방이 나온다. 자세히 보면 여기도 하마케도니아(Macedonia Proper), 엘리메이아, 피에리아, 오레스티스 등 다양하게 구분되어 있는 걸 볼 수 있다. 원래 마케도니아의 전통적인 중심지는 하마케도니아 지방이었는데, 아르게아스 왕조 출신 알렉산드로스 1세 시절부터 슬금슬금 북부 마케도니아로 확장하면서 점점 영토가 넓어졌고 오레스티스, 알모피아 같은 지방들을 집어삼켰다. 참고로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마케도니아를 바르바로이, 즉 야만인들의 땅이라고 여겨 천대했다. 마케도니아 자체는 그리스 문명에 속하는 땅이었지만 분명 본토에 비하면 문화가 확실히 달랐기 때문. 마케도니아보다도 더 위로 올라가면 트라키아인, 일리리아인 등 완전히 비-그리스 민족들이 사는 땅들이 나오고, 여기에서 그리스 문명권의 영역이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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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지도는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들이 정확히 어디에 위치했는지와 그 영역권을 대강적으로나마 보여주는 지도다. 가장 유명한 스파르타는 남쪽 펠로폰네소스 반도 동부에 연두색으로 표시되어 있다.[6] 아테네의 경우 그리스 중부 맨 동쪽 끝 아티카에 연한 자주색으로 칠해져 있는 걸 볼 수 있을 것이다. 아테네와 함께 그리스 중부의 또다른 패권국이었던 테베는 아테네 바로 옆 보이오티아 지방에 하늘색으로 칠해져 있다.

고대 그리스 도시들 중 가장 유명한 삼대장은 앞에서 언급한 스파르타, 아테네, 테베지만 얘네들 말고도 도시들은 많았다. 그나마 유명한 도시들을 추려보자면 지도 오른쪽 위 아나톨리아에 짙은 민트색으로 칠해진 트로이다. 그 트로이 전쟁이 일어났던 트로이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세계 7대 불가사의들 중 하나인 아르테미스 신전으로 유명한 에페소스는 트로이 아래쪽에 붉은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로도스의 거상으로 잘 알려진 로도스 섬은 그림 맨 오른쪽 아래에 회청색으로 칠해진 걸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외에도 한때 미케네 문명의 중심부였던 미케네는 펠로폰네소스 반도 중동부 쪽에 황토색에 가까운 진노란색 부근에, 크레타 문명의 중심 크레타 섬은 맨 아래쪽에 겨자색 지역에 있다.
Greek Colonizati...
그리스인들은 왕성한 해양 활동을 통해서 곳곳에 식민도시들을 많이 세웠다. 하도 그리스 본토가 척박하고 좁아터진 탓에 증가하는 인구를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리스인들의 식민 활동은 대략 기원전 750년 경에 처음 시작해 기원전 500년까지 무려 250여 년에 걸쳐서 이루어졌다. 그리스 식민도시의 가장 대표적인 예시가 시라쿠사, 나폴리, 비잔티움, 마르세유 등이다. 전성기 시절에는 거의 이 식민도시들에 사는 그리스인들이 80만 명에 이르렀고 서쪽으로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동쪽으로는 흑해에 이르렀다. 이들은 지중해권 무역을 꽉 휘어잡으면서 그리스 무역 촉진에 엄청난 역할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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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종교[편집]

 
 
 
 
 
 
 
 
 
 
 
 
 
 
 
 
 
 
 
 
 
 
 
 
 
 
 
 
 
 
 
 
 
 
 
 
 
 
 
 
고전기 그리스인들은 당시 지중해 사람들이 통상 그러하듯이, 신전과 성소(聖所), 신탁과 제사 위주의 종교를 믿었다. 여기서 이 사유 체계를 배경으로 시인들과 극작가 등이 창작한 이야기가 우리에게 그리스 로마 신화라는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다.

단, 이 신화는 당대 그리스인들이 믿던 종교 그 자체와는 다르다. 고전기 그리스인들은 일리아스 등이 창작 이야기라는 걸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으며, 자신들이 믿던 '경건한 신앙'과 분명하게 구분하곤, 시인들이 신들을 소재로 막장 드라마를 만든다고 비판했다.[7] 물론 시인들 역시도 이미 존재하던 전승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만들었지만, 일리아스 등은 그리스인들이 믿던 신앙과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 애당초 일리아스는 성경과 달리 '믿어야 할 종교적 내러티브'도 아니었고, '내러티브에 대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건 후대 기독교의 신앙이지 고전기 그리스인들의 신앙이 아니다.[8] 그리스인들에게 중요한 건 당연 제사였고, 시인들이 막장 신화를 읊는 건 용서할지언정 신전과 제사를 백안시하는 것에는 자비가 없었다.[9]

이러한 오해는 고전기 그리스 종교를 넘어 다신교 전반에 퍼진 오해인데, 동양의 다신교들을 생각하면 쉬울 것이다. 중국 황제에게 중요한 건 중국 신화가 아니라 하늘과 사직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었고, 한국 무속에서 중요한 건 한국 신화가 아니라 굿판이며, 일본의 신토에서 중요한 건 일본 신화가 아니라 구체적인 경배 행위이다. 고전기 그리스에서도 똑같았다. 아테나가 아테네 사람들에게 올리브를 선물했다는 나름 의미있는 전승이 있을 수 있고, 거기서 신앙을 키울 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건 내러티브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신전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었다.

제사는 그리스인 개인의 삶과 폴리스, 더 나아가 범그리스 정체성까지 좌우하는 매우 소중한 문화였다. 제우스 성소 올림피아와 아폴론 성소 델포이에서 여러 폴리스가 함께 제사를 지내는 것은, 공동의 종교적 유대감을 가진 범헬레네스 정체성으로 연결되었다. 비록 폴리스끼리 남남이고 전쟁도 하지만, 올림피아와 델포이에서 같은 제사를 봉헌하는 한 범헬레네스라는 것이다.[10] 올림피아 제전 역시도 본질적으로는 '제사'였다.

또한 이성의 민족이라는 현대인들의 인식과는 달리 고대 그리스인들은 매우 종교적인 삶을 살았다.[11] 그래서 신의 존재를 노골적으로 부정하는 식의 주장을 펼치는 무신론자들은 고대 그리스에서도 좋은 대우를 받지 못했다. 한 예로 철학자인 아낙사고라스는 "태양은 신이 아니라 그저 타오르는 불덩어리에 불과하다."라고 무신론을 주장했다가 아테네 시민들로부터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신성모독을 저질렀다고 항의를 받아 아테네에서 강제추방을 당했다.
 
 
 
 
 
 
 
 
 
 
 
 
 
 
 
 
 
 
 
 
 
 
 
 
 
 
 
 
 
 
 
 
 
 
 
 
 
 
 
 

7. 정치[편집]

 
 
 
 
 
 
 
 
 
 
 
 
 
 
 
 
 
 
 
 
 
 
 
 
 
 
 
 
 
 
 
 
 
 
 
 
 
 
 
 

7.1. 민주주의의 발상지[편집]

 
 
 
 
 
 
 
 
 
 
 
 
 
 
 
 
 
 
 
 
 
 
 
 
 
 
 
 
 
 
 
 
 
 
 
 
 
 
 
 
고대 그리스는 단일 국가가 아니라 수백여 개에 달하는 도시국가들이 점점이 흩어져 서로 경쟁하고 공존하는 구조였다. 다른 지역들처럼 단일 왕정이나 정치권력을 형성하지 못했던 이유는 산지가 많고 , 협곡, 산맥 등으로 잘게 갈라진 지형이 많은 그리스의 특성상 아무래도 주위를 압도할 세력이 탄생하기 어려웠던 것도 한 몫했다. 이렇게 그리스에서는 수많은 도시국가들이 서로 난립하면서 경쟁했는데, 이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민주주의라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통치 구조가 발생했다. 사실 현대인들이 민주주의라는 개념에 익숙해져서 그렇지 역사적으로 보면 민주주의라는 제도는 오히려 굉장히 불안정한 제도였다. 당시에는 오히려 왕정이나 제국이 훨씬 더 국가 운영에 안정적인 시스템이었으며, 그 로마 공화국 역시 율리우스 카이사르라는 걸출한 천재가 등장한 이래 로마 제국으로 탈바꿈하면서 제정으로 전환된다. 무엇보다 당대 기술력 수준으로는 웬만큼 덩치가 큰 나라는 민주주의를 할 수조차 없었다. 아테네야 도시국가 수준이니 사람들이 일일이 모여서 투표하고 하는 게 가능하지 덩치가 커지면 사람들이 모이기 어렵다. 모이더라도 그 모인 인구들이 투표한 것을 옮기고 일일이 확인하여 개표하는 등의 문제도 커진다. 그리스는 하나의 황제나 왕이 위에서 통치하는 구조 자체가 성립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는 모든 사회 구성원들에게 참정권을 부여하는 게 아니라 세금과 시민의 의무를 질 수 있는 성인 남성에게만 한정된다는 한계점은 있었지만 이후 꾸준히 발전하며 현대 사회의 정신적 틀을 만들었다는 의의를 남겼다.

전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람이 무언가를 발상할때 참고할 수 있기에 그 의의가 중요하다. 실제로 근대 프랑스나 미국 민주정 성립 과정에서 고대 그리스 민주정에 대해 직접적으로 많은 참고를 했다. 동양에서는 제대로 된 민주정이 기능한 적은 없지만, 10여년이라도 왕이 존재하지 않았던 주나라의 공화 시기라는 유명한 사례가 존재했기에 근대화 과정에서 그걸 참조해 "왕이 없는 체제"의 번역어로 "공화정"이란 단어를 만들었을때 지식인들이 바로 의미를 이해하고 용어가 퍼질 수 있었듯이, 전례가 하나라도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는 매우 크다.

고대 그리스에서 최초로 민주주의가 발생한 곳은 아테네였다. 그리스뿐만 아니라 세계 최초의 민주주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원래 아테네도 기존에는 왕정이었지만, 기원전 6세기경 왕의 폭정에 지친 아테네인들이 왕을 몰아내고 귀족들이 다스리는 과두정으로 바꿨고 나중에는 모든 시민들이 참여하는 민주정으로 발전했다. 아티카 지방의 패자이자 유력 대도시던 아테네가 민주주의 체제로 바뀌자 얼마 지나지 않아 인근의 폴리스들도 모두 민주주의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모두 그런 건 아니어서 스파르타의 경우 세습되는 두 가문에서 왕을 2명씩 배출하면서 왕정을 그대로 유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스파르타의 왕들도 일반적인 왕정만큼 권력이 강하진 않았다.

무력을 숭상하던 스파르타는 유독 정치체제가 다른 그리스 폴리스들과 유별날 정도로 차이가 심했다. 스파르타는 2개의 마을이 합쳐져 만들어진 도시였기에 그 이래로 2명의 왕을 섬겼다. 각각 아기아다이 가문[12]과 에우리폰티다이 가문에서 1명씩 가장 먼저 태어난 남자아이에게 왕위를 물려줬으며 왕위는 세습직이었다. 스파르타의 왕은 최고 사제직을 겸했고 전쟁을 선포할 권리도 있었다. 허나 스파르타 왕권은 날이 갈수록 쪼그라들었는데, 외교권은 페르시아 전쟁 이후로 5인의 선출직으로 구성된 에포로스에게 넘어갔고 내정 역시 60세 이상의 장로 28명으로 구성된 장로회의 게루시아에게 넘어갔다. 결국 왕은 종교 업무를 제외하면 군대 최전방에서 싸우는 걸 빼고 거의 할 일이 없는 상징적인 존재만으로 남았다.

'에포로스'는 1년마다 시민들의 선거로 뽑혔고, 나중에는 왕보다도 더 강력한 세력을 가진 스파르타의 최고 의결 기구로 떠올랐으며 임기는 1년이었다. 1년마다 갈아치워졌고 재선이 불가능했던 탓에 퇴임 후 보복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5명의 에포로스들은 장로회의, 즉 게루시아와 함께 국정 대소사를 총괄했다. 반면 민회 에클레시아의 경우, 안건을 상정할 수도 없었고 에포로스가 제시한 안건에 투표만 가능해서 기타 그리스 폴리스들에 비해 권한이 확연히 적었다. 에클레시아에서 통과된 안건도 다시 에포로스와 게루시아의 상의 끝에 시행되었다. 워낙 에포로스와 게루시아가 보수적인 집단이었던 탓에 스파르타의 정책 실행 속도는 어마어마하게 느렸다. 대신 권력이 분립되고 상호 견제되었기에 체제 안정성이 매우 탁월했고, 대중 독재와 폭군을 모두 방지할 수 있었다.
 
 
 
 
 
 
 
 
 
 
 
 
 
 
 
 
 
 
 
 
 
 
 
 
 
 
 
 
 
 
 
 
 
 
 
 
 
 
 
 

7.1.1. 아테네 이전의 민주주의[편집]

 
 
 
 
 
 
 
 
 
 
 
 
 
 
 
 
 
 
 
 
 
 
 
 
 
 
 
 
 
 
 
 
 
 
 
 
 
 
 
 
사실 아테네가 등장하기 전부터 고대 그리스 폴리스들은 이미 인민 대중을 포함한 꽤 넓은 계층의 정치 참여를 보장하고 있었다. 유배 생활 중에 고향의 아고라와 평의회(볼라) 소집을 몹시 그리워했던 시인 알카이오스의 시 구절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고대 미틸레네에도 여느 도시처럼 의회와 민회가 있었다. 현재 이스탄불에 보관된 키오스 섬의 유명한 비문에도 사법 업무를 맡았던 것으로 보이는 '데모스' 집회와 '데모시에 보울레'라 불리는 특별 평의회가 등장한다. 이 평의회는 세 구역에서 각각 50명씩 뽑힌 사람들로 짜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기원전 7세기 크레타에서 발견된 비문들을 봐도 법령이 왕이나 귀족의 독단이 아니라 "폴리스 전체"의 뜻에 따라 세워졌음을 명시하고 있다. 펠로폰네소스의 티린스 비문에는 한술 더 떠서 행정관들이 "인민(다모스)이 좋다고 생각하는 대로" 움직여야 한다는 조항까지 있다. 이 표현은 훗날 아테네 민주주의의 상징인 "인민이 결정했다"는 구절과 아주 비슷하지만, 당시에는 그저 의사 결정 과정의 한 절차였을 뿐 인민에게 최종적인 주권이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이들 국가에서는 관리들과 엘리트 중심의 의회가 인민의 허락 없이도 독자적으로 결정을 내릴 권한을 쥐고 있었다. 예컨대 코린토스에는 8명의 위원회가 이끄는 강력한 80인 평의회가 있었는데,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에 따르면 도시의 웬만한 일은 이 평의회가 다 처리했고 민회는 들러리에 불과했다.

결국 초창기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의 핵심은 이른바 '에우노미아(좋은 질서)' 체제가 비록 인민을 최고 권력자로 모시지는 않았어도, 이론적으로는 그들에게 정치적 자리를 내어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그리스 체제들은 동시대 페니키아에서 볼 수 있었던 억압적이고 권위적인 과두정치와는 근본부터 달랐다. 헌법상의 질서를 신이 정해준 불변의 법칙으로 여기지도 않았고, 계급 간의 갈등 역시 언제나 수면 아래 살아 숨 쉬고 있었다.
 
 
 
 
 
 
 
 
 
 
 
 
 
 
 
 
 
 
 
 
 
 
 
 
 
 
 
 
 
 
 
 
 
 
 
 
 
 
 
 

7.1.2. 초창기 민주주의의 발달[편집]

 
 
 
 
 
 
 
 
 
 
 
 
 
 
 
 
 
 
 
 
 
 
 
 
 
 
 
 
 
 
 
 
 
 
 
 
 
 
 
 
민주주의, 즉 '데모크라티아'가 등장하면서 폴리스의 제도적 풍경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우선 행정 관직인 '아르카이'부터 톺아보는 것이 순서다. 흔히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라고 하면 시끌벅적하고 기세등등한 시민 민회를 떠올리곤 하는데, 실제로도 그랬다. 하지만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인들은 어떤 체제인지를 가르는 핵심 잣대를 '누가 도시의 정치적 관직을 맡을 수 있느냐'로 보았다.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따르면 민주주의는 곧 "대중이 관직을 차지하는" 체제였다. 5세기 아테네의 한 익명 작가는 아테네 민주주의의 정체성을 "시민이 직접 관직에 참여하는 것"에서 찾았고, 소크라테스 역시 재력에 따라 관직을 나누면 과두정치지만 모든 시민 중에서 관직자를 뽑으면 민주주의가 된다고 설파했다.

사실 고대 그리스에서 과두정치를 정의하는 가장 쉽고 일반적인 방법은 '돈 있는 사람만 관직을 맡게 하는 것'이었다. 이런 제한은 5세기 초 민주주의 바람에 맞서려는 반작용으로 나타난 것이지, 그 이전인 고졸기에는 딱히 흔한 일이 아니었다.

관직 진출이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처음부터 그토록 절실했는지, 아니면 5세기경 민주파와 과두파의 헌정 투쟁이 격화되면서 중요해진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민주화 과정에서 해마다 관직에 참여하는 시민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특히 클레이스테네스가 새로 짠 아테네의 '500인 평의회'에서 이런 변화가 도드라졌다. 10개 부족에서 50명씩 뽑고, 아티카 전역의 139개 행정 구역에 인구 비례로 배분해 대표를 선출하면서 평의회 구성원이 눈에 띄게 다양해졌다. 당시 관직 임기 제한이 정확히 어땠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 사람이 평의원직을 무한정 해먹는 건 그리스 상식으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4세기경에는 평생 딱 두 번만, 그것도 연달아서는 못 맡게 못을 박았다. 5세기 초에는 규칙이 좀 더 느슨했을지 몰라도, 평의회를 거쳐 간 시민의 수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았을 것이다.

반면 과두정 체제였던 코린토스의 평의회는 고작 80명으로 꾸려졌고, 그마저도 재산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차이가 시사하는 바는 작지 않다. 스파르타나 코린토스 같은 과두정 국가에서는 평의회가 의제를 쥐락펴락하며 민회를 마음대로 조종했다. 게다가 평의원들은 오로지 도시의 엘리트뿐이었다. 반면 아테네 같은 민주 국가에서 평의회는 더 강력한 권한을 가진 민회를 위해 안건을 다듬고 시민을 대표하는, 말 그대로 '폴리스의 축소판' 역할을 했다.

물론 이후 평의회와 민회가 다시 엘리트와 대중을 각각 대변하는 계층적 관계로 돌아가기도 하지만, 그건 로마 제국이 전성기를 누릴 때나 벌어진 일이다. 우리가 아는 다른 민주적 평의회 사례를 보면, 기원전 450년대 아테네가 에리트라이에 설치한 120명 규모의 평의회가 있다. 이들은 30세 이상 남성 중에서 추첨(글자 그대로 콩을 뽑는 방식)으로 선발됐고, 4년 안에 두 번 넘게 해먹는 걸 금지했다. 아테네에는 평의회 말고도 군사, 재정, 행정 등 관직이 수두룩했다. 5세기 중반에는 도시와 제국이 커지면서 500인 평의회를 빼고도 관직이 700개나 더 생겼다. 민주주의답게 권력이 한 사람에게 쏠리지 않도록 위원회 형태로 운영했고 임기는 보통 짧게 1년으로 제한했다. 소수에게 큰 권한을 오래 주는 과두정과는 정반대 행보였다.

이런 관직 대다수는 5세기 중반에 이르러 추첨, 즉 무작위 배정으로 뽑았다. 일반 시민의 정치적 능력을 믿고 맡기는 이 추첨제는 매우 정교한 기계인 '클레로테리온'을 쓸 만큼 공을 들인 절차였다. 추첨제와 보수 지급(미스토스)이 민주주의의 필수 조건까지는 아니었지만, 페리클레스 도입 이후 많은 민주 국가의 상징이 된 것만은 분명하다. 혹자는 가장 가난한 시민까지 추첨과 보수를 통해 나랏일에 참여할 수 있어야 진정한 민주주의라고 말한다. 하지만 기원전 5세기 초 아테네가 아직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었다고 보는 건 큰 착각이다. 넘쳐나는 관직, 엄격한 연임 제한, 그리고 공직을 비워두지 않았던 아테네 시민들의 열정을 생각해보라. 평범한 시민들이 이토록 높은 비율로 국정에 참여했다면, 그건 이미 그리스인들이 생각했던 '데모크라티아' 그 자체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마따나 아테네는 시민들이 번갈아 가며 "지배하고 지배받는" 사회였던 셈이다.

민주주의가 시민들이 관직에 참여하는 체제라면, 동시에 민회인 '에클레시아'에서 법과 결정을 내리는 헌법적 틀이기도 하다. 사실 공동체가 함께 사안을 결정하는 것 자체는 이전 시대에도 있었지만, 민주주의는 그 '조건'부터가 달랐다.

옛 시대와 다른 차이점은 이렇다. 첫째, 민회의 결정이 정기적이고 최종적이었다. 둘째, 다루는 범위가 훨씬 넓었다. 셋째, 모든 시민이 자유롭게 토론하고 수정안을 낼 수 있도록 법으로 지켜주고 부추겼다. 마지막으로, 평의회가 가져온 안건을 민회가 마음대로 거부할 수 있었다. 왕이나 장로들이 민회의 결정을 뒤집을 수 있었던 스파르타와는 차원이 다른 권한이었다. 민회의 이런 중심적인 위상은 다수가 결정할수록 더 정당하다는 민주주의의 규범으로 자리 잡았다.

헤로도토스의 기록 속 한 인물은 민주주의에서는 대중이 "모든 논의를 공동의 결정에 맡긴다"고 했다. 그러면서 "다수 안에 모든 것이 있다"는 묘한 말을 덧붙였는데, 이는 다수결만으로도 충분히 정당하며 정치의 모든 권력이 대중에게 달렸다는 뜻으로 읽힌다. 아테네 민회의 기세는 살라미스 조약 법령이 새겨진 대리석 기둥에서도 엿볼 수 있다. 클레이스테네스 혁명 직후 세워진 이 기둥은 "데모스가 결정했다(edoxen toi demoi)"라는 파격적인 문구로 시작한다.

법령이 데모스의 이름으로 선포되고 기록된 건 이때가 처음이다. 데모스가 조연에서 벗어나 입법의 주인공으로 우뚝 선 순간이었다. 심지어 이 법령은 전성기 때보다 더 민주적인 구석이 있는데, 평의회에 대한 언급조차 아예 빼버렸기 때문이다. 나중에는 보통 "평의회와 민중이 결정했다"는 표현을 썼지만, 초기에는 오로지 민중의 역할만을 강조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런 민주적인 법령 제정 방식은 나중에 너무 널리 퍼져서 그것만으로는 민주주의인지 확인하기 어려워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기록이 민주주의 시대에 들어서야 나타났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아르고스 같은 곳에서도 비슷한 흔적이 발견되는 걸 보면 더욱 그렇다.

기원전 450년경 에레트리아의 법령은 "평의회와 민중이 결정했다"고 시작하지만, 세기 말 과두정치가 들어서자 민중이라는 단어는 쏙 빠지고 "평의회가 결정했다"로 바뀐다. 법령에 평의회만 등장하는 건 대개 과두정의 신호탄이었다. 과두정 국가들은 민주주의에 비해 정치적 결정을 문서로 남기는 일에 인색했는데, 이는 공개 행정과 시민 참여를 목숨처럼 여겼던 민주주의의 특징을 반증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7.2. 아테네 민주주의[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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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 민회에서 전몰자 추도 연설을 하는 페리클레스.

당시 아테네를 포함한 그리스의 민주주의를 살펴보면 모든 입법은 민회(Ecclesia, 에클레시아)에서 처리했다. 아테네의 국회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민회라는 조직 자체는 기원전 621년 드라콘[13]이 처음 만들었으며 그 이래로 아테네의 국정을 처리하는 기본 조직으로 떠올랐다. 드라콘이 처음 만들 때는 귀족 가문이나 특정 계급만이 참석할 수 있었지만, 기원전 6세기 솔론의 개혁으로 인해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라면 평민, 귀족 가리지않고 모든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2년간의 군사 복무를 마친 20세 이상의 성년 남성이라면 자동으로 민회에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민회의 핵심 역할은 안건에 대해서 찬반을 정하는 일로 아테네의 국회나 다름없었다. 찬반은 손을 들어 의사를 표시하는 걸로 결정했고, 개회와 의결의 최소 정족수는 약 6,000명이었다. 때에 따라서는 손을 드는 것 대신에 검은색과 흰색 돌을 항아리에 넣어서 찬반을 정하는 경우도 있었다. 기원전 5세기를 기준으로 대략 1년에 10회 정도 정기적인 민회가 개최되었고, 그 외에도 특별 안건이 있을 때마다 임시회를 열었다.

기원전 5세기 후반에 들어서는 매달 4번에 걸쳐 민회를 열었기 때문에 1년에 40번 가량[14] 열기도 했으며 개최일이 크게 증가했다. 참고로 민회는 특별히 날짜를 정해두고 열지는 않았는데, 음력으로 축제를 개최했던 고대 그리스 특성상 민회 개최일과 축제일이 겹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민회 참석이 무조건적으로 자유로운 건 아니었고, 아고라에서 미리 나눠주는 붉은색 옷을 입은 사람들만 참여할 수 있었다.

데메(deme, 행정 구역)에 등록된 아테네 남성 시민은 누구나 시민 의회인 '에클레시아(ekklēsia)'에 참석할 자격이 있었다. 에클레시아는 아고라 위쪽 프닉스 언덕에서 열린 야외 집회였는데, 적게는 6천 명에서 많게는 1만 3천 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다. 아테네는 시민은 프닉스 언덕의 가파른 경사면을 활용해 만든 자연 극장에 앉아 연설대인 '베마(bēma)'를 내려다보며 나랏일을 논했다. 물론 아테네만 의회를 열었던 것은 아니다. 시민 의회는 고대 그리스 폴리스들의 공통적인 특징이었다. 하지만 아테네를 비롯한 민주 국가들은 의회의 권한과 헌법적 위상을 파격적으로 넓혔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예를 들어 스파르타에서는 원로원이나 왕이 의회의 결정을 뒤집을 수 있는 거부권을 가졌는데, 이는 인민의 권력을 견제하는 강력한 장치였다. 반면 아테네의 에클레시아에는 그런 엄격한 제약이 없었다.

의사결정은 거수(손을 드는 방식)를 통한 단순 다수결로 이루어졌다. 유일한 조건은 평의회에서 미리 논의된 안건만 상정할 수 있다는 점뿐이었다. 아테네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의회를 아예 '데모스(dēmos, 시민 전체)'라고 부른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 의회가 곧 의사결정권을 가진 시민 전체를 대표했기 때문이다. 아테네에서는 '페리스티아르코스'라는 관리가 정화 의식을 위해 희생 제물로 바친 새끼 돼지를 들고 회의장을 한 바퀴 도는 것으로 시작을 알렸다. 이어 전령(케릭스)이 신들의 도움을 구하고, 독재자나 페르시아와 내통하는 자들을 저주하는 관례적인 기도를 올렸다.[15] 그러고 나서 평의회 주재관(prytaneis)들이 사전에 심의한 안건(probouleumata)을 민회에 제출했다.

이 안건은 성격에 따라 두 가지로 나뉘었다. 특정 결론 없이 민회의 토론에 통째로 맡기는 '개방형'과, 평의회가 이미 확고한 의견을 정해둔 '폐쇄형'이다. 아테네에서는 예비 투표(procheirotonia)를 통해 만장일치로 동의한 폐쇄형 안건은 별다른 토론 없이 바로 통과시키기도 했다. 역사가들은 4세기경 아테네의 결정 중 절반 정도가 이런 식으로 처리되었다고 추정한다. 흔히 민회 하면 열띤 웅변이 오가는 장면을 떠올리지만, 사실 상당수 업무는 소리 없이 착착 진행되었던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론은 민주주의 민회의 꽃이었으며 때로는 전쟁터를 방불케 할 만큼 격렬했다. 모든 개방형 안건과 부결된 폐쇄형 안건에 대해서는 발언이 필수였다. 전령이 발언자를 소개하며 던지는 첫 질문은 항상 "발언을 원하시는 분?"이었다. 이 질문은 남성 시민이라면 누구나 앞으로 나와 입을 열 수 있다는 약속이었고, 엘리트 계층이 의제를 독점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민주주의의 증거였다. 과두정에서는 관리나 지배층만 발언할 수 있었고 민중의 입은 막혀 있었지만, 민주정에서는 민중 사이의 자유로운 대화가 가능했다. 현직 장군 같은 무관들도 의견을 낼 수는 있었지만 의제를 마음대로 정하거나 결정된 결과를 거부할 권한은 없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시민들이 나랏일을 논할 때 연단에 서서 조언하는 사람이 대장장이일 수도, 구두 수선공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상인이나 선장, 명문가 출신이나 비천한 출신이나 가릴 것 없이 누구나 발언자가 되었고, 이를 듣는 청중 또한 가난한 서민들이 주를 이루었다.[16]

이 평범한 시민들은 '토루보스(thorubos)', 즉 소란을 피우는 방식으로 제안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거나 연설자를 입다물게 만들었다. 이런 소동은 사회자조차 통제하기 힘들었고, 정치인들은 연단에서 쫓겨나지 않으려고 수시로 태도를 바꿔야 했다. 과거 역사가들은 이를 중우정치의 표본이라 비판했지만, 오늘날에는 일반 시민이 발언권을 행사하고 연설자가 합의를 끌어내도록 유도하는 민주적 장치로 재평가받고 있다.물론 같은 계급이라고 해서 모두가 한목소리를 냈던 것은 아니다. 연설가들 역시 무조건 대중(데모스)이 듣기 좋은 말만 골라 했던 것도 아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말따마나, "의회에서 연설할 때 아테네 민중이 동의하지 않는 기색을 보이면, 얼른 방향을 틀어 그들이 원하는 말을 해야만 했다."

민회에 모인 군중은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가 아니었기에 이들의 뜻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시행착오와 타협이 필요했다. 그럼에도 '토루보스'는 하층민들이 자신을 우월하다고 믿는 특권층을 길들이는 가장 강력한 도구였다. 비록 10~20대 젊은 시민들은 직접 연설자로 나서는 경우는 드물었겠지만[17], 야유를 퍼부으며 분위기를 주도하는 데는 누구보다 열성적이었을 것이다.
 
 
 
 
 
 
 
 
 
 
 
 
 
 
 
 
 
 
 
 
 
 
 
 
 
 
 
 
 
 
 
 
 
 
 
 
 
 
 
 

7.2.2. 정치가[편집]

 
 
 
 
 
 
 
 
 
 
 
 
 
 
 
 
 
 
 
 
 
 
 
 
 
 
 
 
 
 
 
 
 
 
 
 
 
 
 
 
원칙적으로 아테네의 모든 남성 시민은 민회에서 자유롭게 입을 열 수 있었고, 실제로도 이 권리를 꽤 적극적으로 누렸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자리를 잡아가면서 공식 직함은 없어도 사실상 정치판을 좌지우지하는 전문 연설가 집단인 '레토레스(rhētores)'가 등장했다. 이들은 뛰어난 말솜씨 하나로 정치판을 휘젓던 인물들로, 풍부한 경험과 전문 교육을 무기로 삼았다. 다만 이들의 영향력은 오직 '방금 한 제안이 민중들에게 먹혔느냐'에 달려 있었기에 늘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불안정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전의 연설가들이 구체적으로 어땠는지는 기록이 드물지만 그중 페리클레스의 웅변술은 가히 독보적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청중을 홀리는 것은 물론, 뼛속까지 찌르는 일침을 가할 줄 아는 유일한 인물"로 꼽혔으며, 그 압도적인 권위 덕분에 '올림포스의 신'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그는 기원전 444년부터 430년 사이 15번이나 연속해서 장군으로 뽑힐 만큼 오랜 시간 정점에 머물렀다. 하지만 그조차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정부 수반'은 아니었다. 그가 내놓는 모든 제안은 매번 민회 참석자 과반수의 찬성을 얻어야만 실행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기원전 429년, 페리클레스가 전염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뒤를 이은 연설가들에 대한 평가는 바닥을 쳤다. 특히 참주 클레온은 거짓말쟁이에 도둑, 사기꾼이라는 비난을 한 몸에 받았다. 비판자들은 그가 가죽 공장을 운영하는 장사꾼 출신[18]이라는 점을 들어 품격 있는 지주 계급의 신사로 인정하지 않았다. 클레온의 뒤를 이은 '민중의 옹호자(prostatai)'들도 비슷했다. 등불 업자 히페르볼로스, 리라 장수 클레오폰, 양 장수 리시클레스 등 겉보기엔 미덥지 않은 인물들이 줄줄이 등장했다. 이때부터 민주주의 역사에 길이 남을 단어인 '선동가(demagogue)'가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데마고고스'는 원래 단순히 '민중의 지도자'라는 뜻이었으나, 곧 '대중을 현혹하는 자'라는 부정적인 의미로 변질되었다. 반대파들 눈에 민주주의는 무지와 편견에 찌든 체제였으며, 결국 선동가들이 고함이나 지르며 싸우는 개판으로 전락할 운명이었다. 그들은 선동가가 군중(mob)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온갖 비열한 짓을 저지르다가, 기회만 오면 민주주의를 팔아 독재자(참주)가 되려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런 우려와 달리, 선동가들이 독재자가 될 만큼 권력을 오래 움켜쥐는 경우는 드물었다. 서로 견제하고 수시로 주역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18세기 사상가 장 자크 루소는 아테네를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것조차 거부하며 "웅변가들이 지배하는 폭압적인 귀족 정치"라고 깎아내렸다. 하지만 웅변가들이 민주주의의 핵심 역할을 한 것은 맞을지언정, 그들이 체제를 지배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웅변가들은 대중을 휘어잡는 만큼이나 대중의 눈치를 보며 휘둘리는 존재이기도 했다.

사실 선동가들이 민주주의를 위험하게 만든 진짜 이유는 선동가들의 행태에 질린 엘리트들이 폭력적인 쿠데타(과두정 반동)를 일으키도록 자극했기 때문이다. 당시 기록들이 편향된 탓에 선동가 자체가 위험하다는 오해가 생겼는데, 투키디데스[19]는 선동가의 시대가 전쟁 후 끝난 것처럼 썼지만 실제로는 4세기까지도 대중의 비위를 맞추는 지도자들은 계속 등장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당장의 이익을 쫓는 리더십이 계속 이어졌다고 적었을 정도로 즉, 선동가는 일시적 위협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일상적인 모습이었다. 게다가 풍자와 비난이 일상인 희극 시인들의 작품들을 통해 당시 민주주의를 접하다보니 선동가들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힘든 것이다. 그들이 어떤 논리로 대중을 사로잡았는지는 알 길이 없고 무엇보다 민중을 대변하는 일은 목숨을 거는 일이었다. 선동가 히페르볼로스, 클레오폰, 안드로클레스 같은 지도자들은 모두 반대파인 과두정 세력의 음모로 암살당했다.
 
 
 
 
 
 
 
 
 
 
 
 
 
 
 
 
 
 
 
 
 
 
 
 
 
 
 
 
 
 
 
 
 
 
 
 
 
 
 
 

7.2.3. 공동체를 위한 봉사[편집]

 
 
 
 
 
 
 
 
 
 
 
 
 
 
 
 
 
 
 
 
 
 
 
 
 
 
 
 
 
 
 
 
 
 
 
 
 
 
 
 
아테네에서 20대 청년은 아직 관직을 맡을 나이는 아니었지만 그것이 도시의 정치 체제에서 소외되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18세부터 59세까지 모든 시민에게는 군 복무 의무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중장보병 장비를 스스로 갖출 만큼 여유가 있는 남성은 군 관리들이 작성한 징집 명단(카탈로고이)에 이름이 올랐다.[20]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을 보면, 아고라에 세워진 각 부족의 수호 영웅(Eponymous Heroes) 동상 아래 총 10개의 명단이 게시되는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이 명단에 오른 부유한 남성들은 갑옷과 무기를 직접 사들고 중장보병으로 출전했다. 반면 가난한 남성들은 함대의 노잡이로 자원하여 온갖 고된 잡무를 맡아 노예나 외국인들과 부대껴야 했다. 아테네의 민주주의 체제 아래 모든 군사 직책은 막대한 예산을 들여 유급으로 운영되었다. 만약 전투 중 부상을 입어 장애를 얻으면 민회에 소액 연금을 신청할 수 있었고, 전사자의 자녀는 국가가 책임지고 길러주었다.

경제적 형편이 풍족했던 부유한 집안의 도련님들에게는 '레이투르기아(liturgies)'라는 의무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는 '민중을 위한 사업'이라는 뜻으로 오직 부유층에게만 부과되는 일종의 공공 기여금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돈이 많이 깨지는 일은 삼단노선(trireme)의 장비를 구입하는 것과 축제 합창단을 꾸려 운영하는 일이었다. 레이투르기아는 개인의 명성을 드높일 기회이기도 했지만 엄연한 강제 사항이었으며, '에이스포라(eisphora)' 같은 직접세와 더불어 도시 내 부를 재분배하는 역할을 했다. 물론 엘리트 계층 중에는 이런 가혹한 부담을 견디다 못해 반란을 꾀하는 이들도 있었다.

다만 재산이 많든 적든 시민들은 일상 속에서 계층 간의 벽을 뼈저리게 실감하며 살았다. 결국 기존의 재산 관계를 보호하고 신분 질서(특히 노예제)를 유지하는 것이 아테네 정치 제도의 가장 강력한 목적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자유민과 노예가 나란히 앉아 일을 하고 비슷한 임금을 받는 경우도 있었지만 아테네 법은 가혹할 정도로 차별적이었다. 똑같은 잘못을 저질러도 자유민에게는 벌금을 내렸지만 노예에게는 살점이 터지는 채찍질로 응징했다. 노예는 물론이고 거주 외국인(메토이코스)조차 사법 절차에서 고문을 당할 수 있었으나 시민의 몸은 물리적으로나 상징적으로나 감히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불가침의 영역으로 대접받았다.
 
 
 
 
 
 
 
 
 
 
 
 
 
 
 
 
 
 
 
 
 
 
 
 
 
 
 
 
 
 
 
 
 
 
 
 
 
 
 
 

7.2.4. 시민 종교[편집]

 
 
 
 
 
 
 
 
 
 
 
 
 
 
 
 
 
 
 
 
 
 
 
 
 
 
 
 
 
 
 
 
 
 
 
 
 
 
 
 
도시의 종교 축제는 정치와 문화의 모호한 경계선상에 걸쳐 있었다. 모든 공공 의식은 본질적으로 정치적일 수밖에 없지만, 아테네의 축제는 그 정도가 훨씬 더 심했다. 첫째로 축제는 아테네의 권력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매년 봄 열리는 디오니시아 축제에서 아테네는 그야말로 돈과 힘을 대놓고 과시했다. 전쟁터에서 아버지를 잃은 고아들이 무장을 한 채 극장 안을 행진했고[21], 아테네의 속주들에게서 뜯어낸 공물은 탈렌트 단위로 하나하나 공개되며 그 위세를 뽐냈다.

둘째, '레이투르기아'라 불리는 축제 운영은 부자들의 주머니를 털어 공동체 전체에 뿌리는 일종의 부의 재분배였다. '늙은 과두정치인'으로 불리는 한 비평가는 "평민 놈들은 노래하고 달리고 춤추고 배를 모는 대가로 돈을 받아내려 안달이다. 부자들을 거덜 내서 제 배만 불리겠다는 심보가 아닌가"라며 툴툴거렸다. 그는 아테네가 다른 어떤 그리스 도시보다 축제를 많이 연다는 점도 꼬집었다. 오늘날 예술사의 거대한 업적으로 평가받는 아테네의 문화적 산물들이, 당시 엘리트층들에게는 부유층의 등골을 빼먹는 가혹한 세금이나 다름없었던 셈이다.

셋째, 종교 의식은 아테네 여성들이 시민으로서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핵심 창구였다. 여성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판단(krisis)'이나 '공직(archē)' 같은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에서는 완전히 소외되었지만 아테네의 여성 시민인 '폴리티데스'로서 공공 종교 의식에서만큼은 당당히 주역을 맡았다. 마지막으로 축제에서 상연된 예술 작품, 특히 연극의 내용 그 자체가 정치의 정점이었다. 당시 희극은 뼛속까지 정치적이었다. 기원전 424년 레나이아 겨울 축제에서 우승한 아리스토파네스의 작품 <기사들>은 아테네 민회(프닉스)의 '민중(데모스)'을 아예 사람으로 만들어 무대에 세웠다. "성격 까칠하고 귀도 잘 안 들리는 쪼잔한 영감님"으로 묘사된 '민중'은 파플라고니아에서 잡아 온 노예[22]를 비롯한 집안 노예들이 서로 아부하며 환심을 사려고 싸우는 꼴을 지켜본다. 나랏일을 집안싸움에 빗대어 화끈하게 풍자했던 것이다. 극의 결말에서 '민중'은 마법처럼 5세기 초의 "화려했던 리즈 시절"로 회춘하며, 선동꾼과 전쟁을 집어치우고 평화를 누리겠다고 선언한다.

이처럼 희극 무대는 당면한 사회 문제를 치열하게 고민하는 장소였다. 희극 뿐만 아니라 비극 또한 만만치 않게 시사적이었다.[23] 에우리피데스가 423년에 내놓은 <탄원하는 여인들>을 보면, 신화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데도 뜬금없이 민주주의의 맹점, 특히 선동꾼들의 해악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대목이 나온다. "선동가는 연설로 청중을 현혹시키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실을 이리저리 왜곡한다. 처음에는 청중을 즐겁게 하고 큰 기쁨을 주지만, 결국에는 해를 끼치고, 새로운 음해로 이전의 잘못을 감추고 정의의 심판을 피한다."
 
 
 
 
 
 
 
 
 
 
 
 
 
 
 
 
 
 
 
 
 
 
 
 
 
 
 
 
 
 
 
 
 
 
 
 
 
 
 
 

7.2.5. 장례식[편집]

 
 
 
 
 
 
 
 
 
 
 
 
 
 
 
 
 
 
 
 
 
 
 
 
 
 
 
 
 
 
 
 
 
 
 
 
 
 
 
 
젊은 남성들이 참여할 수 있었던 또다른 정치적 의례는 바로 전사자들을 기리는 연례 장례식이었다. 명망 있는 시민이 무덤 위에 올라 추도사인 '에피타피오스 로고스'를 읊었다.[24] 아테네 정부는 폴리스를 위해 싸우다 전사한 이들의 장례 비용을 국가가 전부 댔고, 아버지를 잃고 고아가 된 전사자의 자녀들을 성인이 될 때까지 직접 키웠다.

도시의 공적 묘지인 '데모시온 세마'는 옛 아고라 북서쪽 도자기 장인들이 모여 살던 케라메이코스 지구에 있었다. 이곳에서는 개인 묘비도 많았는데, 전사자들은 부족별로 짠 명단에 이름을 올렸고 군 장교들을 빼고는 전사자들 사이에 그 어떤 차별도 두지 않았으며, 심지어 누구의 아들인지를 나타내는 부칭조차 적지 않았다. 이름만 달랑 적혀 있으니 명단 안에서 몇 줄 차이로 이름이 같은 두 사람을 구분할 방법이 아예 없었을 정도였다. 아테네는 기원전 457년 타나그라 전투 이후 같은 민주주의 국가였던 아르고스인들에게도 비슷한 전사자 명단을 만들어주었고, 아르고스인들은 5세기 내내 이 풍습을 지켰다. 전사자 명단 자체가 민주주의 국가에만 있었던 건 아니지만, 아테네와 아르고스의 명단에서 부칭이 빠졌다는 점은 민주주의만의 뚜렷한 특징이다.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아테네인들은 시민들 중 매번 지혜롭고 이름난 사람을 골라 추도사를 읽게 했다. 페리클레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 첫해의 기원전 431년 겨울에 했던 그 유명한 추도사도 바로 이 맥락이다.[25] 장례 연설은 지도층 인사가 도시의 비전과 가치를 제시하며 공동체 의식과 사회적 기억을 심어주는 장이었다. 비록 연설 내용이 특정 이념에 치우치거나 사실을 제 입맛대로 비튼 면은 있어도 아테네 사회를 이해하는 데 있어 굉장히 중요한 의례였다. 장례식에서 추도사를 낭독하는 건 아테네만의 독특한 문화였지만, 전쟁 희생자를 나랏돈으로 묻어주고 남겨진 가족을 돕는 모습은 그리스 세계 전역에서 민주주의 국가라면 마땅히 해야 할 바람직한 관습으로 통했다.
 
 
 
 
 
 
 
 
 
 
 
 
 
 
 
 
 
 
 
 
 
 
 
 
 
 
 
 
 
 
 
 
 
 
 
 
 
 
 
 

7.2.6. 평의회와 다른 관직들[편집]

 
 
 
 
 
 
 
 
 
 
 
 
 
 
 
 
 
 
 
 
 
 
 
 
 
 
 
 
 
 
 
 
 
 
 
 
 
 
 
 
아테네 남성은 서른 살이 되면 공직(archē, 일반적으로 '통치'를 뜻하는 단어)을 맡을 자격이 생겼다. 비록 민회나 일반 시민 집단이 절대적인 권위를 지닌 주권자였으나, 실질적으로 시민을 다스리는 '정부' 역할은 어느 정도 권력을 행사했던 공직자들의 몫이었다. 본래 권력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았던 그리스인들에게, 누가 권력을 쥐고 어떻게 나눌 것인가 하는 문제는 헌법적 사고의 핵심이었다. 각 도시가 이 문제에 내놓은 해법에 따라 민주주의와 과두정치의 차이가 갈리는 경우가 많았다. 플라톤/대화편소크라테스는 "과두정치 체제는 재산의 양을 정해두는데, 과두정치적 성격이 강한 곳에서는 더 많고, 덜 강한 곳에서는 더 적으며, 정해진 재산이 없는 사람은 관직에 오를 수 없도록 규정한다"고 말했다.

쉽게 말해 과두정치에서는 부유층이라는 일부 시민이 모든 통치권을 독점하고 나머지는 평생 지배만 받았다. 반면 민주정치에서는 공직을 맡을 자격이 있는 시민 집단인 '폴리테우마'가 곧 시민 전체(데모스)였다. 최상위 재산 계급만 맡을 수 있었던 아테네 재무관 같은 예외도 있었으나, 이 규정은 사실상 사문화되었기에 주요 공직은 재산 요건이 아주 낮거나 아예 없었다.

이런 기본 체계가 '누가' 통치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면, '어떻게' 공직에 오르는지는 또 다른 문제였다. 아테네뿐 아니라 대부분의 민주 국가에서 관직은 선거가 아니라 추첨(제비뽑기)으로 무작위 배분되었다.[26] 아테네에서는 매년 수백 개의 관직이 이런 식으로 정해졌으며, 다른 폴리스들도 사정은 비슷했다. 기원전 450년대 후반 아테네 제국의 칙령으로 만든 이오니아 에리트라이의 민주 헌법만 봐도, 30세 이상 남성 120명으로 구성된 시의회를 추첨으로 뽑도록 규정했다. 이처럼 민주 국가에서 추첨을 널리 쓰다 보니, 민주주의와 관직 배분 방식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헤로도토스의 기록에서도 민주주의의 초기 모습은 다수결과 추첨을 통한 관직 배분으로 묘사되었고, 이후 수많은 저자가 민주주의를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설명했다.

물론 추첨이 당시 가장 민주적인 방식이었던 것은 분명하나, 민주주의의 필수 조건도 아니었고 민주정에서만 쓴 것도 아니었다. 과두정에서도 부유한 엘리트끼리 추첨으로 자리를 나눌 수 있었고, 거꾸로 모든 시민에게 자격이 있고 모두가 투표에 참여한다면 선거 역시 민주적인 제도로 보았다. 때로는 추첨제가 민주적으로 정당한지 의문을 제기하는 교묘한 주장도 있었다. 기원전 5세기 익명의 논문인 《디소이 로고이》 또는 《이중 논증》에서는 추첨제가 완벽한 민주적 제도인 것은 맞지만, 그리스의 모든 도시에는 평민을 경멸하는 자들(미소데모이, 즉 "백성을 증오하는 자들")이 살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만약 이런 자들이 운 좋게 추첨으로 뽑힌다면 민주주의를 내부에서 무너뜨릴 것이라는 논리였다. 저자는 차라리 민중이 민주주의에 충성하는 사람을 직접 선거로 뽑아야 한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이런 걱정은 현실이 되지 않았는데, 오히려 추첨제가 정부 내에 친민주적인 인사들을 늘려주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추첨제 공직 제도는 기존 민주주의를 더 탄탄하게 만드는 수단으로 여겨졌다. 기원전 412년 시라쿠사의 정치가 디오클레스가 시민들을 설득해 공직자를 추첨으로 뽑게 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아테네에서 가장 중요한 관직 중 하나는 평의회(boulē) 의원직이었다. 평의회는 고대 그리스 헌법에서 흔히 보이는 기구로 그 기원은 고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스파르타의 장로회(게로우시아)가 유명하지만, 클레이스테네스 개혁 이전 아테네에도 각 부족에서 100명씩 선출된 400인 평의회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 전역의 평의회는 민회에 올릴 권고안을 미리 만드는 것이 주된 업무였다. 이 과정을 '사전 숙의'(프로보울레우시스)라 하고 그 결과물을 '프로보울레우마타'라고 불렀다. 아테네 같은 민주정의 평의회는 도시의 여러 계층을 골고루 대표하는 '작은 폴리스'나 다름없었기에 그 성격이 매우 민주적이었다. 단순히 지역별(데메스) 안배뿐만 아니라 사회경제적 측면에서도 대표성을 띠었다. 1년 임기의 의원직을 두 번 넘게 할 수 없다는 엄격한 규정과 기원전 5세기 중반부터 지급된 공직 수당(미스토스) 덕분에, 부유한 엘리트가 아니더라도 광범위한 시민층이 의원으로 선출될 수 있었다.

따라서 민주정의 평의회는 로마 제국원로원처럼 귀족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시민 전체(데모스)가 참여하는 또 하나의 장이었다. 다만 사전 심의 제도는 민회의 권력을 제한하는 장치이기도 했다. 아테네를 포함한 여러 지역에서는 평의회에서 먼저 거르지 않은 안건은 민회에서 논의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제약 덕분에 야심 찬 연설가들이 의제와 상관없이 인기만 얻으려는 발언을 남발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평의회는 이 외에도 많은 일을 했는데, 각 부족의 프리타니아 3분의 1 기간 동안 아고라의 톨로스 건물에서 먹고 자며 도시를 24시간 지키는 경비대 역할까지 수행했다.

물론 관직이 평의회 의원직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아고라를 관리하는 10인 위원(agoranomoi)부터 도시 관리 위원(astynomoi), 11명의 감옥 관리자에 이르기까지 아테네에는 수백 개의 관직이 있었다.[27] 공직자들은 보통 단독으로 일하기보다 10개 부족에서 한 명씩 뽑힌 위원회 형태로 근무했다. 이런 관직들도 거의 다 추첨으로 뽑았으나, 군사 관직만큼은 예외적으로 민회(에클레시아) 특별 총회에서 모든 시민이 직접 선출했다.

'늙은 과두정치가' 같은 비판자들은 "데모스가 이익보다 위험이 큰 자리는 알아서 피한다"며 비웃었고, 실제로 선출직 군 간부 중에는 엘리트 출신이 많았다. 하지만 이는 무엇보다 군사직이 도시의 생존이 걸린 전문 기술을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특권층이 그 자리를 많이 차지했으나 재산 제한은 없었기에, 람노스 출신의 이피크라테스처럼 가난한 구두장이의 아들도 실력만 있다면 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 테오프라스토스도 이피크라테스를 예로 들며, 군사 관직에 재산 요건을 두는 것은 유능한 인재를 막는 시대착오적 발상이라고 비판했다. 선거를 본질적으로 귀족적인 것으로, 추첨을 진정한 민주적 방식으로 보는 현대적 시각도 있으나, 당시 아테네의 선거 열기는 매우 뜨거웠다. 후보들은 경쟁에서 이기려고 대중의 입맛에 맞는 주장을 펼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두고 관직에 눈먼 자들이 선거 기간에 "선동가 행세"를 한다고 꼬집기도 했다.

비교 대상으로 동시대 민주 국가인 아르고스의 사례를 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최근 헤라 신전의 보물창고에서 발견되어 해독된 청동판을 통해 당시 아르고스의 사례를 명확하게 분석할 수 있다. 아직 전체가 공개되지는 않았으나, 이 청동판은 아르고스에도 성인 남성 모두에게 열린 시민 의회(할리아)와 네 부족 대표로 구성된 평의회(볼라)가 있었음을 보여준다.[28] 또한 각 부족에서 두 명씩 선출되어 나랏돈을 관리한 8명의 '수네피그노모네스(동료 중재자)'도 실존했다.

한 청동판에는 이 80인 평의회와 '아르티나이'라 불리는 행정 위원회가 헤라 여신의 자금에서 코린토스 전쟁을 위해 코린토스 원정 비용을 인출하는 모습이 담겨 있다. 여기서 "하이 아르티나이(hai artynai)"는 당시 재직 중인 행정관들을 뜻하며, 아테네식으로 치면 "하이 아르카이(hai archai)"와 같은 말이다. 비문에는 평의회와 80인 평의회, 군사 관리인 폴레마르크 등 여러 위원회 대표와 서기관들이 참석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 행정관들은 민주주의를 지키고 권력 독점을 막기 위하여 대개 임기가 6개월로 제한되었다. 청동판의 정밀한 기록을 보면 아르고스의 민주주의 역시 아테네만큼이나 재정을 투명하게 운영하고 공직자를 엄격히 관리하려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이 선출직이었는지 추첨직이었는지, 수당(미스토스)을 받았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6개월이라는 짧은 임기는 새로운 인물을 계속 수혈하고 시민들의 참여를 끌어내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동안 아르고스는 아테네에 비해 온건한 민주정으로 평가받았으나, 이번 청동판 발견으로 그 평가도 다시 내려야 할 상황이다.
 
 
 
 
 
 
 
 
 
 
 
 
 
 
 
 
 
 
 
 
 
 
 
 
 
 
 
 
 
 
 
 
 
 
 
 
 
 
 
 
7.2.6.1. 공직 추첨제[편집]
 
 
 
 
 
 
 
 
 
 
 
 
 
 
 
 
 
 
 
 
 
 
 
 
 
 
 
 
 
 
 
 
 
 
 
 
 
 
 
 
민회는 당시 중요한 기관이기는 했지만 상당수의 주요한 권력은 민회가 아닌 다른 기관들이 가지고 있었다. 주요한 기능들은 추첨제도를 통해 선발된 시민들에 의해 행정관과 500인 평의회, 법원에서 수행했다.[29]

고대 아테네 민주주의의 가장 독특한 특징 중 하나는 공직자 선발에 선거가 아닌 추첨 방식 즉, 제비뽑기를 활용했다는 점이다. 많은 행정직이 시민들의 이름을 모아 무작위로 뽑는 방식으로 임명되었으며, 이를 통해 행정 조직을 구성했다.[30]

평의회(boule, 500인회)는 30세 이상의 시민 중 자원한 이들을 대상으로 추첨해 선발된 이들로 구성되었다. 아테네는 10개의 부족으로 나뉘어 있었고, 각 부족에서 50명씩 선출되었기 때문에 총 500명의 평의원이 1년 임기로 활동했다. 이들은 연임이 불가능했다.

시민법정(heliaia)은 매일 열렸으며, 이를 위한 배심원 역시 추첨으로 선발되었다. 매년 30세 이상 시민 중 6,000명을 먼저 추첨한 다음, 실제 재판 당일에 출석한 사람들 중에서 다시 필요한 수만큼 무작위로 선출해 법정을 구성했다.

행정관(archai)의 경우, 전체 약 700명 중 군사나 재정처럼 전문성이 요구되는 약 100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약 600명은 역시 30세 이상 시민 중 추첨으로 뽑았다. 이들도 임기는 1년이었으며, 같은 직책을 반복해서 맡을 수는 없었다.[31]
 
 
 
 
 
 
 
 
 
 
 
 
 
 
 
 
 
 
 
 
 
 
 
 
 
 
 
 
 
 
 
 
 
 
 
 
 
 
 
 
 
 
 
 
 
 
 
 
 
 
 
 
 
 
 
 
 
 
 
 
 
 
 
 
 
 
 
 
 
 
 
 
 
 
 
 
 
 
 
 
고대 아테네의 입법부가 민회였다면 행정부는 500인회였다. 원래 솔론이 처음 만들 때는 400명으로 구성되어 '400인회'라고 불렸지만 후일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으로 100명이 더 추가되며 '500인회'라고 불리기 시작한다. 클레이스테네스는 아테네의 모든 사람들을 데모스 총 10개로 나누었는데, 데모스들마다 30세 이상 성인 남성 50명씩을 추천하도록 만들어 총 500명을 모아 500인회를 꾸렸던 것이다. 임기는 1년이었고 추첨으로 뽑혔다.

500인회의 주요 업무는 사람들에게 재정 관리, 함대와 병사들의 관리 및 지휘, 선출직 공무원들의 행정 평가, 외국 대사 영접 등 일반적인 행정부가 하는 일은 모두 다 했다. 추첨으로 뽑혔던 터라 딱히 능력에 따라서 선출되는 건 아니었고, 1년마다 갈아치워졌으니 거의 아테네 시민 남성이라면 살면서 한번쯤은 500인회에서 일해보는 게 보통이었다.

500인회에서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일정 이상의 재산을 가진 자산가들에 속했다. 물론 겉으로야 모두가 평등하게 추첨으로 뽑히는 거였지만 공직이 봉사의 개념이던 아테네에선 500인회가 무보수였기 때문에 자산가가 아니고서야 생업을 제쳐두고 500인회에서 일하는 게 힘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아테네에서는 재산에 따라 사람들을 크게 4계급으로 나누었다. 500 메딤노스 이상의 최고 부유층은 펜타코시오메딤노이[32], 300 메딤노스 이상은 힙파다텔루테스[33], 200 메딤노스 이상의 제우기타이[34], 그리고 200 메딤노스 이하 최하류층인 테테스 등으로 나뉘었다. 500인회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최소 '제우기타이' 이상의 신분은 갖추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때문에 시간이 흐를수록 하류층 시민들의 정치 참여가 소외되고 불만이 쌓이자 기원전 5세기 들어서 500인회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소량의 봉급을 지급해 테테스들도 500인회에서 일할 수 있도록 만들기도 했다.

500인회의 총 인원은 이름처럼 500명이었지만 이 500명이 한 번에 다같이 일하는 건 아니었다. 이들은 또다시 50명씩 10그룹으로 나눠졌고, 1개월마다 1그룹씩 돌아가면서 1년 임기를 채웠다. 그래서 실제로 동시에 업무를 보는 인원은 50명 정도에 불과했다. 그룹들이 업무를 보는 순서는 역시 추첨으로 정했다.
 
 
 
 
 
 
 
 
 
 
 
 
 
 
 
 
 
 
 
 
 
 
 
 
 
 
 
 
 
 
 
 
 
 
 
 
 
 
 
 
 
 
 
 
 
 
 
 
 
 
 
 
 
 
 
 
 
 
 
 
 
 
 
 
 
 
 
 
 
 
 
 
 
 
 
 
 
 
 
 
서른 살에 접어든 아테네 남성은 비로소 디카스테리아, 즉 법정에 설 자격을 얻었다. 그리스 폴리스를 포함한 사실상 모든 문명 사회에서 사법 행정은 딱히 민주주의 국가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 사법 제도의 민주성은 규모나 권한, 절차, 그리고 시민들의 참여율 면에서 확실히 독보적이었다. 민회나 대규모 행정 기관처럼 디카스테리아 또한 시민을 대표하는 거대한 집단이 직접 참여하는 장소였다. 법정에 모인 배심원들인 '디카스타이'는 아예 시민 사회 그 자체인 '데모스'로 통하기도 했다. 이 배심원단은 특별한 사건이 터지면 적게는 수백 명에서 많게는 1,500명에 육박하는 대인원으로 꾸려졌다. 이들은 6,000명의 후보자 중에서 '클레로테리온'이라는 기계를 이용한 무작위 추첨 방식을 거쳐 선발되었다.

특별한 사법 선서를 마친 배심원들은 소송 당사자들이 펼치는 변론을 들었는데, 이때 기소한 쪽이 먼저 발언권을 얻었다. 모든 증거 서류는 재판장에게 미리 제출해 두어야 했다. 배심원들은 판결을 내리기 전에 양쪽 주장을 객관적으로 들어야 한다는 관례가 있었지만 실제로는 민회만큼이나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는 전쟁터였다. 민회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마음을 사는 설득력 있는 연설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비록 겉으로는 도시의 이익보다는 진실과 정의를 좇는 것이 목표였기에 화려한 수사법보다는 사실적인 서술 방식이 필요했지만 데모스테네스 같은 일류 웅변가들은 소송 당사자들에게 연설문을 써주는 '로고그라포이'로 이름을 날리며 기술을 팔거나 직접 법정 변호인인 '쉬네고로이'로 나서서 입담을 뽐냈다.

전문 변호사라는 직업이 따로 없었기에 사람들은 결국 스스로를 변호해야 했다. 연설문 작가를 고용했다면 그가 미리 써준 내용을 달달 외워서 나가야 했다. 만약 작가를 고용할 돈조차 없는 처지라면 납판에 저주를 새기는 등 마법과 미신에 매달리기도 했다.[35]

아테네 법정의 연설은 감정이 아주 격하게 실려 있었으며, 요즘 사람들이 보기엔 굳이 왜 저러나 싶을 정도로 군더더기가 많거나 사람을 홀리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민주적인 체제에서는 사법 절차가 전혀 다르게 돌아갔다는 점을 꼬집었다. 그는 "비방이나 동정, 분노 같은 감정은 사법적인 본질과는 아무 상관이 없으며, 그저 배심원을 구워삶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만약 모든 판결이 오늘날 일부 도시, 특히 질서가 잘 잡힌 과두정 국가들처럼 내려졌다면 연설가들은 입도 뻥긋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배심원들은 양측의 의견을 다 듣고 나서 거수가 아닌 비밀 투표로 투표함에 표를 던졌다. 집계 결과는 철저히 다수결로 정했다. 디카스테리아의 판결에는 항소라는 개념이 없었으며 처벌은 곧장 집행되었다. 때로는 배심원들이 처벌 수위를 직접 결정하기도 했다.[36] 아리스토파네스의 기록을 보면 기원전 5세기 후반의 배심원들은 대부분 나이 지긋한 노인들이었다. 이들은 원래 수입에 더해 법정 일당으로 반 드라크마인 '트리오볼'을 챙겼다. 희극 작가들은 법정을 두고 성미가 급한 데다 돈 많은 사람들에게 편견을 가진 집단이라며 풍자 섞인 비난을 퍼부었다. 일부 비평가들은 법원이 민주주의에 협조하지 않는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박해하는 도구에 불과하다거나, 시민들이 부유층의 재산을 뺏어 공금으로 쓰기 위해 부리는 수작이라고 깎아내리기도 했다.

법원의 이런 평판은 다른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비슷했다. 일례로 필루스 시가 스파르타에 도움을 요청한 부유한 시민들에게 벌금을 때리자, 스파르타인들은 이를 두고 필루스 시민들이 오만함의 극치인 '휘브리스'를 저질렀다고 보았다. 5세기 아테네에서는 '수코판테스(무화과를 드러내는 자)'라고 불리는 전문 소송꾼들이 설치기 시작했다. 이들은 부자들에게 말도 안 되는 소송을 걸어 입막음용 돈을 뜯어내거나, 대중이 싫어할 만한 사람을 기소해 정치적 명성을 얻는다는 비판을 받았다.[37] 테오프라스토스의 인물 유형집에 나오는 '과두정치 성향의 인간'은 "수코판테스들 때문에 이놈의 도시에서는 도저히 못 살겠다"라며 진저리를 친다. 기원전 404년 정권을 잡은 30인 과두정 체제는 배심원의 정치적 권한을 없애버리고 수코판테스 혐의를 받는 자들을 대거 처형했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다시 들어서면서 법정 체제도 부활했고 기원전 4세기와 3세기까지 유지됐다.
 
 
 
 
 
 
 
 
 
 
 
 
 
 
 
 
 
 
 
 
 
 
 
 
 
 
 
 
 
 
 
 
 
 
 
 
 
 
 
 
7.2.6.4. 행정 체계[편집]
 
 
 
 
 
 
 
 
 
 
 
 
 
 
 
 
 
 
 
 
 
 
 
 
 
 
 
 
 
 
 
 
 
 
 
 
 
 
 
 
아테네 제국은 아티카 지역 내에서 효과적인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에게해 주변의 여러 섬나라 및 연안 국가들과 정치적 동맹(이른바 '델로스 동맹')을 맺는 능력에 의존했다. 이러한 동맹은 거대 국가의 개입을 어느 정도 필요로 했다. 아테네는 알려진 고대 사회를 통틀어 가장 체계적인 구조의, 가장 풍부한 공적 지원을 받는 시민 기반 시설(civic infrastructure)을 발전시켰으며, 선출된 관리들이 광범위한 행정 업무를 담당했다. 기원전 600년경부터 아홉 명의 행정관(아르콘)이 시민 조직의 초기 핵심을 이루었다. 이들은 아르콘 에포니모스(ἄρχων ἐπώνυμος), 아르콘 폴레마르코스(πολέμαρχος), 아르콘 바실레우스(ἄρχων βασιλεύς), 그리고 6명의 입법관(테스모테타이)으로 구성되었다. 가장 서열이 높은 사람은 '아르콘 에포니모스'였고, 국가 최고 책임자로서 반쯤 국왕이나 다름없었다. '아르콘 폴레마르코스'는 군사령관이었고, '아르콘 바실레우스'는 종교 관련 업무를 전담했다. 임기는 1년 가량이었지만 상당히 들쭉날쭉해서 큰 의미는 없었다.

초기 아르콘들은 압도적 다수가 귀족 대가문 출신이었고, 임기를 마치면 아레이오스 파고스(아레오파고스)[38]라고 불리는 원로원에 해당하는 기구에 자동으로 들어갔다. 허나 솔론의 개혁 이후, 아테네의 권력이 민회 에클레시아로 옮겨가면서 아르콘의 지위가 크게 약화했고, 클레이스테네스가 상류층에게만 한정되었던 아르콘의 피선거권을 서민들에게 풀어버리면서 연달아 권위가 무너졌다. 특히 최전성기인 페리클레스 시대에 들어서는 아예 아레이오스 파고스를 유명무실하게 만들면서 귀족층들의 반발이 터져나오기도 했다.

앞에서 말한 '아레이오스 파고스'(Ἄρειος Πάγος)는 아테네의 원로원에 해당하는 기구였다. 초기에 아테네가 왕정을 폐지한 다음 귀족들이 모여서 창설한 회의체였는데, 일반 서민들이나 평민들의 접근을 허락치 않으면서 그 어떤 기구보다 귀족적이고 보수적인 기구로 변했다. '아레이오스 파고스'라는 단어 자체는 '아레스 신의 바위'라는 의미로 이 바위 위에 모여서 회의를 열었기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솔론은 아레이오스 파고스를 개혁하면서 이 기구에 반역죄 처리권인 '에이산겔리아'와 법의 수호자라는 뜻의 '노모필라키아'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이후 아테네의 사법부로 기능하면서 나름 권위있는 기관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아레이오스 파고스는 기원전 460년대에 들어서 점차 권한이 약화되면서 대부분의 기능을 민회에 빼앗겼고, 나중에는 거의 명예직 수준으로 전락할 정도로 유명무실한 기관이 되어버렸다. 그러다가 로마 공화국에 편입되자 술라가 이 아레이오스 파고스의 기능을 크게 강화했고, 잠시 동안 아테네의 실질적인 권력기구라는 타이틀을 되찾았지만 이마저도 오래가진 못했고 로마 본국에서 파견한 총독에게 뺏겼다. 다만 아레이오스 파고스 기구 자체는 서기 5세기까지 존속했다고 한다.

이러한 법률 관리들은 종교 재무관(타미아이)과, 시간이 흐르면서 배심원들로 보강되었는데, 여기에는 살인 사건을 담당하는 에페타이('51인')와 민사 사건을 담당하는 11인 배심원이 포함되었다. 또한 세금 징수관과 자금 배급관들[39]이 있었고, 다양한 종교 관리들(히에로포이오이)도 있었다. 아테네 민주주의는 특히 법률과 관련하여 바람직한 절차 관행으로 여겨지는 다양한 기능을 도입했는데, 여기에는 6,000명의 배심원과 민회[40] 및 평의회[41]를 위하여 국가 업무를 문서화하는 관리들이 포함되었다. 30명의 회계감사관은 로기스타이의 회계를 감사하는 책임을 맡았다. 10인으로 구성된 위원회(poletai)는 국가 계약 배분, 각종 세금 징수, 몰수 재산 매각을 담당했다. 이외 위생 담당관, 도량형 담당관, 아고라 담당관[42], 치안 담당관, 도로 건설 및 관리 담당관, 곡물 가격 담당관[43], 엔터테인먼트 담당관 등도 있었다.

5세기에는 아테네의 동맹국들로부터 공물을 징수하고 관리하는 관직이 많이 설치되었다. Hellenotamiai는 보통 10인으로 구성된 위원회였고, eklogeis는 동맹 도시들로부터 공물을 징수하는 관리였으며, episkopoi는 감찰관, eisagogeis는 동맹국을 대신하여 소송을 제기하는 관리였다. 이러한 관리들 중 일부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에 등장했다. apodektai(공공 수령관)와 taktai(사정관)도 이 범주에 속할 수 있다. 대부분의 아테네 관리들과는 달리 추첨이 아닌 직접 선거로 임명되었고, 연임 제한도 없었던 10명의 장군은 2명의 히파르크와 아테네의 10개 부족을 대표하여 시민들을 소집하는 10명의 필라르크의 지원을 받았다. 신성한 자금을 관리하는 임무를 전담하는 별도의 관료 조직도 있었는데, 특히 아테나 신전과 다른 신전의 재무관들이 그러했으며[44], 상위 4%의 부유한 개인들은 재정적인 지원뿐만 아니라 중요한 사업, 즉 삼단노선 건조 및 유지(trierarchy), 합창단 급여 지급 및 훈련(choregia) 등을 관리함으로써 국가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
 
 
 
 
 
 
 
 
 
 
 
 
 
 
 
 
 
 
 
 
 
 
 
 
 
 
 
 
 
 
 
 
 
 
 
 
 
 
 
 

7.2.7. 도편추방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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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고대 그리스인들이 썼던 도편 조각들

고대 그리스의 정치제도들 중 가장 유명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아테네도편추방제이다. 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 이후 집권한 클레이스테네스가 또 다른 독재자의 출현을 우려해 만들었고, 도자기 파편 조각에 사회의 안정을 위협한다고 생각되는 인물의 이름을 적어내게 해서 가장 많은 이름이 적힌 인물을 10년 동안 국외로 추방하는 제도였다. 그 10년 안에 다시 돌아오면 무조건 투석형에 처해 죽이거나 다시 사로잡아 도시 밖으로 쫒아냈다.

그렇지만 아테네 시민권과 재산은 빼앗지 않았고, 어디까지나 아테네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10년간 금지됐을 뿐으로, 10년이 지난 뒤에는 돌아오거나 심지어 공직에 복귀하는 것도 허용됐고, 페르시아 전쟁의 경우와 같이 국가의 존망이 걸려 있는 경우에는 기한조차 단축됐기 때문에, 고대라는 시대를 감안하면 굉장히 온건한 정적 배제수단이었다고 평가받는다. 이 도편추방제로 추방된 주요 인물로는 페리클레스의 아버지 크산티포스, 페르시아에 맞서 싸운 장군 아리스티데스, 알키비아데스 등이 있었다.

아테네의 마지막 도편추방은 기원전 416년경에 있었으나 이후로도 꽤 오랫동안 법적으로는 폐지되지않은 채 살아남아 있었다. 도편추방제는 원래 클레이스테네스가 기원전 508년 개혁안의 하나로 내놓은 것이지만, 실제로 처음 가동된 건 20년이나 지난 기원전 488년이었다. 이후 5세기 후반까지 약 15번 정도 시행되었는데 절차는 꽤 까다로웠다. 매년 열 번의 정치 기간(프리타니에) 중 여섯 번째 시기에 민회는 "올해 도편추방을 할까요?"라고 물었고, 여기서 과반수가 찬성해야만 판이 깔렸다. 사실 416년 전후의 대부분 기간에 시민들은 반대표를 던져 이 제도를 건너뛰곤 했다.

만약 추방하기로 결정되면, 다음 두 번의 정치 기간은 유력 정치인들의 지지자와 반대자들이 뒤엉킨 치열한 선거전으로 달아올랐다. 여덟 번째 기간이 되면 시민들은 각자 자기 부족의 이름이 적힌 토기 조각(ostrakon)을 들고 아고라 광장에 모였다. '오스트라코포리아'라는 의식에서 광장 중앙에 도편 조각들을 모아 집계했다. 추방이 성사되려면 최소 6천 명의 투표자가 필요했고, 이 정족수를 넘기면 가장 많은 표를 받은 사람이 추방되어 짐을 싸야 했다. 추방된 사람은 10년 동안 아티카 땅을 밟을 수 없었지만 재산은 그대로 보존되었고 거기서 나오는 수입도 계속 챙길 수 있었다. 10년 뒤(살아 있다면)에는 다시 공동체의 일원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왜 이런 제도를 만들었는지를 두고는 말이 많다. 고대 작가들은 독재(폭정)를 막기 위한 안전장치라고 보았다. 실제로 처음 추방된 히파르코스는 옛 독재자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친척이었다. 하지만 처음에는 독재자의 잔당들을 쫓아내던 시민들은 점차 쟁쟁한 정치가들을 내쫓기 시작했다. 페리클레스의 아버지 크산티포스, '정의로운 자' 아리스티데스, 그리고 살라미스 해전의 영웅 테미스토클레스까지 줄줄이 쫓겨났다. 플루타르코스는 이 제도가 누군가 너무 잘나가는 꼴을 못 보는 평범한 시민들의 시기심과 평등 욕구에서 나왔다고 보았다. 현대 학자들 사이에서는 엘리트들끼리 싸우다 내전이 터지는 걸 막기 위한 분쟁 해결책이었다는 설이나, 귀족들의 폭력적인 정적 제거 방식을 민중이 넘겨받아 제도적으로 길들인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45]

발굴된 도편 조각들을 보면 5세기 아테네인들의 정치감성을 생생히 느낄 수 있는데, 후보자를 향한 신랄한 비난이 적혀 있기도 하다. 테미스토클레스를 "싸구려"라고 부르거나, "항문 성교나 당하는 놈(katapygōn)"이라며 비속어를 퍼붓기도 했다. 어떤 도편에는 "테미스토클레스는 명예(timē) 때문에 쫓겨난다"는 알쏭달쏭한 말이 적혀 있기도 하다. 가끔은 '굶주림(limos)' 같은 추상적인 개념에 투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기원전 416년경에 히페르볼로스가 추방되며 도편추방제도 그 효용이 다한다. 원래는 당시 실세였던 니키아스와 알키비아데스 중 한 명이 쫓겨날 판이었는데, 둘이 손을 잡고 자기들의 추종자들을 동원해 애먼 히페르볼로스를 찍어내 버린 것이다. 투키디데스는 그를 "쓰레기 같은 인간"이라 부르며, 원래 취지인 '권력에 대한 경계'가 아니라 그저 인간 자체가 역겨워서 쫓겨난 수치스러운 사례라고 비난했다. 이후 아테네인들은 다시는 도편추방을 하지 않았다. 희극 시인 플라톤은 "그는 꼴좋게 당했지만, 도편추방 같은 격조 있는 제도가 그런 질 낮은 인간을 위해 쓰여서는 안 됐다"고 꼬집었다.[46] 4세기 아테네인들도 매년 도편추방을 할지말지 투표를 열었지만 결과는 항상 하지않는 것으로 끝났다.

아테네 말고도 아르고스, 밀레토스, 시라쿠사 등 여러 도시가 비슷한 제도를 운영했다. 특히 시라쿠사는 도자기 파편 대신 꽃잎에 이름을 적는 '화판추방(petalism)'을 시행했다. 하지만 시라쿠사에서도 화판추방제는 아테네보다 일찍 폐지되었다. 역사가 디오도로스 시쿨루스는 "추방이 무서워 엘리트들이 정치를 기피하자 선동가들만 판을 치고 나라가 어지러워졌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결국 도편추방제와 그 아류작들은 5세기의 뜨거웠던 민주적 열기 속에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진, 논란 많은 유산으로 남았다.
 
 
 
 
 
 
 
 
 
 
 
 
 
 
 
 
 
 
 
 
 
 
 
 
 
 
 
 
 
 
 
 
 
 
 
 
 
 
 
 

7.3. 민주주의 이념[편집]

 
 
 
 
 
 
 
 
 
 
 
 
 
 
 
 
 
 
 
 
 
 
 
 
 
 
 
 
 
 
 
 
 
 
 
 
 
 
 
 

7.3.1. 자유와 평등[편집]

 
 
 
 
 
 
 
 
 
 
 
 
 
 
 
 
 
 
 
 
 
 
 
 
 
 
 
 
 
 
 
 
 
 
 
 
 
 
 
 
현대 정치철학에서는 흔히 자유와 평등을 서로 부딪치는 관계로 보고 정부가 개인의 자유를 극대화하는 데 집중해야 하는지, 아니면 더 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자유를 어느 정도 제한해야 하는지를 두고 논쟁한다. 고대 그리스인들 역시 이 주제로 치열하게 싸웠지만 그 논리는 지금과 사뭇 달랐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민주주의의 정당성은 "'노예가 아닌 자유로운 몸(eleutheros)'이라면 누구나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운영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는 믿음에서 나왔다. 민주주의자들에게 자유는 논의의 출발점이자 종착역이었다. 부자든 가난한 자든 데모스(시민) 안의 모든 구성원은 동등하게 자유롭기 때문에, 정치적 권한 또한 똑같이 나눠 가져야 한다는 논리였다.

반면 과두정치 세력은 권력이 자유가 아닌 '가치'에 따라 배분되어야 한다고 맞섰다. 남다른 부와 공동체에 대한 막대한 기여를 하는 자신들이야말로 더 가치 있는 존재임을 입증하는 증거였다. 하지만 민주주의자들의 힘이 날로 커지고, 5세기 후반에 접어들며 이소노미아는 사실상 민주주의의 전제 조건이자 상징으로 굳어졌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나중에는 과두정 체제조차 자신들이 '이소노모스(평등한 권력 분배)'를 실천하고 있음을 증명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기도 했다.[47]

하지만 투키디데스가 그리스 내전의 참상을 기록하며 지적했듯이, 많은 이는 민주주의자들이 내세우는 '이소노미아 폴리티케(시민의 권력 평등)'가 사실은 가난한 다수가 부유한 소수를 지배하기 위한 명분에 불과하다고 믿었다. 실제로 민주주의자들은 이 개념을 휘둘러 반대파를 압박하곤 했다. 기원전 415년, 시라쿠사의 선동가 아테나고라스는 민회에서 반대파들을 향해 이렇게 쏘아붙였다. "여러분은 다수와 같은 정치적 권리(isonomeisthai)를 누리는 것이 싫습니까? 똑같은 시민이 똑같은 특권을 누리는 것이 마땅한데, 그것이 어째서 옳지 않다는 말입니까?"

이러한 권력의 평등은 남성 시민이라면 누구나 민회에서 발언할 수 있는 권리, 즉 '이세고리아(isēgoria, 발언의 평등)'로 이어졌다. 민주주의자들은 모든 시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자신들의 개방성을, 오직 의장에게만 발언권을 허용하는 과두정의 폐쇄성과 대비시키며 자부심을 느꼈다.[48] 권력이 평등하게 나뉘어 있었기에 다수결로 정해진 결론은 곧 '공정(ison)'한 것이었다.[49] 소수가 거부권을 행사하는 방식은 결국 소수의 지배를 인정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민회의 의사결정은 원칙적으로 찬성이 과반을 조금만 넘겨도 통과되었다. 만약 찬성표가 절반이 안 된다면 표를 일일이 세어 근소한 차이라도 더 많은 쪽의 손을 들어주었다.[50] 그러나 실제로는 아테네인을 포함한 그리스인 모두가 '호모노이아', 즉 만장일치를 매우 소중히 여겼다. 그래서 민회의 토론 규범은 웬만하면 합의에 가까운 결론이 나오도록 협력을 유도하는 쪽으로 작동했다. 반면 배심원 재판(디카스테리아)은 배심원끼리의 토론을 금지하고 비밀 투표를 원칙으로 했기에, 표가 팽팽하게 갈리는 일이 흔했다.

아테네인들은 이러한 평등주의적, 민주적 전통을 자랑스레 여기며 자신들을 외부와 구별되는 폐쇄적이고 신성한 집단으로 치부했다. 로마가 온갖 이방인들이 모여 세워진 나라임을 자랑스럽게 여긴 것과 달리 아테네인들은 본인들이 순수하고 고귀한 혈통을 이어받았다고 자부했다. 기원전 451년 페리클레스는 부모가 모두 아테네 시민이어야만 자녀에게 시민권을 주는 시민권법을 제정했는데, 이는 아테네인의 국수주의를 보여주는 동시에 "어떤 아테네인도 다른 아테네인보다 덜 순수하지 않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민중(데모스)을 엘리트와 대등한 위치로 올려놓는 장치이기도 했다. 매년 열리는 전사자 추도식(에피타피오스 로고스) 역시 이러한 아테네의 순혈 우월주의를 설파하는 핵심 장소였다.[51]
 
 
 
 
 
 
 
 
 
 
 
 
 
 
 
 
 
 
 
 
 
 
 
 
 
 
 
 
 
 
 
 
 
 
 
 
 
 
 
 

7.3.2. 개인적 자유[편집]

 
 
 
 
 
 
 
 
 
 
 
 
 
 
 
 
 
 
 
 
 
 
 
 
 
 
 
 
 
 
 
 
 
 
 
 
 
 
 
 
시민의 자유와 평등에서 피어난 시민적 이상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안갯속처럼 모호한 구석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해 당시 지식인들이 남긴 기록을 보면, 민주주의 체제의 핵심 원칙 중 하나는 개인이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요즘 시각으로 보자면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개인의 활동을 법으로 옥죄지 않는 사회적 자유주의와 결이 가장 비슷하다. 고대 그리스의 민주시민들이 이런 자유를 강력히 요구한 이유는 누군가의 지시를 받으며 사는 것을 곧 노예의 삶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여기서 눈여겨볼 대목은 민주주의가 말하는 '자유'가 대체 무엇과 맞서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일부 특권층이 통치를 독점하고 나머지는 평생 지배만 받는 과두정치 체제에서는 하층민의 삶이 훨씬 엄격한 규제를 받았다. 이런 통제는 지배 계층을 뒤엎으려는 민중의 움직임을 막으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자신들이 무지한 평민보다 어떻게 살아야 더 가치 있고 유덕한지 훨씬 잘 안다는 오만한 믿음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민주주의자들은 이런 선민의식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자 엘리트 비평가들은 민주주의 사회의 일반 대중이 제멋대로인 생활 방식을 정당화하려고 언어를 오염시킨다며 몰아세웠다. 제멋대로 구는 방종을 '자유'라 부르고, 법도 질서도 없는 무정부 상태를 '행복'이라 치켜세우며, 남을 헐뜯는 비방을 '언론의 자유'라고 포장한다는 비난이었다. 이런 흐름에 맞서 철학적 사고를 가졌던 과두 정치인들은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람'이 되려면 어느 정도 자기 절제를 보여주어야 하며, 일반 민중을 노예나 다름없게 만드는 저급한 욕망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웠다.[52]
 
 
 
 
 
 
 
 
 
 
 
 
 
 
 
 
 
 
 
 
 
 
 
 
 
 
 
 
 
 
 
 
 
 
 
 
 
 
 
 

7.3.3. 발언의 자유[편집]

 
 
 
 
 
 
 
 
 
 
 
 
 
 
 
 
 
 
 
 
 
 
 
 
 
 
 
 
 
 
 
 
 
 
 
 
 
 
 
 
그리스어 '파르헤시아'는 글자 그대로 풀면 "거침없이 다 말한다"는 뜻인데, 정치적으로 보면 참 묘한 구석이 있는 단어다. 원래 이 말은 폭군 같은 절대 권력자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할 말을 다 하는 용기를 뜻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시민 위에 군림하는 상급자가 따로 없었기에 누구나 안전하게 이 파르헤시아를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분위기가 묘하게 바뀌었다. 파르헤시아는 점차 사회 경제적으로 잘나가는 엘리트들만의 전유물처럼 여겨지기 시작했다. 이들은 '데모스'라는 집단적인 폭군에 맞서려면 파르헤시아 같은 배짱이 꼭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웅변가 이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시민들 앞에서 "여러분의 뜻에 반대하는 게 얼마나 힘든 싸움인지 잘 안다. 우리가 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기는 하지만, 정작 이 민회 안에서 파르헤시아는 실종됐다"라며 뼈 있는 말을 던졌다. 데모스테네스 역시 민회에서 "이토록 중대한 사안을 논의할 때는 위원 개개인에게 파르헤시아를 행사할 권리를 줘야 한다"고 말했는데, 이는 거꾸로 보면 민회가 그런 자유로운 발언권을 잘 주지 않으려 한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이런 식의 화법은 기원후 2세기에 이르기까지 연설가들 사이에서 일종의 유행처럼 이어졌다.
 
 
 
 
 
 
 
 
 
 
 
 
 
 
 
 
 
 
 
 
 
 
 
 
 
 
 
 
 
 
 
 
 
 
 
 
 
 
 
 

7.3.4. 추첨과 보수[편집]

 
 
 
 
 
 
 
 
 
 
 
 
 
 
 
 
 
 
 
 
 
 
 
 
 
 
 
 
 
 
 
 
 
 
 
 
 
 
 
 
아테네를 포함한 그리스 곳곳에서 ‘정치 권력을 공평하게 나누는 일’은 나름의 방식대로 자리를 잡았다. 특히 민주정에서는 투표가 아니라 제비뽑기로 권력을 무작위로 배분했다. 애초에 그리스인들은 중앙 집중된 권력을 생리적으로 불신하는 경향이 있었고, 제비뽑기는 특정 개인이나 집단이 권력을 독차지하지 못하게 막는 아주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나아가 모든 시민이 나랏일을 맡을 만한 최소한의 역량과 덕성을 똑같이 갖추고 있다는 민주주의자들의 강한 믿음이 깔린 제도이기도 했다. 이는 정치인이 정부 운영의 복잡한 문제를 해결할 특별한 능력을 따로 갖췄다고 믿으며 선거에 의존하는 현대와는 완전히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기원전 5세기 중반부터 아테네와 여러 민주 국가에 자리를 잡은 공직 수당(misthos) 제도는 일반 시민들이 이름뿐 아니라 실질적으로 정치에 참여하게 만든 핵심 장치였다. 정치를 해도 돈이 나오지 않는다면 시간과 돈이 넘쳐나는 부자들만 나랏일을 독점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비판자들은 파렴치한 정치가들이 유권자들을 꼬드기려고 수당을 계속 올리겠다는 미끼를 던졌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몇몇 특이한 사례를 빼면, 이 급여 제도는 특정 정치인이 제멋대로 주무를 수 없는 체계적인 시스템으로 굴러갔다. 민주주의를 싫어하는 쪽에서는 민중이 남의 돈(부유층의 세금)을 자기 권리인 양 요구하게 되었다며 비판했고 급여와 제비뽑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급이 낮은’ 사람들이 관직에 기어나와 결과적으로 민중의 힘만 더 세졌다고 투덜댔다. 아리스토텔레스 학파가 쓴 자료를 보면, 페리클레스가 재판 배심원들에게 수당을 주기 시작하자 "평범한 사람들이 상류층보다 더 기를 쓰고 관직을 따내려 하는 바람에 질이 떨어지고 있다"며 불평하는 이들이 있었다고 적혀 있다.
 
 
 
 
 
 
 
 
 
 
 
 
 
 
 
 
 
 
 
 
 
 
 
 
 
 
 
 
 
 
 
 
 
 
 
 
 
 
 
 

7.3.5. 공공성 및 책무성[편집]

 
 
 
 
 
 
 
 
 
 
 
 
 
 
 
 
 
 
 
 
 
 
 
 
 
 
 
 
 
 
 
 
 
 
 
 
 
 
 
 
아테네의 시민들이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고 해서 공직자들의 책임까지 면제해 준 것은 아니었다.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의 핵심 원칙 중 하나는 바로 '철저한 투명성'이었다. 이는 제국으로 성장하며 벌어들인 막대한 수입을 관리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부패를 막고 권력자를 견제하기 위해 모든 기록을 꼼꼼히 남기고 공개하려는 열망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제는 공직자의 임명 전후로 엄격하게 이루어졌다. 모든 공직자는 임무를 맡기 전 '도키마시아(dokimasia)'라는 자격 심사를 통과해야 했고, 1년 임기를 마치면 '에우티나이(euthynai, "곧게 펴다"라는 뜻)'라 불리는 감사를 받아야 했다. 헤로도토스는 일찍이 민중(plēthos)이 퇴임한 관리의 행적을 심판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이 절차를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보았다.[53]

대부분의 감사는 별 탈 없이 끝났으나, 5세기 후반 과두정치기를 거치면서 '도키마시아'는 과거 독재 정권(400인 및 30인 참주) 시절의 행적을 캐내는 숙청의 도구로 쓰이기도 했다. '에우티나이' 과정에서 공금 횡령이나 회계 부정이 드러나면 무거운 벌금이 부과되었고, 이를 내지 못하면 시민권을 박탈당하는 '아티미아(atimia)' 처분을 받아 사회적으로 매장되기도 했다. 이런 심사 제도는 그리스 전역에 퍼져 있었지만 아테네 같은 민주 국가만의 특징은 갈등의 최종 판단을 일반 시민들로 구성된 재판정에 맡겼다는 점이다.

당시 아테네인들이 수입과 지출을 낱낱이 기록해 둔 수많은 재산 목록과 명부들을 보면 당시 감사가 얼마나 철저했는지 알 수 있다. 민회에서 통과된 모든 법령은 사본으로 만들어 보관했는데[54], 누구나 언제든 열람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법전 역시 공공장소에 늘 전시되어 있었다. 아크로폴리스나 아고라 곳곳에 세워진 수백 개의 비문은 아테네가 얼마나 투명하게 국정을 운영했는지 보여준다.[55][56]

일부 비문에는 "원하는 사람(hoi boulomenoi)은 누구나 알 수 있도록" 정보를 기록한다는 문구가 명시되어 있다.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려는 목적도 있었겠지만, 나라에 헌신한 이들의 영광을 기록해 다른 이들의 동참을 이끌어내려는 의도도 컸다. 어느 쪽이든, 정보에 밝은 시민들이 직접 판단을 내리고 보상을 결정하는 '시민 주권'의 증거라 할 수 있다.[57] 결국 기록을 남기는 목적은 시민들이 '은혜는 갚고 원수는 처단하기' 위함이었고, 이는 보수적인 인사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민중의 심판을 '정의'로 볼지 '폭거(휴브리스)'로 볼지는 입장 차이가 컸으나, 처벌 수위가 가혹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5세기의 어느 해에는 제국 재무관(헬레노타미아이) 전원이 횡령 혐의로 기소되었는데, 10명 중 9명이 무죄 증거가 나오기도 전에 서둘러 처형당하는 비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정치가들이 도편추방을 당하는 일은 예사였고, 민중의 기대를 저버린 장군들은 재산 몰수나 사형이라는 가혹한 운명을 맞았다. 5세기의 장군 데모스테네스는 전투에서 패한 뒤 시민들의 서슬 퍼런 분노가 두려워 귀국을 포기했고, 파케스 장군은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느니 차라리 자결을 택했다. 기원전 406년 아르기누사이 해전 직후, 승전을 거둔 장군 8명 중 6명을 사소한 실수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처형했던 것은 두고두고 아테네의 흑역사로 남았다.[58] 비단 군인뿐 아니라 민중을 기만했다는 죄목으로 재판에 넘겨진 정치인들도 부지기수였다. 한 통계에 따르면, 아테네 정치인 41명 중 시민들의 손에 정치적 파멸을 맞지 않고 무사했던 사람은 고작 19명뿐이었다.

정치권에 대한 이런 혹독한 처사는 아테네만의 일이 아니었다. 아르고스에서는 한 장군이 시민(plēthos)과 상의 없이 스파르타와 협정을 맺고 돌아오자, 격분한 시민들이 돌을 던져 죽이려 했다. 그는 제단으로 도망쳐 목숨은 건졌으나 재산을 전부 몰수당했다. 기원전 410년 시라쿠사에서도 관직이 추첨제로 바뀌자마자 장군 세 명이 해임되고 추방되며 군 내부에서 거센 비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7.3.6. 민주주의와 법치[편집]

 
 
 
 
 
 
 
 
 
 
 
 
 
 
 
 
 
 
 
 
 
 
 
 
 
 
 
 
 
 
 
 
 
 
 
 
 
 
 
 
민주주의자들은 정치인의 정직성을 담보하려면 시민의 감시가 필수라고 믿었다. 하지만 엘리트 계층을 향한 그들의 강압적인 태도는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과연 양립 가능한지에 대한 의문을 낳는다. 아테네를 포함한 폴리스들이 과연 모든 시민에게 법을 공평하게 적용했는지, 아니면 그저 민중이라는 특정 계급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통치였는지는 따져볼 일이다.

아리스토텔레스 학파는 대개의 민주주의 체제가 일반 시민에게 유리하도록 편향되어 있다고 보았다. 아테네 민중이 과거 30인 위원회가 빌린 돈을 대신 갚기로 합의한 것은 아주 이례적인 선의였을 뿐이라는 주장이다. "다른 도시에서는 승리한 시민들이 제 주머니를 지키는 데 급급할 뿐 아니라, 부유층의 토지를 빼앗아 재분배하며 그들을 압박한다." 크세노폰의 기록을 보면, 젊은 알키비아데스는 후견인 페리클레스를 몰아붙이며 이렇게 주장하기도 했다. "대중(plēthos)이 재산가들을 설득하지 않고 무력으로 법령을 통과시키는 것은 법이 아니라 폭력이다." 이는 참주정이나 과두정이 인민을 억압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논리였다.

역사학자들은 아테네인 역시 다른 그리스 폴리스들처럼 법치주의를 이상으로 삼았다는 점에 주목한다. 일부 학자들은 당시의 제도적 지침과 규범이 절차의 일관성, 법 조문에 대한 존중, 그리고 편견이나 변덕의 배제를 독려했다고 분석한다. 일종의 민주적 사법 심사 기능이 작동했다는 뜻이다. 또한 기원전 5세기 후반, 아테네인들이 법전을 개정하고 임시 법령(psēphismata)이 영구법(nomoi)에 어긋나면 폐기하는 제도를 도입한 점도 근거로 꼽힌다. 하지만 새로운 법을 만드는 과정인 이른바 '노모테시아(nomothesia)'는 여전히 민중의 손에 달려 있었다. 그렇다면 이 체제를 진정한 의미의 "법치주의"라기보다 "민중 주권"의 발현으로 보아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안타깝게도 고대 민주주의자와 그 반대파들의 주장이 실제 현실에서 어떻게 구현되었는지 검증할 자료는 턱없이 부족하다. 아테네 민주주의가 오랫동안 유지되었다는 사실만으로 그 정당성이 입증되었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저 체제가 민중의 이익을 워낙 잘 챙겨준 덕에, 엘리트 비판자들이 전의를 상실하고 입을 닫아버린 결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신공화주의 정치 이론가들의 정의를 빌려, 아테네의 상류층이 과연 "지배당했는가"를 묻는 것이 더 본질적인 질문일지도 모른다.

자유주의적 관점에서의 자유와 달리, 신공화주의에서 말하는 '지배'는 누군가 실제로 나를 억압할 때뿐만 아니라, 상대방이 언제든 나를 억압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데도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는 상태 그 자체를 의미한다. 이런 잠재적인 위협 속에서 살다 보면 피지배자는 위축될 수밖에 없고,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말이나 행동을 하며 눈치를 보게 된다. 아테네의 엘리트들이 민주주의 체제 아래에서 이런 식의 지배를 받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더 나아가 규범적인 측면에서, 다수가 소수를 지배하는 체제가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체제보다 공리주의적으로 더 낫다고 단정할 수 있는가? 전자가 후자보다 더 많은 사람이 자유를 누린다는 점에서는 일견 타당해 보이기도 한다. 이런 맥락에서 아테네를 비롯한 고대 민주 국가들의 사례는 오늘날의 이론적 논쟁에도 풍부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8. 사회[편집]

 
 
 
 
 
 
 
 
 
 
 
 
 
 
 
 
 
 
 
 
 
 
 
 
 
 
 
 
 
 
 
 
 
 
 
 
 
 
 
 
고대 그리스 사회는 크게 시민권을 가진 시민들과 그렇지 못한 노예들로 나뉘었다. 오직 '토지를 가져서 세금을 낼 재력이 충분하고 군대 복무를 성실히 마친 성인 남성'이라는 꽤나 까다로운 조건을 통과해야만 도시의 정식 시민 자격을 획득한 걸로 여겨졌고, 그렇지 못한 경우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외국인이나 여성, 노예들은 시민 대접을 못 받고 살았다. 시민들 사이에서도 급이 나눠졌다. 고대 아테네의 경우 부를 척도로 크게 사회를 펜타코시오메딤노이(Pentacosiomedimnoi)[59], 300메딤노스 이상은 히페스(Hippeis)[60], 200메딤노스 이상의 제우기타이(Zeugitae)[61], 그리고 200메딤노스 이하 최하류층인 테테스(Thetes) 이렇게 나눴다. 하지만 이 계급이 고정되어있던 건 아니라서 재산만 모은다면 얼마든지 계급 이동이 가능했다.[62] 다만 시민들 사이의 절대적 평등을 중시하던 스파르타는 후술한 내용을 보듯이 극단적인 노예제로 악명 높았지만 일부러 모든 시민들을 '동료'라는 뜻의 호모이오이라고 부르면서 계급을 나누지 않았다.

노예들은 대략 고대 그리스 사회의 3분의 1 가량을 차지했다. 기원전 600년 무렵에는 거의 모든 그리스 도시들에 노예제가 도입됐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정식 시민 가정이라면 노예 한둘 쯤은 데리고 있는 게 보통이었다. 주인의 자비를 빌어 노예들도 개인 재산을 가지는 건 허락되었지만 정치권 따위는 당연히 없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주로 가사도우미나 가정교사, 힘든 일을 할 심부름꾼들로 많이 썼고, 전성기 시절에는 가난한 시민 가정에도 노예들을 부리곤 했다고 한다.

고대 아테네의 경우 노예의 비율이 최소 40%에서 최대 80%에까지 이르렀는데,[63] 이들은 워낙 인종이 다양하고 출신지가 달라서 결속력이 약해 함부로 반란을 일으키진 못했다. 그래도 혹시 모를 일이었기에 아테네인 주인들은 노예가 일을 잘하면 미래에 풀어줄 것이라는 당근을 제시하면서 노예들의 불만을 잠재웠다고 한다. 참고로 고대 그리스는 로마와 달리 해방된 노예가 시민으로 취급받지 못했다. 해방노예들은 '도시에 살고 있는 외국인'과 동등한 대우를 받았다.

이 노예제가 극단에 달했던 게 바로 스파르타다. 당시 스파르타는 크게 3계급으로 나뉘었다. 1계급의 시민권자 스파르티아타이(Spartiates), 2계급의 주변인과 항복한 자들인 페리오이코이(Perioeci), 3계급 노예 헤일로타이(Helots)였다. 위에서 말한 그 의무교육을 받고 진짜 사람으로 대접받았던 건 오직 1계급 스파르티아타이만 가능했다. 2계급 페리오이코이의 경우 상업 등에 종사했고 그나마 사람처럼 살 수는 있었다만 참정권은 없었다.

정말 최악이었던 건 밑바닥 헤일로타이들이었다. 이들은 예전에 스파르타에 복속되어 정복당한 폴리스 메세니아와 라코니아의 시민들이었는데, 이들은 사람보다 못한 대접을 받았다. 이들에겐 개가죽으로 생긴 우습게 생긴 모자를 씌웠고 심심하면 쳐들어가 죽여버리는 경우가 흔했다. 뿐만 아니라 농사짓는 노예였기에 하루 종일 혹독한 노동에 시달려야 했고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목이 날라갔다. 심지어 스파르타 소년이 성인으로 인정받는 과업들 중 하나가 헤일로타이 1명의 목을 잘라오는 것이었으니 얼마나 스파르타 시민들이 헤일로타이를 무시했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8.1. 여성의 지위[편집]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여성들의 지위는 매우 낮았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시민권은 오직 성인 남성에게만 한정된 개념이었고 여성들은 이 권리를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리스 여성들은 법적 권리도 없어서 남성들의 부속품으로 취급받았고, 남성 가주 '키리오스(Κύριος, Kurios)'가 소유한 가재도구인 '오이코스(οἶκος oikos)'의 일부로 여겨졌던 것이다. 애초에 고전 그리스어로 아내를 의미하는 단어[64] '다마르(δᾰ́μᾰρ damar)'가 '복종하다(to subdue)', '종속되다(to tame)'라는 단어에서 유래했을 정도니 당시 여성들의 지위가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다. 첩은 팔라케(Pallakae)/팔라카이(pallakai)라고 불렸다.

여성들은 결혼 전까지는 제 아버지의 소유물로 여겨졌고 결혼 후에는 당연히 제 지아비의 소유물로 여겨졌다. 남성의 평균 결혼 연령은 30세였고 여성의 평균 결혼 연령은 14세였다. 이렇게 일찍 여자를 결혼시킨 이유는 여자가 처녀를 유지하는 시점에 최대한 빨리 시집을 보내야 한다는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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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가장 민주적이라고 여겨졌던 아테네에서도 여성들의 지위는 그다지 좋지 못했다. 여성들은 재산권이 크게 제한되었으며 참정권 역시 당연히 없었다. 그나마 남자 가주가 여성을 제외하면 그 어떠한 남성 상속자도 남기지 못하고 죽으면 일시적으로 여성에게 재산이 상속되는 경우가 있었다. 이걸 '에피클레로스' 제도라고 불렀다. 허나 이는 철저하게 임시 조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성이 결혼하면 그 남편에게 재산이 모두 돌아갔다.

뿐만 아니라 여성들은 제 남편이 죽기 직전에 지정한 남자에게 강제로 시집가는 경우가 빈번했고, 보리 한움큼보다 낮은 가치의 물건들만 사고팔 수 있도록 제한을 걸어두면서 상업 행위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아테네에서는 심지어 길바닥에서 굴러다니던 거지조차 시민권이 있다면 참정권이 주어졌지만 여성들은 아무리 출신이 고귀하다고 해도 절대로 정치에 뛰어드는 게 불가능했다.

의외로 스파르타에서는 여성의 지위가 상당히 높았다. 시민들 사이에서 평등 하나만을 외치던 스파르타였고, 건강한 여성이 건강한 전사를 출산할 수 있다는 믿음 하에 여성들에게도 끊임없이 남자들처럼 운동을 시키고 체계적인 교육을 시켰기 때문이다. 게다가 남편들이 모조리 전쟁에 나가서 싸우다가 전사하는 경우가 지나치게 흔했기 때문에 여성들에게는 집의 재산을 처분할 권리도 주어졌다. 남편과 남자들이 모두 전쟁에 나가서 전투를 벌이고 있으면 집에서 여자들이 가사와 재산을 관리했던 것이다. 재산권도 없고 처분도 함부로 하지 못했던 다른 폴리스들과 비교하면 천지차이였다.

스파르타 여성들은 20세 이전에 결혼하는 경우도 거의 없었고, 어린 시절부터 몸을 드러내고 고된 훈련을 받아야했기에 사상도 굉장히 자유로웠다. 아테네 여성들은 치렁치렁한 옷을 입고 몸을 가려야했던 반면 스파르타 여자들은 짧은 드레스를 입고 원하는 대로 돌아다니는 것도 가능했다. 그러나 역시 가장 핵심적인 참정권에서는 철저히 배제되었으며, 집회에서 발언하는 것 역시 금지되었다.[65]

의외로 이혼할 권리는 보장된 편이었다. 양측이 모두 이혼을 원하거나 한 측만 이혼을 원한다고 해도 바로 결혼생활을 끝낼 수 있었다. 다만 남성은 본인이 원하기만 하면 바로 파혼을 요구할 수 있었지만 여성의 경우 제대로 된 시민으로 대접받지 못했기 때문에 남성 대리인을 내세워서 이혼 신청을 해야만 했다. 주로 시아버지나 여성의 형제들을 내세우는 게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이혼이 성립되면 결혼시 여성이 가지고 왔던 지참금은 고스란히 외가에 돌아갔고, 결혼 생활 동안 쌓은 부의 절반을 나누도록 했다. 다만 양육권의 경우 무조건적으로 가주 역할을 맡은 남자에게 돌아갔다.

다만 이렇게만 보면 양육권을 제외하고 얼핏 공정해 보일지 몰라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이혼이라는 행위 자체는 썩 사회적으로 달가운 일이 아니었고, 사회적인 평판이 하락하는 일이었기에 남성들은 이혼을 꺼렸으며 여성들은 이혼녀 신분으로 재혼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실제로 이혼이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대부분의 여자들은 아무리 남자가 깽판을 친다고 해도 집에서 참고 사는 일이 더욱 빈번했다고 한다.

이런 그리스에서도 어느 정도 권리가 보장된 여성들이 있었는데 코린토스의 아프로디테 신전 여사제들인 헤타이라(hetaira)들이 그 주인공들이다.[66] 코린토스는 아프로디테를 도시의 수호신으로 삼았고, 아름다움과 사랑을 지고의 가치로 삼는 도시로 알려지게 되었다. 코린토스로 모여드는 뜨내기들을 상대로 매춘도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다. 그것은 코린토스 중심에 세워진 아폴론 신전의 여사제들이 맡았던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그 일로 엄청난 고수익을 챙긴 곳은 코린토스의 남쪽에 우뚝 솟은 아크로코린토스에 있던 아프로디테 신전이었다. 그들은 시장의 길거리에 늘어서 있던 포르네(pornē)들과는 다르다며, 스스로를 헤타이라(hetaira)라고 불렀는데, '친구, 전우, 동반자'라는 뜻이었다. 어쨌든 코린토스를 통해 이오니아해와 에게해를 오가며, 멀리는 이탈리아반도와 소아시아를 잇는 무역으로 엄청난 돈을 번 상인들이 코린토스에 머물면서 신비롭고 아름다운 여사제들과의 사랑을 탐닉하며 돈을 아낌없이 탕진했다.

여기서 일하는 아프로디테의 사제들인 고급창녀들, 즉 헤타이라들은 남성 중심의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드물게도 여성으로써 존재감을 드러냈던 이들이었다. 아프로디테 신전에 갖다 바칠 제물을 구입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고, 이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공식적으로 여사제들이 매춘을 했다. 한결같이 뛰어난 미모를 지닌 여자들을 사제로 선발했기 때문에 어지간한 재력의 남자들은 감히 이 여사제들을 만날 수 없었다고 전해진다. 최고급 헤타이라가 되기 위해서는 특별한 훈련이 필요했다. 의복을 바르게 입고 화장을 잘하는 것도 중요했다. 남성의 욕구와 소망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했다. 헤타이라는 능숙한 대화력을 갖춰야 했고 지성이 뛰어나야 했으며 과거의 전통 문학과 당대의 그리스 문학에도 밝아야 했다.

그리스 사회에서 매춘부는 4종류가 있었다. 일일노동자의 하루치 임금이던 1오볼로스(obolus)(6드라크마(drachma))에 몸을 팔았던 포르나이(πόρναι pornai), 가무악(歌舞樂)의 예능을 익혀 연회의 흥을 돋웠던 아울레트리데스(auletrides), 대부분 남성을 상대했던 미소년 남창 카타미테스(catamites), 그리고 연회에서 부유한 남성의 파트너 역할을 수행하며 하룻밤 화대로 1미나(mina)(100드라크마(drachma))를 받았던 헤타이라다. 일반 매춘부의 삶은 노예와 다를 바 없었지만 코린토스의 풍습을 아테네인들이 받아들이면서 생긴 아테네의 최고급 매춘부인 헤타이라는 엄청난 부와 권력을 향유하며 최고 권력자까지 쥐락펴락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에피쿠로스의 애제자였던 레온티온과 아테네의 공동통치자란 평판을 얻었던 아스파시아는 지혜의 여신 아테나에 비길 만하다. 이 당시 아테네의 헤타이라들은 남성들과 지적으로 교류하면서 아테네 엘리트들의 공적 공간인 심포시온에 드나들었고 아스파시아의 경우에서도 드러나듯이 몇몇 헤타이라의 경우에는 심포시온을 직접 개최하여 아테네 엘리트 계층과 교우하기도 했다. 헤타이라는 그리스의 종교적인 분야에도 적극적이고 다양한 방식으로 참여했다. 헤타이라는 성소나 신전에 별다른 제약 없이 출입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종교적 의례의 모든 과정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헤타이라는 아테네 최고의 축제인 판아테나이아 축제나 테즈모포리아 축제와 같이 범아테네적 제전 뿐 아니라 엘레우시스 밀의나 디오니소스 밀의와 같은 비밀 종교행사에도 참여하는 등의 일반 여성과는 다른 자유를 누렸다.관련 논문

특히 헤타이라 아스파시아(Aspasia)는 명연설가로 유명했던 연인 페리클레스의 웅변술 교사이자 플라톤의 향연에 등장하는 지혜로운 여인 디오티마의 모델이란 찬사를 받았다. 그녀는 논리적인 설전력을 갖춘 철학의 논쟁가로 평판이 높았다. 역사가 플루타르코스는 아스파시아를 가리켜 정치와 국가에 대해 폭넓은 이해력을 지닌 뛰어난 여성이라고 평가했다.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그의 친구와 학생들을 데리고 그녀의 철학 강의에 참석했으며, 대중을 상대로 하는 거리 강의에도 참석했다. 페리클레스가 민주 정치를 꽃피우는 데도 그녀의 도움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가 정치적으로 개입해 권력을 얻은 사건은 당시 아테네 사회의 큰 논쟁거리였다. 아스파시아는 헤타이라 육성을 위한 가이나키움(gynaceum)이라는 학당을 소유하고 직접 가르치기도 했다. 그 외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에 영감을 준 모델인 라이스나 재판정에서 자신의 나체를 드러내 "예쁘면 모든 게 용서된다"라는 신화를 만든 프리네[67]가 유명하다.
 
 
 
 
 
 
 
 
 
 
 
 
 
 
 
 
 
 
 
 
 
 
 
 
 
 
 
 
 
 
 
 
 
 
 
 
 
 
 
 

9. 군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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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하면 그리스 로마 신화, 민주주의와 함께 가장 먼저 생각나는 분야들 중 하나다. 우리가 '고대 그리스 병사'라고 하면 흔히 떠올리는 깃 달린 투구에 금속 갑옷, 그리고 긴 창을 구비한 중장보병은 호플리테스라고 부른다. '호플리테스'라는 단어 자체는 전투장비들(ὅπλα/호플라)을 완전히 갖춘 병사라는 뜻이다. 고대 그리스군의 핵심 주력이자 대부분을 차지하는 병종이었는데, 이 호플리테스도 나름대로 재산이 있는 계급들만 지원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스스로 개인이 군장을 사들여서 입었기 때문에 갑옷과 무기 등을 모두 구매할 만한 재력이 있는 중산층 정도만이 호플리테스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에는 상비군이 존재하긴 했지만 그 수가 매우 적었고 대부분은 평시에 농사나 무역을 하다가 징집돼서 군대에 입대한 인원들이었다.

호플리테스의 장비는 개인이 준비하는 것이었기에 사람들마다 조금씩 달랐지만 전체적으로 청동 투구, 흉갑, 정강이받이를 착용한 후 방패를 들고 다녔다. 당시에는 이 군장들을 묶어서 '파노플리(πανοπλία)'라고 불렀다고. 하지만 이 청동으로 만들어진 파노플리들을 다 합치면 무게가 32kg이나 나갔고 돈을 많이 써야 하기 때문에 이 값비싼 청동제 무기들을 살 돈도 여유도 없는 일반 농민들은 그냥 아마포를 덧대 만든 경량 갑옷 '리노토락스'를 걸치는 게 보통이었다.
ancient corinthi...
ChalcidianHelmet...
Man pilos Louvre...
코린토스식 투구[68]
칼키디아식 투구
필레우스

그리스 병사들의 핵심이나 다름없는 투구는 순 청동으로 만들었다. 우리가 보통 그리스 투구라고 생각하는 투구는 '코린토스 투구'라고 따로 부른다. 주로 그리스 고졸기와 고전기에 많이 썼지만 후대에 갈수록 사용 빈도가 떨어졌다. 머리와 목 전체를 덮고 큰 곡선형 돌출부가 튀어나와 목덜미까지 보호했기에 방어용으로는 그야말로 최적이었다. 하지만 머리 전체를 덮었다 보니 정작 싸울 때 가장 중요한 시각과 청각을 방해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고, 결국 후대에 가면서 이보다 훨씬 개방적인 형태인 '칼키디아 투구'나 '필레우스'를 썼다. 하지만 그럼에도 코린토스 투구가 속되게 말하는 간지가 나는 건 사실이었기에 그리스인들은 주로 도자기나 벽화를 그릴 때 군인들이 코린토스 투구를 쓴 모습으로 그렸다. 옛 시절의 영광을 추억하는 멋진 소품 정도로 여겼던 것이다.

코린토스식 투구의 사용 빈도가 줄어들면서 새롭게 칼키디아식 투구가 등장한다. 코린토스식 투구에 비하면 훨씬 가볍고 부피도 작았고, 두 뺨을 가리기 위한 금속제 판이 달려 있었지만 코린토스식 투구만하진 않았다. 이 금속판은 부착형인 경우도 있었고 일체형일 수도 있어서 답답한 코린토스식 투구에 비하면 훨씬 쓰기가 편했다고 한다. 뺨 부분의 판에 경첩을 달아서 끈으로 얼굴에 착 붙게 개량한 투구도 있었는데, 이건 '루카니아식 투구'라고 따로 부른다. 또한 코린토스식 투구가 제대로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귀가 있는 부분에 고리를 만들어 귀를 완전히 노출시켰다. 전면에 콧대를 보호하기 위해 이마 부분에 작은 금속판을 덧대서 코 부분을 가리게 하기도 했다. 이 칼키디아식 투구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시대까지 쭉 쓰였고 나중에는 로마 제국 투구의 본바탕으로 발전한다. 한편 필레우스는 가볍게 천으로 만든 모자에 더 가까웠는데, 청동으로 된 투구 아래에 머리 보호용으로 썼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가장 흔하게 쓰던 모자기도 했다.[69]

호플리테스들이 쓰던 방패는 직경이 무려 80~100cm, 무게가 6.5~8kg에 달했으며 '아스피스(ασπις)'라고 부른다. 아스피스는 세 개의 재료를 덧대서 만들었는데, 적의 칼을 직접 받아내야 하는 가장 바깥은 청동으로, 중간 층은 단단한 목재로, 손으로 직접 받치는 가장 안쪽은 가죽으로 제작했다. 무게가 최소 6kg에서 최대 8kg까지 나갔으니 정말 전장에서는 어마어마한 무게였는데, 그래서 병사들은 주로 어깨에 방패를 살짝 걸치고 다녔다. 또한 이 아스피스는 손으로 직접 드는 게 아니라 팔뚝에 끈을 끼워서 팔뚝으로 받치고 다니는 구조였기 때문에 전장에서 훨씬 다루기가 쉬웠다. 그래서 실제로 병사들이 이 아스피스를 전투 도중 잃어버리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리스 병사들의 주 무기는 역시나 이었다. 그리스어로는 '도리(δορύ)'라고 불렀는데 그 길이가 무려 2.4m에서 2.6m에 달했다. 창날은 주로 구부러진 나뭇잎 모양이었고, 창 뒤쪽에는 '사우로터'라고 해서 날카로운 스파이크가 있었다. 이 사우로터는 주로 땅에 창을 쉽게 꽂거나 바닥에 쓰러진 적을 아래로 빠르게 내리찍기 위한 용도로 썼는데, 균형을 위해 창날보다도 무게가 무거웠다고 한다. 본 창날이 부러졌을 때 창을 거꾸로 잡고 이 사우로터를 쓰기도 했다. 어쨌든 그리스 병사들은 팔랑크스에서 이 창을 꼬나들고 전진하면서 싸웠는데, 길이가 2m가 넘고 꽤나 무겁다 보니 명중률도 낮아 창을 던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무게 때문에 창을 겨드랑이에 끼우거나 팔로 지탱하면서 싸웠다는 기록이 있다.

도 썼다. 하지만 창이 부러지거나 대형이 무너졌을 때 사용하기 위한 보조 도구에 그쳤다. 병사들이 쓰던 검은 '크시포스(ξίφος)'라고 불렀고 한손 양날검이었다. 길이는 고작 60cm에 불과했고, 스파르타의 경우 30cm 정도밖에 안됐다. 굳이 이렇게 검을 짧게 만든 이유가 따로 있었다. 같은 호플리테스끼리 전쟁을 벌일 일이 많던 고대 그리스에서, 짧은 검을 쓰는 게 촘촘한 방패벽 밖으로 상대의 사타구니나 목에 찔러넣기가 훨씬 용이했기 때문이다. 방패벽을 형성하고 그 안에서 버티는 전투 방식을 썼던 그리스에서 기다란 검은 휘두를 공간 자체가 부족했다. 물론 사람 나름이어서 일부는 '코피스'라고 해서 휘어진 검을 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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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도니아 페제타이로이(Pezhetairoi)의 팔랑크스.

고대 그리스 군대의 전통적인 싸움 방식을 팔랑크스라고 부른다. 호플리테스들이 방패을 들고 고슴도치처럼 밀집해 근접전을 벌이며 적을 압박하는 전술인데, 당시에는 상당히 선진적인 전술들 중 하나였다. 빽빽하게 창들이 늘어서 있으니 당연히 적들의 돌진을 극도로 어렵게 만들었고 평지 지형의 경우 정말 웬만하면 진형이 무너지는 경우가 드물었다. 한낱 시골에 불과하던 그리스가 당시 최강대국이던 아케메네스 왕조를 이길 수 있었던 핵심 이유들 중 하나도 이 팔랑크스 전술이었다.

기본적으로 대열을 유지하면서 방패로 자신과 옆 병사를 동시에 방어하는 것이 포인트. 중장보병 전투에서는 전통적으로 우익의 팔랑크스에 정예병을 배치하는 게 관례였다. 여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중장보병은 왼손에 방패를 들고 그것으로 자기 몸의 왼쪽 반신만을 가렸다. 우측면은 우측 병사의 방패에 맡겨야 했다. 두 사람이 한 개의 우산을 나눠 쓰듯이 방패를 공유하게 되는데, 맨 우측의 병사는 자신의 우측을 가려줄 방패가 없었다. 이 병사가 방패를 자신의 우측면으로 좀 더 당기면 연쇄반응을 일으켜 모든 방패가 우측으로 쏠리게 된다. 굳이 이런 경우를 고려하지 않더라도 방패가 우측으로 쏠리는 현상을 완전히 방지하기는 힘들었다. 팔은 안으로 굽기 마련이므로 방패의 엄호면이 공정하게 가운데를 유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병사의 몸도 방패를 따라 우측으로 가게 된다. 결국 팔랑크스는 똑바로 가지 못하고 우측으로 비스듬히 진격하게 된다.

다만 팔랑크스 대형 역시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기동성이 지나치게 떨어진다는 것. 진형 유지가 생명이나 다름없는 팔랑크스에서 진열이 무너지면 끝장이었기에 그리스 병사들은 빠르게 진격하는 게 불가능했다. 속도를 올리면 필연적으로 대형이 조금씩 흐트러질 수밖에 없는데, 이러면 팔랑크스 대형 자체가 붕괴되는 게 너무나도 쉬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병이나 경기병이 정면이 아닌 측면으로 돌아 공격해오면 무너지기 쉬웠고 적들이 후퇴할 때도 이를 따라잡아 공격하는 것 역시 불가능했다. 다만 산지가 많고 좁은 길목이 산재한 고대 그리스 특성상 팔랑크스가 크게 속도를 내거나 측면 우회를 걱정해야하는 일은 드물었고, 그 덕분에 고대 그리스 시대 내내 팔랑크스는 매우 유용한 군대 운용법으로 사용된다.

우리가 아는 그 제 키보다도 큰 수 미터에 달하는 창들이 숲처럼 앞으로 쭉 뻗어져 있는 팔랑크스 대형은 마케도니아 왕국에서 개량한 업그레이드 버전 팔랑크스다. 고대 그리스의 경우 이것보다 훨씬 짧은 창을 썼고 밀집도도 이만하진 않았다. 하지만 필리포스 2세가 본격적으로 군대를 강화하면서 6.5m에 달하는 거대한 창을 들고 다니게 만들었고, 중산층과 시민들로 구성된 고대 그리스의 전통적인 팔랑크스와 달리 아예 직업군인들로만 팔랑크스를 꾸려 걸어다니는 전투 기계나 다름없이 개조했다. 필리포스 2세의 뒤를 이은 알렉산드로스 대왕 역시 팔랑크스를 주력으로, 경보병으로 팔랑크스의 측면을 방어하도록, 그리고 경기병 부대랑 최정예 부대인 중기병 헤타이로이로 적의 측후면을 공격하는 이른바 망치와 모루 전술을 써서 열세인 국력에도 끝끝내 페르시아 제국까지 멸망시킬 수 있었다.

팔랑크스 전술은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그 후계자들의 삽질로 인한 팔랑크스 병사들의 질적 저하, 물량 감소, 그리고 측면 엄호 부대의 부족 등으로 계속 약점을 드러냈고, 결국 로마 제국레기온에게 최강 전열의 자리를 내어준다.

돈 없는 비시민이나 노예들을 전투에 동원할 때도 있었는데, 갑옷 없이 방패에 창만 들거나, 극단적인 땔 창 하나만 덜렁 들고 다닐때도 있었다. 고대 그리스 국가들의 필살기는 시민권 부여, 노예해방이었는데, 비시민이나 노예들을 공짜로 동원하는 방법이었다. 이렇게 해방된 이들도 있고, 반대로 전투 끝나고 입 싹 닦아서 그대로 노예로 남기도 했다.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는 훌륭한 시민으로 자라나기 위해선 교육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그리스에서 교육의 중심지는 누가 뭐래도 아테네였다. 아테네인들은 크게 교육을 '짐나스티케(gymnastike)'와 '뮤지케(mousike)'로 나눴는데, 짐나스티케는 육체적인 단련을 의미했고 뮤지케는 정신적인 계몽을 의미했다. 지금이야 예체능 계열을 제외하면 운동을 잘할 이유가 없지만 고대 그리스에서는 이 '짐나스티케'가 매우 중요한 과목이었다.

전쟁이 빈번하던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시민의 최고 덕목은 강건한 육체와 근력이었고, 이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빡세게 운동을 시키면서 아이들을 훈련시켰다. 보통 퇴역병이나 참전 용사들이 개인적으로 돈을 받고 개인교사처럼 붙어서 아이들을 지도했고 학생들은 '짐나시움'이라고 불리는[70] 수련장에서 운동해야만 했다.

한편 뮤지케의 경우 '뮤즈들의 학문'이라는 뜻이었는데, 주로 , 음악, 등을 배우는 게 주류였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수학이나 공학 따위는 배우지 않았다. 뮤지케에서 학생들이 배우는 건 리라를 타는 법, 합창에 맞춰서 노래하고 춤추는 법 등이었다. 짐나스티케에서 육체의 단련을 중시했다면 뮤지케에서는 예술을 통해서 사람들까리 어울려 사는 법을 배울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예술만 배우는 건 아니었고 문자를 쓰는 법과 기본적인 산수, 웅변술도 배웠다. 고대 아테네 학생들은 나무판에 왁스칠을 해서 만든 판에 대고 글을 썼다. 주로 배우는 내용은 고대 신화, 호메로스일리아스오디세이아 등이었다.[71]

그렇게 기본 교육을 받고 나서 성인이 되면 그때부터는 더이상의 의무적인 교육이 존재하지 않았다. 성인부터는 제가 알아서 교양을 쌓고 스스로 공부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고용했던 개인 교사들이 바로 그 유명한 소피스트다. '지혜로운 자'라는 뜻의 소피스트라 불리던 사람들은 주로 웅변술이나 말 잘하는 법을 가르쳤다. 좋게 말하면 수사학이고 나쁘게 말하면 궤변을 가르쳤던 사람들인데, 이 사람들이 아테네에서 인기가 많았던 이유는 당시 민주정과 법정 제도가 발달했던 아테네에서는 말솜씨가 좋은 게 필수적일 정도로 중요했기 때문이다.

다만 현대인들이 소피스트들을 말장난이나 가르치는 사람들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로는 수사학뿐만 아니라 수학, 음악, 체육, 심지어 의학까지 다양한 학문을 가르쳤다.[72] 아테네인들이 막대한 돈을 싸들고 이들을 찾아가 강의를 듣기도 했으니 단순한 사기꾼 따위가 아니라 당대 최고 지식인 계급에 해당하는 인물들이었던 것이다.[73]

아테네인들이 지식적 소양과 육체적 소양을 함께 쌓았던 반면 스파르타는 육체적 소양을 훨씬 중요시했다. 스파르타의 교육시스템을 '아고게'라고 부른다. 사실 교육 시스템이라기보다는 신병훈련소에 더 가까운 개념이었는데, 일단 7세에 불과한 어린 남자아이들을 강제로 가정에서 차출해 같은 나이의 아이들끼리 모두 모아놓았다. 이 아이들은 막사에 모여 한 곳에서 자고 한 곳에서 먹으면서 서로에 대한 동질감을 키워나갔고, 5년 동안 열두 살이 될때까지 정말 혹독하게 굴려졌다. 이 과정에서 죽는 경우도 많았지만 나약함을 수치로 봤던 스파르타인들은 그딴 걸 신경쓰지 않았다. 그렇게 12세까지 살아남고 나면 더욱더 혹독한 훈련만이 기다렸다. 아이들은 모의 전투를 하거나 신체 단련을 하면서 성인으로 인정받는 18세까지 쭉 동기들과 함께 살면서 자라났다.[74] 18세까지 훈련을 마치면 사관후보생 '에페보스'가 되었고 2년 동안 추가 훈련을 받았다. 사냥이나 협동해서 싸우는 법을 배웠고, 이 에페보스 기간이 끝나면 마침내 어엿한 스파르타 군인으로 대접받을 수 있었다. 사람을 이런 식으로 키워놨으니 정말 전투력 하나만큼은 세계 최강이라 할 법했는데, 전투에서 스파르타인들이 싸우는 모습을 본 다른 그리스인들이 "개개인이 아니라 하나의 유기체를 보는 것 같다"라고 감탄할 정도였다는 말이 있다.

시민들 사이의 절대적 평등을 추구했던 스파르타답게 스파르타에서는 여자들도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가장 큰 이유는 '건강한 어머니가 건강한 전사를 낳는다'라는 명목이었다. 교육의 대부분은 오직 체육 훈련으로만 이루어졌고, 여자들은 18세가 되기 전까지 창던지기, 원반 날리기, 레슬링 등 다양한 운동을 해야만 했다. 주기적으로 시험을 치렀고 이를 통과하지 못한 여성들은 벌을 받기도 했다. 물론 아예 교양 활동을 안한 건 아니었고 음악이나 춤을 배우기도 했으나 주류는 여전히 체육 수업이었다. 여자여도 훈련에서 제외시키지 않았다.
 
 
 
 
 
 
 
 
 
 
 
 
 
 
 
 
 
 
 
 
 
 
 
 
 
 
 
 
 
 
 
 
 
 
 
 
 
 
 
 
 
 
 
 
 
 
 
 
 
 
 
 
 
 
 
 
 
 
 
 
 
 
 
 
 
 
 
 
 
 
 
 
 
 
 
 
 
 
 
 
고대 그리스는 기원전 5세기에서 기원전 4세기 경에 경제적으로 정점을 찍었다. 전체적인 경제 규모로만 보자면 당연히 인구 수가 압도적이었던 이집트페르시아에 밀렸지만 개개인의 부유함으로만 따지면 타국인들보다 훨씬 더 부유했다. 고고학적 연구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생활 수준이 매우 높았을 뿐 아니라[75], 다른 문명들에 비해 부의 불평등 정도가 현저히 낮았음을 증명한다. 이러한 균질적인 번영은 농업이 아닌 무역과 상공업을 통해 이룩한 것이었다.
Weighing merchan...
Ancient-Greek-Mo...
상업행위를 묘사한 도자기.
그리스의 지도를 잘 살펴보면 알 수 있겠지만 대부분이 산지 지형에다가 토질도 썩 좋지 못하다. 오죽하면 그리스인들은 저들이 사는 땅을 거칠다는 뜻의 '스테노코리아'(στενοχωρία)'라고 부르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그나마 기온이 뜨겁고 화창한 그리스 지방에서 잘 자라는 작물이 포도올리브였는데, 그외에도 과수원이나 정원에서 허브를 재배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주식이 될만한 이나 곡물이 재배가 제대로 되지 못해서 식량들을 소아시아나 이집트에서 수입해야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참고로 척박한 그리스 땅은 그리스인들이 활발히 해상무역에 나섰던 이유기도 하다. 하도 땅이 척박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먹고살기 위해서라도 해외로 진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보통 그리스인들의 80% 가량이 농업에 종사했다. 가을의 시작과 겨울의 끝에 올리브를 수확했고, 봄에는 휴경지로 만들어 땅을 쉬게 만들었고 여름에 주식인 밀을 수확했다. 대부분의 토지는 귀족 소유였고, 그리스 농민 상당수는 이 귀족들의 땅을 빌려서 소작하는 구조였다. 결국 이 때문에 사회적 불평등이 지극히 심해지며 하위 계층들의 불만이 터져나오자 아테네에서는 솔론의 개혁을 통해 귀족들의 토지를 빼앗아 강제로 시민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하지만 솔론의 개혁 이후 시간이 흐르자 다시 귀족들이 대부분의 토지를 독점하게 된다. 다만 고대 로마 시대와는 달리 토지의 편중이 심하지는 않았고 은근히 자영농들도 많았다고 한다.

그리스 경제에서 가장 유명한 게 무역이다. 그리스에서는 '엠포로이( ἕμποροι )'라고 부르는 상인 계급이 존재했는데, 이들이 왕성하게 지중해와 흑해를 돌아다니면서 무역을 하면서 그리스가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로 떠오를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식민도시들과 무역소들이 건설되기도 했다. 당시 그리스 폴리스들은 초창기에는 딱히 상인들에게 관세를 걷지 않거나 낮은 관세를 물렸는데, 아테네의 주요 항구였던 피레우스의 경우 1% 정도의 관세를 물렸다고 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세금은 점점 늘어났다. 기원전 413년에는 아테네가 델로스 동맹의 해체로 인한 세액 감소를 메꾸기 위해서 관세를 5%로 크게 늘렸고, 이후 다른 그리스 폴리스들도 점점 세금을 물리면서 상인들에게 거두어들이는 세금은 더욱 늘어났다.

그리스에서는 드라크마라는 통화를 썼다. 화폐라는 개념 자체는 소아시아의 리디아 왕국에서 시작되었는데, 이게 나중에 아케메네스 왕조를 거쳐서 그리스까지 들어오면서 화폐가 그리스에서도 쓰이게 된 것이다. 아테네처럼 무역이 발달한 도시들이 가장 많이 쓰기 시작했고 기원전 550년 경에는 거의 모든 폴리스에서 통화를 발행했다. 그 유명한 '올빼미가 새겨진 아테네 은화'가 만들어진 것도 바로 이때 이야기다. 이 아테네 은화는 처음에 금과 은의 합금으로 만들어졌다가 후일 순은으로 주조되었고, 주로 라우리움에서 채굴된 은으로 만들었다. 참고로 그리스에서 가장 많이 은화를 주조할 능력이 많았던 지방은 트라키아마케도니아였다. 이 지방들에 워낙에 은광과 각종 광산들이 넘쳐났기 때문. 어쨌든 그리스인들은 이렇게 만들어진 화폐를 굉장히 애용했고, 심지어 저 바다 너머의 페르시아에서도 그리스 은화를 쓰곤 했다. 당시 페르시아에서도 '다릭'과 '시글로이'라는 금은화를 발행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발행량이 적었기에 그 대용품으로 그리스 화폐를 사용했다.[76]

무역이나 상업에 비하면 딱히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그리스에서는 공예와 수공업도 굉장히 규모가 컸다. 하지만 그리스인들 사이에서는 수공업을 천대하는 경향이 강했다. 직조업과 제빵업은 기원전 6세기까지만 해도 여성들만 하는 천한 일이라는 인식이 있었고 경제 규모가 커진 이후에도 노예들만이 주로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리스 시민들은 직접 무언가를 제작한다기보다는 노예들을 대량으로 들인 후에 이 대형 작업장에서 나오는 수익을 받아먹는 경우가 더 많았다.[77] 그리스인들은 점토, 금속, 가죽, 나무 등을 이용해서 뭔가를 만드는 걸 천박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그리스 도자기나 그릇들은 대부분 노예들이 제작한 것들이다. 도자기 도공의 경우 대부분이 극소수의 장인과 휘하 노예들로 구성된 작업장에서 일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고대 그리스에는 길드와 은행 및 협동조합도 많았는데[78], 외국인도 소속될 수 있었고 종교 컬트의 형태를 띠기도 했다. 상인과 장인들 뿐 아니라 예술가들과 운동선수들도 길드를 결성하고 헬레니즘 세계 전역을 아우르는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활발하게 교류했다.[79]
 
 
 
 
 
 
 
 
 
 
 
 
 
 
 
 
 
 
 
 
 
 
 
 
 
 
 
 
 
 
 
 
 
 
 
 
 
 
 
 
 
 
 
 
 
 
 
 
 
 
 
 
 
 
 
 
 
 
 
 
 
 
 
 
 
 
 
 
 
 
 
 
 
 
 
 
 
 
 
 
 
 
 
 
 
 
 
 
 
 
 
 
 
 
 
 
 
 
 
 
 
 
 
 
 
 
 
 
 
 
 
 
 
 
 
 
 
 
 
 

12.1.1.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편집]

 
 
 
 
 
 
 
 
 
 
 
 
 
 
 
 
 
 
 
 
 
 
 
 
 
 
 
 
 
 
 
 
 
 
 
 
 
 
 
 
아무리 고대 그리스에 관심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한번쯤은 그리스 철학에 대해 들어본 적은 있을 것이다. 그리스 철학자들이 이름도 비슷비슷한 경우가 많아 철학자 개개인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사람은 많지만 '고대 그리스 철학'이 중요하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리스 철학이 이렇게나 중요한 이유는 그리스 철학은 서양 철학의 시조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리스 바깥의 세상인 고대 근동에도 이성과 합리가 있었고, 현대에는 근동의 수많은 지혜문학들이 새로 발굴되고 있다. 오늘날에는 무슨 19세기마냥 "동방엔 합리가 없었죠" 같은 소리는 하지 않는다. 다만 그리스의 특이함은 사유의 구조화에 있다.
중동 전체의 지혜문학은 여러 세기에 걸쳐 필사되었고, 문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고대 중동의 지혜가 필사되고 보존되었다는 것은 세계 역사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다. 예외가 있다면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지혜보다 훨씬 후대인 공자의 책 정도이다. 지혜문학이 전수되어 젊은이들에 대한 교육이 수월하게 되었고 문화적 교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사실 서양의 사고방식은 고대 중동 문화보다는 그리스와 로마에 의해 형성되었다. 사실 그리스에서도 헤시오도스의 책 『노동과 나날』은 중동의 지혜에 비추어 볼 때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기원전 5세기부터 그리스는 고대의 지혜와 달리 사유를 구조화하는 철학을 발전시킨다. 바로 그러한 구조화가 중동의 고대 지혜에는 없었다.

Maurice Gilbert, S.J., 『하늘의 지혜』Les cinq livres des Sages: Proverbs, Job, Ben Sira, Sagesse, 안소근 번역, 성서와함께, 2016, p.13

고대 그리스 철학사는 크게 소크라테스의 탄생 이전 이후로 구분한다. 소크라테스의 등장 이전 우리가 최초의 그리스 철학자라고 부를 만한 위인은 식민도시 밀레투스 출신의 탈레스였다. 이 사람의 역사적 의의는 자연이나 자연적인 현상에 대해서 그 원인을 신의 섭리와 같은 초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계 내부에서 탐구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탈레스는 일식을 예측할 수 있었고 만물의 근원을 이라고 주장했다.[80] 탈레스가 창시한 밀레투스학파에서는 이후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 헤라클레이토스 등이 등장했는데 이들 모두 세계의 근원을 불변하는 하나의 개념으로 설명하려 시도했다는 공통점을 남겼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실체가 정해져 있지 않으며 사라지지도 않고 무한히 운동하는 물질인 아페이론(ἄπειρον)이 만물의 근원이라고 주장했다. 아낙시메네스는 공기가 만물의 근원이라고 주장했고, 헤라클레이토스는 을 만물의 근원이라고 봤다.

이후 밀레투스학파의 영향을 받아 이탈리아반도 엘레아에서 엘레아학파가 등장한다. 엘레아 학파의 대표학자인 파르메니데스는 논리적으로만 따졌을 때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기 때문에, 있는 것에서 없는 것이 되고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이 되는, 세상의 모든 "운동과 변화"는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밀레투스학파의 헤라클레이토스가 내세운 '모든 것은 변화한다'라는 주장을 반박한 것으로,[81] 이런 업적 덕분에 후일 형이상학의 아버지라 불리기도 했다. 이후 파르메니데스의 제자인 제논이 등장해 제논의 역설을 포함해 '운동과 변화' 자체는 불가능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애썼고, 엘레아 학파의 또다른 대표 학자인 멜리소스가 등장해 후대의 원자론에 영향을 끼쳤다.

파르메니데스와 엘레아학파의 등장으로 인해 생겨난 또다른 학파가 있으니 이게 바로 다원론자들이다. 파르메니데스의 존재에 관한 학설이 대두된 이후 더 이상 이전의 일원론만으로 세계를 설명하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이면 불, 이면 물, 공기면 공기 이렇게 하나의 존재가 만물의 근원이라는 일원론을 내세웠지만 파르메니데스가 이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일원론이 무너지게 된 것이다. 다원론자의 대표주자로는 엠페도클레스, 아낙사고라스 등이 있지만 가장 유명한 건 원자론을 제기한 데모크리토스다. 데모크리토스는 만물이 완전하게 채워진 입자인 원자와 텅 빈 공간 진공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고, 이들이 결합과 해체를 반복하며 물질이 이루어지고 소멸한다고 믿었다. 참고로 데모크리토스는 심지어 다중우주의 개념을 제시하기도 했다.[82]

소크라테스 이전 그리스 철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피타고라스다. 피타고라스의 정리 때문에 수학자로 더 유명하긴 하지만 사실 철학자[83]다. 일원론을 주장하던 밀레투스학파의 아낙시만드로스의 제자였고, 스승의 영향을 받아 만물의 근원이 수(數)라고 주장했다. 피타고라스는 이 세계가 단순한 물질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 수학적 구조나 수학적 형식에 의하여 만들어져 있다고 봤다. 세계 최초로 스스로를 철학자라고 부른 것도 바로 이사람이다.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채식, 살생 금지, 생명 존중 등을 요구하는 등 뒤로 갈수록 어째 사이비 교주같은 행동을 많이 했지만 후일 플라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고, 나중에 르네상스 때는 데모크리토스와 함께 실험적 자연과학의 성립에 중요한 역할을 맡아 세계 과학사적으로도 큰 의의를 남긴 인물이었다.
 
 
 
 
 
 
 
 
 
 
 
 
 
 
 
 
 
 
 
 
 
 
 
 
 
 
 
 
 
 
 
 
 
 
 
 
 
 
 
 

12.1.2. 소크라테스 이후 철학[편집]

 
 
 
 
 
 
 
 
 
 
 
 
 
 
 
 
 
 
 
 
 
 
 
 
 
 
 
 
 
 
 
 
 
 
 
 
 
 
 
 
고대 그리스, 개중에서도 민주주의가 꽃피웠던 아테네에서는 말 잘하는 기술이 최고였다. 그래서 점차 기원전 5세기와 기원전 4세기 즈음에 말 잘하는 법인 수사학, 웅변술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사람들이 등장했으니 이들을 소피스트라고 부른다. 최초의 소피스트로 알려진 사람은 프로타고라스.[84] 이들은 스스로를 철학자라고 부르지 않았다. 당대 철학자는 '자신에게 부족한 지혜를 구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었는데 이들은 이미 자신들이 지혜를 통달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 이런 엄청난 자신감과 함께 소피스트들은 아테네를 포함한 고대 그리스 학계를 지배하는 세력으로 발전했다. 유명한 소피스트들로는 회의론을 주창하던 고르기아스, 참주 히피아스 등이 있었다.
그러나 소피스트들이 지나치게 득세하면서 많은 단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들이 가르치는 기술이 좋게 말하면 수사학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궤변과 그럴듯하게 들리는 법을 가르치는 거나 다름없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이때 나타난 인물이 바로 그 유명한 소크라테스였다. 그는 소피스트들의 말장난에 놀아나는 아테네의 현실을 지적하면서 보편적 진리가 존재한다고 설파했다. 가장 유명한 그의 논리 설파 방식은 질문을 통해서 스스로가 무지함을 깨닫게 만드는 것. 끊임없는 질문을 통해서 스스로가 자연스레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는 사실 그 자체를 깨닫게 만드는 이 방법을 산파술[85] 혹은 소크라테스 문답법이라고 부른다. 소크라테스는 아고라 등 아테네 곳곳에서 아무 사람이나 붙잡고 이 산파술을 펼친 끝에 결국 자기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을 정말로 아는 사람은 없다는 걸 깨닫게 되고, "나는 내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걸 안다"는 말을 남겼다.[86]

소크라테스는 당대 아테네를 지배하던 소피스트들의 궤변을 배격하고 보편 진리를 추구하며 고대 그리스 철학의 새 지평을 열었다. 하지만 자신들을 비판하던 소피스트들이 아테네 시민들을 선동해 '청년들을 타락하게 만든 죄'라는 말도 안되는 죄목을 씌웠고, 소크라테스는 허무하게 독을 마시고 사망한다. 그를 이어 그리스 철학의 계보를 이은 인물은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던 플라톤이었다. 플라톤은 현실의 그 무엇도 완전치 않으며 그 대신 완벽한 이상세계의 이데아를 제시했다. 이 현실세계의 모든 것이 그저 이 이데아의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며 일종의 보편자를 제시했던 것이다. 그 외에도 플라톤은 선(善)의 이데아, 데미우르고스 등 수많은 개념들을 제시했지만 자세히 따지고 들어가면 지나치게 복잡해지고 한도 끝도 없으므로 여기까지만 서술한다. 자세한 내용은 플라톤이데아 문서 참조.

플라톤은 이데아를 중심으로 한 형이상학의 기초를 닦아 소크라테스와 함께 서양 철학의 근간을 만들었다. 이후 플라톤의 사상을 계승, 발전시킨 인물이 등장하니 이 사람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제자로서 철학, 수학, 천문학, 화학, 미술 등 수많은 분야에서 엄청난 업적을 남겼는데, 이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냐면 아이작 뉴턴 이전의 가장 위대한 과학자라고 불릴 정도다. 플라톤의 제자였지만 그의 이데아에 반대하며 현실주의적인 형이하학적 자연탐구를 중시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저서 오르가논에서 세계 최초로 귀납논증, 삼단논법을 구체화했으며 정치학윤리학의 기초를 쌓았다. 게다가 제5원소의 개념을 제시하며 후대인들이 몇천 년 동안 연금술에 매달리도록 만든 인간도 이 아리스토텔레스니 이 사람이 얼마나 막대한 영향을 끼쳤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12.1.2.1. 플라톤의 혼합정치와 근대국가[편집]
 
 
 
 
 
 
 
 
 
 
 
 
 
 
 
 
 
 
 
 
 
 
 
 
 
 
 
 
 
 
 
 
 
 
 
 
 
 
 
 
흔히 아테네의 민주정이 현대 민주정과의 연결점이 강조되지만, 플라톤의 혼합정치론도 현대 민주정에 엄청난 기여를 하였다. 가령 아테네의 민주정은 '민주정'이라는 이름을 현대 민주정과 공유할지언정 '선거'를 군주정적 요소로 보고 혐오하였으며, 다수(데모스)의 권력 역시 견제 당하여야만 한다는 현대적 권력분립론과는 거리가 있다. 그러나 플라톤은 혼합정치론에서 민주정과 군주정일 결합한 일종의 권력분립을 노렸다.[87]

이러한 플라톤의 혼합정치이론은 아리스토텔레스 및 고전기 로마로 이어졌고, 중세에는 이탈리아계 도시국가들로 계승되었으며, 근대에는 미국을 비롯한 근대 공화정에도 적용되었다. 비록 프랑스 혁명 이후 '민주정'이라는 단어가 서양 사상계에서 특별한 위상을 차지하여 '선거 민주정' 같은 단어까지 출현했고[88] 혼합정치라는 단어는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져버렸지만, 다수(데모스)의 권력도 견제 대상이며 권력은 분립되어야 한다는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적인 생각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이 논문은 플라톤의 혼합국가론을 검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플라톤은 『국가』에서는 철인통치를 핵심적인 내용으로 하는 이상국가를 주장하면서 5가지 국가형태를 제시하였다. 하지만『법률』에서 플라톤은 철인통치가 현실적으로 실현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법치국가와 혼합국가를 주장하게 된다.

플라톤은 군주국가와 민주국가를 정체의 모형으로 설정하고, 양자의 장점을 결합시킨 혼합국가를 실현가능한 가장 이상적인 국가형태로 제시한다. 혼합국가는 군주국가에서의 지혜라는 가치와 민주국가에서의 자유라는 가치를 중용의 원리에 따라 조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플라톤이 혼합국가론을 주장하게 된 가장 중요한 배경은 국가의 올바른 통치를 위해서는 통치자의 절제가 매우 중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통치자에 대한 견제와 균형이 필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혼합국가에서 여러 국가기관은 군주제적 요소인 선거와 민주제적 요소인 추첨을 복합적으로 활용하여 선임하게 된다. 선거를 민주적인 제도로 보는 근대적인 관념과는 달리 플라톤은 선거를 군주제적인 제도로 보았고, 추첨은 능력이나 공적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한 기회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민주적인 제도로 보았다.

플라톤의 혼합국가론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계승되었고, 근대에 들어서면서 몽테스키외의 권력분립론에 수용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플라톤의 혼합국가론은 근대헌법이론의 원류라고 할 수 있다.

-한상수, 〈플라톤의 혼합국가론〉 논문 초록
『국가』의 민주정은 자유를 말 그대로 모두 허용하는 정체이고, 『법률』의 혼합정체는 자유가 상당히 제한되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 그렇다. 그래서 『국가』는 제한 없는 자유와 그것을 허용하는 민주정을 비판하는 것이며, 『법률』은 제한된 자유를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자유를 이렇게 피상적으로 이해하면, 플라톤이 『법률』에서 입법가가 법률을 제정할 때 목표로 삼아야 할 덕목 가운데 하나로 자유를 지목하고 적극적으로 내세우는 이유를 이해하기 곤란해진다. 플라톤은 우애와 분별이 나라 전체, 즉 나라의 모든 구성원들이 지녀야할 덕이듯이, 자유 역시 시민이든 관리든 할 것 없이 나라의 모든 구성원들이 지녀야할 ‘덕’으로 제시하고 있다. 덕으로서의 자유는 방임적인 자유와 같을 수 없다.

플라톤은 자유의 의미를 개념적으로 구별해서 사용하고 있지 않지만 그 구별은 분명하다.[89] 자유로운 행위의 주체는 개인이지만, 개인의 영혼 속에 무엇이 주인 노릇을 하는가에 주목하면 자유의 의미는 달라진다.

플라톤에게 있어 행위의 진정한 주인은 지성이다. 지성은 모든 것의 주인이고 지배자다.[90] 지성이 주인이 되는 자유가 덕으로서의 자유다. 지성이 주인인 한 지성이 지도하는 모든 행위는 자유로운 행위다. 혼합정체에서 법률은 지성을 최대한 모방한 지성의 대리자와도 같으므로 법률이 부여하는 모든 권리의 행사는 자유의 실천인 것이다.

이것을 군주정과 민주정의 원리로 표현하면, 군주정과 민주정의 혼합인 ‘지성과 자유의 혼합’이 된다. 혼합정체의 관직체계와 선거제도 모두 지성과 자유의 혼합된 결과물이다.[91] 특히 민주정의 원리와 동일시되는 추첨은 매우 제한적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지성의 통제로부터 벗어남을 최소화한다는 뜻이다. 플라톤이 『법률』에서 혼합정체의 덕목으로 제시하는 자유는 『국가』에서 비판하는 민주정의 자유가 아니다. 비판받는 민주정의 자유는 욕망의 방임을 의미하는 자유이고, 추구하고 성취해야할 혼합정체의 자유는 지성이 인도하는 자유, 즉 자율이다. 혼합정체의 자유는 법률이 모든 시민들과 관리들에게 부여하는 권리이자 의무로서의 자유이며, 우애적 관계 형성의 바탕이 되는 평등한 자유다.

-김인곤, 〈플라톤의 『법률』에서 법에 의한 통치와 혼합정체- ‘혼합’의 의미를 중심으로 -〉
 
 
 
 
 
 
 
 
 
 
 
 
 
 
 
 
 
 
 
 
 
 
 
 
 
 
 
 
 
 
 
 
 
 
 
 
 
 
 
 

12.1.3. 헬레니즘 철학[편집]

 
 
 
 
 
 
 
 
 
 
 
 
 
 
 
 
 
 
 
 
 
 
 
 
 
 
 
 
 
 
 
 
 
 
 
 
 
 
 
 
그리스 철학의 3대장이라 할만한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인 헬레니즘 시대에도 그리스 철학은 명맥을 이어나가며 꾸준히 발전했다. 이 시기의 가장 유명한 학파로는 스토아 학파, 에피쿠로스 학파, 회의주의, 키니코스 학파, 신플라톤주의 등이 있다.

스토아 학파금욕주의라는 독특한 특성으로 상당히 유명하다. 로고스로 대표되는 이성주의와 합리주의를 가장 중시했으며 욕망이 이성을 가린다고 보고 금욕적인 삶을 추구했다. 창시자는 제논이었으며 주요 스토아 학파 철학자로는 에픽테토스, 네로 황제의 스승이었던 세네카, 오현제 중 하나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이 있다. 실로 고대 그리스를 넘어 로마 제국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친 학파였던 것이다. 이후 바뤼흐 스피노자합리주의 철학에 영향을 끼쳤으며 현대까지도 전해져내려오고 있는 역사가 오래된 학파다.

이와 완전히 대척점에 선 학파가 에피쿠로스에피쿠로스 학파였다. 이들은 현생의 쾌락을 가장 중시했으며 개인의 행복이 삶의 최종 목표라고 믿었다. 이 '쾌락'의 개념을 육체적, 일시적 개념의 1차원적 쾌락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에피쿠로스 학파에서 추구하던 쾌락은 그딴 단순한 쾌락이 아니었다. 에피쿠로스 학파가 말하는 쾌락은 '고통의 부재'를 의미하고, 고통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것이 곧 쾌락의 상태라고 보았다. 에피쿠로스는 오히려 육체적인 쾌락은 필연적으로 고통을 수반하기에 이를 멀리해야 한다고 보았고 최소한의 쾌락만을 충족하면 된다고 여겼다. 현대인들이 에피쿠로스 학파가 무조건적으로 쾌락을 쫓는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완전히 반대의 개념인 것이다. 이런 순간적인 쾌락을 쫓던 학파는 오히려 쾌락을 인간 행위의 궁극적 목적으로 삼는 쾌락주의의 한 분파인 키레네 학파가 더 유사하다.

견유학파로도 알려진 키니코스 학파 역시 잘 알려져 있다. 모든 것을 냉소적으로 바라봤고 현실의 명예와 부를 크게 의미가 없다고 봤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안티스테네스가 처음으로 창시했고, 이 키니코스 학파의 이념을 극대화시킨 인물이 유명한 디오게네스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소원을 묻자 햇빛을 쬘 수 있게 앞에서 비켜달라고 요구한 일화가 유명한 인물인데, 디오게네스는 그 정도로 모든 것을 덧없는 걸로 여겼다. 하지만 아예 삶을 포기하거나 무기력하게 살았다는 뜻은 절대 아니었다. 키니코스 학파는 소크라테스의 영향으로 덕(德)을 중시하여 신체적·정신적 단련을 중시하였고, 고대 헬레니즘 세계를 여행하며 사상을 전파하기도 했다. 이들은 그리스인과 이방인을 구분하지 않고 자신을 세계 시민(cosmopolitan)으로 소개하곤 했다.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추구했다는 점에서는 도가의 사상과도 유사한 면이 있었다.

플라톤의 사상을 계승해 새롭게 체계화한 학문이 바로 신플라톤주의다. 후대에 전해진 플라톤의 저작은 약간의 편지를 제외하곤 모두 대화편으로 되어있어 플라톤 본인의 사상을 정리하기가 극도로 난해한데,[92] 이걸 서기 3세기 플로티누스를 시작으로 후대인들이 다시 엮고 묶어 정리한 게 신플라톤주의라고 생각하면 된다. 현상으로서의 세계는 실체로서의 세계인 아니마 문디의 환영상일 뿐이라는 생각, 모든 인과관계를 결정하는 '단일한 원리'로서의 일자에 대한 개념이 신플라톤주의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공통적인 관점이다. 신플라톤주의자들은 인간의 완전함과 행복은 내세에서의 구원이 아니라 현세에서의 깨달음을 통해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해 철학적 숙고와 통찰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후 아우구스티누스를 포함해 초기 기독교의 영지주의와 이슬람의 무타질라 학파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주요 철학자는 플로티누스와 여성 철학자 히파티아다.
 
 
 
 
 
 
 
 
 
 
 
 
 
 
 
 
 
 
 
 
 
 
 
 
 
 
 
 
 
 
 
 
 
 
 
 
 
 
 
 
 
 
 
 
 
 
 
 
 
 
 
 
 
 
 
 
 
 
 
 
 
 
 
 
 
 
 
 
 
 
 
 
 
 
 
 
 
 
 
 
파르테논 신전으로 대표되는 그리스 문화의 정수. 고대 그리스에서 석재 건축이 발달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리스 본토 자체가 험한 산간 석회암 바위 지대라 질좋은 백색 석재들을 구하는 게 매우 쉬웠기 때문이다. 특히 낙소스 섬과 피로스 섬 일대에는 최상급의 백색 대리석들이 널려 있었기에 이를 이용하지 않는 게 오히려 바보였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는 기후적으로도 태양빛이 강렬한 편에 속하는데, 대리석은 윤을 내면 이 빛들을 반사해서 아름답게 반짝거리는 효과를 낸다. 심미학적으로도 흙이나 나무 같은 재료들보다 훨씬 아름다웠기에 기후적 요소도 더더욱 그리스 지방에서 석조 건축이 빠르게 발전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고대 그리스 건축
고대 그리스 건물들은 크게 줄줄이 늘어선 기둥들 위에 거대한 수평 상인방인 '엔타블러처(Entablature)', 그리고 그 위에 삼각형의 페디먼트(Pediment)가 얹어진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위 사진을 보면 오른쪽 기둥 바로 위에 엔타블러처라고 표시된 부분을 볼 수 있다. 엔타블러처는 크게 3개로 또 분류하는데, 가장 아래쪽에 기둥과 바로 접하고 있는 아키트라브(Architrave), 중간의 두툼한 띠 형태의 장식 부분인 프리즈(Frieze), 그리고 프리즈 바로 처마 끝에 달린 처마 장식 코니스(Cornice)다. 그리스인들은 주로 프리즈 부분과 코니스 부분에 화려한 돋을새김과 장식들을 그득그득 새겨서 신전을 극도로 장중하게 꾸몄다. 이렇게 구성된 엔타블러처 위에 얹힌 상단부가 '페디먼트'다. 우리가 흔히 생각나는 삼각형 모양의 지붕을 바로 페디먼트라고 부른다. 페디먼트 정면, 즉 출입구가 나 있는 부분의 페디먼트에 특히 장식과 조각들이 많았다.

지붕에는 붉은색으로 기와를 구워서 덮었다. 위의 그림만 봐도 페디먼트와 엔타블러처, 벽들이 그냥 직접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걸 볼 수 있는데, 당시에는 지붕을 받칠 삼각형 트러스를 만든다거나 그런 기술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냥 벽에다가 가로로 서까래와 대들보들을 얹어놓고 그 위에 기와를 올린 것에 불과했다. 후대의 로마처럼 아치 형태를 생각해 냈었다면 훨씬 효율적이었겠지만 미처 거기에까진 이르지 못했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 건물들은 그 크기에 비해 내부 공간이 상당히 협소하다. 참고로 당시 그리스에서는 암기와와 수키와를 한 짝으로 만들어서 한꺼번에 제작했는데 그래서 S자 모양이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기와에 비해서 훨씬 크기도 크고 무게도 무거워서 거의 너비가 70 cm, 무게가 1개당 30 kg에 달했다. 게다가 기와를 굽는 데 노동력도 꽤 들어갔고 만들기가 비쌌다고 한다. 굳이 이 모든 비용들을 감수하고 신전에 비싼 기와지붕을 올린 이유는 기와가 워낙 내구성이 좋았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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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그림은 도리아 양식으로 지어진 전통적인 그리스 신전의 모습인데, 하나씩 뜯어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일단 1번은 '팀파눔(Tympanum)'이라고 부른다.[93] 건물 정면의 대문이나 출입문, 창문 위에 얹혀 있는 반원형, 삼각형의 부조 장식을 의미하는데 개중 그리스 신전의 경우처럼 삼각형의 팀파눔은 '페디먼트(Pediment)'라고 따로 구분해 부르기도 한다. 주로 신들이나 영웅들의 조각상을 올려놓아 화려하게 장식했다. 참고로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의 페디먼트를 장식하던 조각상들은 아직도 남아있는데, 이게 바로 그 유명한 엘긴 마블이다.

2번은 '아크로테리움(Acroterium)'이라고 부르는데 페디먼트의 정상 부분 및 양 모서리에 얹어 놓은 장식물이다. 대개 스핑크스니케 등의 조각상이나 종려잎 모양으로 만들어 달았다. 보통 건물이 중요할 수록 이 아크로테리움이 더 화려하고 커졌다. 3번으로 표시된 지붕의 위쪽 가장자리는 '시마(Sima)'라고 하며 위로 구부러졌다는 뜻의 그리스어 '시모스'에서 유래했다. 이 시마는 위로 휘어져 있어서 비가 내릴 때 물이 양 옆으로 흘러내리도록 하는 홈통 역할을 했다. 4번이 '코니스(Cornice)'다. 건축을 공부한다면 당연히 들어봤을 용어인데, 건물의 처마 끝에 달린 수평 장식이다. 주 기능은 시마와 마찬가지로 건물의 벽에 빗물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건물에서 돌출된 채로 튀어나와있어서 위에서 떨어지는 빗물이 벽면에 직접 닿지 못하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5번은 도리아식 건축에서 주로 등장하는 부분인데 '뮤툴(Mutule)'이라고 부른다. 건물에서 돌출된 코니스를 받쳐주는 역할이었지만 후대로 갈수록 지지 기능보다는 건물 장식용으로 많이 쓰였다. 7번은 '프리즈(Frieze)'로 건물의 기둥이나 회랑 위에 새겨진 가로띠 형태의 양각 장식을 의미한다. 건축물에 부피감을 주고 무엇보다도 화려한 모습으로 건물 자체에 기품을 더하는 효과가 있었다. 가장 유명한 건 파르테논의 프리즈. 현대 신고전주의 양식을 포함해 수많은 현대 건물들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건축 양식이다. 그림을 유심히 보면 프리즈 한가운데에 8번으로 표시된 걸 볼 수 있는데 이건 '트라이글리프(Triglyph)'라고 수직 기둥 모양의 프리즈 장식물의 일종이다. 프리즈를 꾸미는 데 쓰던 대표적인 장식물들 중 하나로 세로로 홈을 내서 그림자가 지게 만들었다. 트라이글리프들 사이사이 직사각형의 오목한 공간들은 9번 '메토페(Metope)'라고 부르며 조각상이나 부조를 새겨서 꾸몄다.

10번과 11번은 '레굴라(Regula)'라고 부른다. 프리즈의 트라이글리프 아래에 만들어져 있다. 원래는 초기 목조 건축에서 프리즈를 받치는 일종의 지지대로 기능했지만, 석조 건축으로 넘어오면서 실제적인 기능은 사라지고 장식적인 요소로만 남았다. 5번 뮤툴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비가 건물 바깥쪽으로 떨어지게 하는 부가적 효과도 있었다. 12번에 수평 모양의 장식은 '타에니아(Taenia)'라고 했으며 13번은 상인방(上引枋)인데 그리스인들은 '아키트라브'라고 불렀다. 14번은 기둥머리인 주두((柱頭))다. 그리스인들은 이 주두도 따로 세세하게 나눴는데, 15번으로 표시된 납작한 기둥주 맨 위의 판때기는 '아바쿠스(Abacus)'라고 했고 16번 아바쿠스 아래 기둥 몸통과 주두를 잇는 경사진 부분은 '에키누스(Echinus)'라고 했다.

17번은 당연히 건물을 떠받치는 기둥(Column)이다. 고대 그리스 건물들을 보면 기둥에 길게 독특한 세로로 홈을 파낸 걸 볼 수 있는데, 이걸 18번 '플루팅(Fluting)'이라 한다. 원래는 고대 이집트에서 유래했는데 그리스인들이 기둥에 모조리 이 플루팅 기법을 쓰면서 나중에는 그리스 건축의 상징이나 다름없게 된다. 플루팅의 주 효과는 그림자를 만들고 빛의 착시효과를 내서 건물을 더 장중한 모습으로 보이게 했다. 맨 아래 19번 건축물의 기단부 부분은 '스틸로베이트(Stylobate)'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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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둥주의 장식 모양에 따라서도 건축 기법을 분류했다. 고대 그리스의 기둥주 장식은 도리아 양식, 이오니아 양식, 코린토스 양식으로 나눈다. 참고로 해당 분류법은 로마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가 처음으로 이렇게 분류한 이래로 쭉 3개로 나눠서 쓰고 있다고 한다. 어쨌든 제일 왼쪽에 있는 기둥 장식을 '도리아 양식(Doric Order)'라고 부른다. 가장 단순하고 초기 형태의 기둥주인데 파르테논 신전도 이 도리아 양식으로 지어졌다. 후대에 등장하는 이오니아 양식이나 코린토스 양식에 비해서 화려함은 떨어지지만 특유의 깔끔하고 단순한 분위기 때문에 현대까지도 많이 애용하는 기둥주 장식이기도 하다. 또한 이오니아식이나 코린토스식에 비해서 건물에 특유의 무게감을 부여해 권위주의적인 느낌을 준다.

중간에 있는 게 '이오니아 양식(Ionic Order)'이다. 소용돌이 모양으로 꾸몄음이 특징으로, 헬레니즘 시대에는 대부분 이오니아 양식을 이용해서 건물을 지었다. 소용돌이 디자인의 모티프 자체는 앵무조개나 숫양의 뿔에서 따왔다고 추정한다. 이전의 초기 도리아 양식에 비해서 기둥이 엔타블러처를 받치는 면적이 훨씬 넓어서 안정적으로 지탱할 수 있었다. 도리아식 기둥보다 훨씬 가벼운 느낌을 주는 게 특징이고, 기둥에 세로로 보통 플루팅 24개를 넣어서 홈을 파냈다. 가끔씩 최대 44개까지 홈을 파내는 경우도 있었다.

마지막이 '코린트 양식(Corinthian Order)'이다. 딱 봐도 알겠지만 셋 중에서 가장 화려하고 시기상으로도 제일 늦게 등장한 양식이다. 앞의 도리아식이나 이오니아식은 목조건축에 쓰이던 장식들을 돌로 모양을 본떠서 지은 건데, 코린토스 양식은 처음부터 석조건축에서부터 등장했다. 비트루비우스에 의하면 고대 그리스의 금속업자 칼리마쿠스가 제단 위 바쳐진 화환에서 영감을 얻어서 처음으로 고안했다고 한다. 2줄로 늘어선 종려잎이나 장미 잎사귀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맨 위에 엔타블러처를 지지하기 위해서 널찍한 사각판 하나가 올라가 있다. 주로 고대 로마에 가장 애용된 기둥장식이며 아름다운 화려함 때문에 현대까지도 많이 쓰이는 건축이다. 다만 지나치게 화려함이 강한지라 공공건물에 쓰기에는 부담스러운 면이 있어 공공건물보다는 호텔이나 사유지 건축에 많이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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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 아크로폴리스의 아테네 신전 (에렉테이온)에 남아있는 카리아티드 (Καρυάτις / Caryatid).[94]

그외에도 다양한 양식의 기둥들이 있었다. 위의 사진에 보이는 카리아티드는 페르시아 전쟁에서 동족 대신 페르시아 편에서 싸운 카리아이[95]에 대한 보복으로 현지 여인들을 노예로 삼은 후 신전을 지탱하는 기둥에 새긴 것이 유래라 한다. 카리아티드는 후일 헬레니즘 문화를 통해 인도에도 전해져 불교 사원에서 하늘을 떠받드는 천인상에 영감을 주었고, 다시 한국으로 전해져 법주사 쌍사자석등처럼 동물이 하늘을 지탱하는 형태로도 쓰였다. 다만 후자의 경우는 카리아티드가 아닌 하늘을 받드는 티탄아틀라스에서 유래된 것이라고도 한다. 어쨋든 고대 그리스에서 유래된 것은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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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스
아디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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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그림에는 전형적인 고대 그리스 신전의 내부도가 그려져 있다. 신상을 포함한 제단이 놓여 있던 장소는 '나오스(Naos)' 혹은 셀라(Cella)라고 부른다. 신전에서 가장 중요한 방이자 중심이 되는 공간으로 대부분의 의식은 여기서 치렀다. 나오스 앞에 있던 게 '프로나오스(Pronas)'다. 나오스에서 돌출된 측벽으로 형성된 일종의 전실인데, 현관에서 이 프로나오스를 거쳐서 나오스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대칭성을 중요시했기 때문에 나오스 뒤에도 똑같이 공간을 만들었는데 이게 아디톤(Adyton)과 오피스토도모스(Opisthodomos)다. 딱히 필수적인 공간은 아니어서 일부 신전에는 없는 경우도 많았다. 오피스토도모스와 아디톤을 연결하는 현관문조차도 없어서 거의 장식적인 공간에 불과했다. 이 주변에는 한 줄, 가끔씩은 두 열의 열주들이 나오스와 프로나오스, 아디톤과 오피스토도모스를 모두 감싸고 있었다. 이 기둥과 건물 사이의 회랑 공간을 따로 '페리스타시스(Peristasis)'라고 한다.

지금이야 색이 다 바래서 허연 석재들만 황량하게 남아 있지만 예전에는 알록달록하게 색칠이 되어있었다. 크게 붉은색, 푸른색, 흰색만을 썼고 가끔씩 검은색도 썼다. 기둥이나 아키트라브는 거의 흰색인 경우가 대다수였고 타에니아와 프리즈 같은 데에만 화려하게 색을 칠했다. 그래서 그때에도 신전들을 봤을 때 백색이 주류 이미지였을 것이다. 뮤툴처럼 옴폭하게 들어간 부분은 검은색으로 칠해서 일부러 음영을 강조하기도 했다. 또한 페디먼트를 장식하는 조각상들 역시 실제 사람처럼 의상이나 피부에 진짜처럼 색을 칠해서 생생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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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하면 빠질 수 없는 분야들 중 하나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 어떤 문명권들보다도 인체를 묘사한 조각상들을 많이 만든 문명인들에 속했는데, 이는 그리스인들은 인간의 몸 자체를 신성시했기 때문이다.[96] 그리스인들은 신이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 믿었으며 예술에서 성스러운 것과 세속적인 것의 구분이 없었다. 그리스인들은 인간의 육체 그자체를 '성스러운 동시에 세속적'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특히 고대 그리스 조각을 얼핏 봐도 알겠지만 그리스인들은 젊고 탱탱한 육체를 완벽한 형상으로 봤다. 늙고 추해진 몸뚱아리는 그 빛을 잃은 걸로 여겼고, 그래서 늙은 노인이 죽어서 무덤에 묻힐 때에는 죽기 직전의 모습이 아니라 그 사람의 가장 젊고 활기차던 시절을 묘사한 조각상을 세웠다.[97]

조각상들의 주 재료는 대리석이나 청동이었다. 좋은 대리석들이 풍부하게 나던 그리스 특성상 새하얀 백색 대리석들이 흔했던 덕이 컸다. 지금이야 남아있는 게 대부분 대리석 조각상들밖에 없지만 사실 청동으로도 많이 만들었다. 하지만 청동 조각상은 상당히 쓸모가 많은 금속이어서 후대인들이 죄다 녹여버린 통에 남아있는 게 몇되지 않아서 우리가 찾아보기가 어려운 것이다. 대리석 조각상은 피부나 얼굴처럼 밖으로 드러나는 부분은 대리석으로 만들었고 옷 같은 물건은 훨씬 부드럽고 가공하기 쉬운 나무로 만들어 붙이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98] 가장 중요한 신상은 이나 상아로 만들었는데, 당연히 수천 년이 지나는 동안 싸그리 녹여지고 약탈당한 통에 현재 남아있는 게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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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우로스
아르테미시온 청동상[99]
라오콘 군상[100]
초기 그리스 조각은 그리스보다 훨씬 이전부터 문명의 꽃을 피웠던 메소포타미아고대 이집트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이 초기 그리스 조각들을 '코우로스(κοῦρος)'와 '코레'라고 부른다. 코우로스는 젊은 남성들을 묘사한 조각이고 코레는 젊은 여성들을 묘사한 조각이다. 코우로스와 코레를 들여다보면 거의 이집트 조각상과 착각할 정도로 닮았는데, 뻣뻣하게 서서 정면을 바라보는 모습이고 한 발을 앞으로 뻗은 것까지 고대 이집트와 똑같다. 거의 대부분이 완전히 벌거벗은 나신상으로 코우로스의 수가 코레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다만 이집트 조각상에 비해서 훨씬 인체 비례가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게 특징이며 근육이나 얼굴의 묘사 역시 더욱 더 사실적이다. 사실성을 중시하던 고대 그리스인들의 기호가 드러나는 부분이다. 이렇게 그리스 조각은 뻣뻣하게 굳은 코우로스에서 시작해 점점 더 부드럽고 다양한 포즈를 하는 조각상들로 발전해 나갔다.

고대 그리스의 황금기인 고전기가 도래하면서 석상의 포즈와 모습이 훨씬 자연스럽게 변한다. '콘트라포스토'라고 해서 한 발에 체중을 실어 비스듬하게 서있는 자세의 석상들도 이때 처음 등장한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 자세를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또한 이전에는 신화속에 등장하는 전설적인 인물이나 단순히 의인화된 인물들을 묘사했다면 고전기 들어서는 실제 인물들을 조각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뿐만 아니라 건축 기술이 발전하며 건물들을 장식할 조각상들의 수요가 늘어났고, 이로 인해 엘긴 마블을 포함한 수많은 석상들이 이때 만들어졌다. 올림피아제우스 상이나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의 아테네 파르테노스 상도 이때 만들어진 것들이다. 그리스 조각의 기본 틀이 이때 잡혔다고 보면 된다.

헬레니즘 시대에 들어서는 훨씬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역동적인 형상의 조각상들이 만들어졌다. 기원전 4세기 경부터 헬레니즘 시대가 도래했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그리스 조각들 대부분은 이때 만들어진 것들이라 보면 된다. 그 유명한 '사모트라케의 니케' 상과 '페르가몬 제단', '라오콘 군상' 같은 명작들이 모조리 이때 만든 것들이다. 이때 문화의 발전과 폭발적인 생활권 증가로 인해서 조각품들의 수요가 늘어났고, 이로 인해서 조각들이 대량생산되면서 질이 일부 저하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봤을 때는 이때가 고대 그리스 조각의 최전성기였다. 특히 이 시절에는 사람들이 제 집을 꾸밀 조각상들을 많이 주문하며 이전보다 훨씬 형식적으로도 자유로워졌다. 옛날에는 신전에 쓸 조각상들만 만드느라 딱딱한 분위기가 강했다면 이제는 개인적 취향에 맞춘 조각들이 다수 제작된 것이다. '밀로의 비너스', 로도스의 거상, '죽어가는 갈리아'도 이때 만들어졌다.
 
 
 
 
 
 
 
 
 
 
 
 
 
 
 
 
 
 
 
 
 
 
 
 
 
 
 
 
 
 
 
 
 
 
 
 
 
 
 
 

12.3.2. 도자기[편집]

 
 
 
 
 
 
 
 
 
 
 
 
 
 
 
 
 
 
 
 
 
 
 
 
 
 
 
 
 
 
 
 
 
 
 
 
 
 
 
 
그리스인들은 도자기를 실용적인 용도로 많이 만들어썼고 신에게 제물로 바칠 정도로 도자기를 중요시했다. 워낙 많은 양의 도자기들을 만들었기에 현재까지 10만 점이 넘는 고대 그리스 도자기들이 온전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을 정도다. 실용적인 용도 외에도 의례용이나 장식용으로도 많이 썼는데, 대표적으로 고인의 무덤을 표시하는 데 비석 대신 그 위에 항아리를 올려놓아 표시하기도 했고, 아예 신에게 제물로 바치거나 신전에 봉헌하기도 했다.

그리스 도자기는 대강 모습과 용도에 따라서 4종류로 나눈다. 첫째가 음식이나 물건 저장용기로 쓰인 도자기들로, 그 유명한 '암포라'가 여기에 해당된다. 두 번째 종류는 연회나 축제 때 포도주를 물과 섞거나 나르기 위해서 쓰인 도자기로 '크라테르' 등이 있다. 세 번째는 '카일릭스'라고 해서 손에 들고 음료를 마실 수 있는 작은 잔이나 항아리 등이 여기에 속한다. 마지막 네 번째는 향유나 기름, 화장품들을 보관하던 작은 도자기류들로, 기름병인 '레키토스'나 향유병 '아리발로스' 등이 대표적이다. 참고로 이렇게 굳이 구분해놓긴 했지만 애초에 도자기라는 게 상황에 따라서 그때그때 용도가 달라졌던 것이므로 크게 중요한 분류법은 아니다.

도자기를 만들기 위해선 일단 진흙이 필요했다. 흙을 파내면 그 안에 조개 껍데기나 자갈 등 쓸데없는 이물질들이 가득한데, 일단 이 흙을 물과 체에 거르고 또 걸러서 최대한 곱게 만들어야 했다.[101] 이 작업을 하면 할수록 속의 점토가 부드러워져서 항아리의 질이 좋아졌다. 이렇게 흙을 곱게 거르고 나면 진흙을 반죽해 도기 물레 위에 올려놓고 여러 모양으로 빚었다.[102] 열심히 물레를 돌려가며 기본적인 모양을 잡았다면 이젠 유약을 바르고 장식을 넣을 차례였다. 이 유약은 칼륨, 요소, 포도주 찌꺼기, 뼈, 해초 태운 재 등으로 만들었고 구우면 붉은색이나 검은색을 냈다. 유약을 바른 도자기는 950도 정도의 낮은 온도의 가마에서 딱 한 번 구워냈고, 며칠 후 가마에서 도자기를 꺼내면 그리스식 도자기가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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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회식과 홍회식의 비교[103]
암포라의 모습[104]
아테나 여신으로부터 술을 따라마시는 헤라클레스를 묘사한 도기그릇 장식
그리스 도자기 특유의 붉은색과 검은색을 내는 방법을 자세히 설명하자면 가마의 산소 농도를 3단계에 걸쳐 조절해서 색을 냈다. 일단 도자기를 넣고 제일 처음에는 공기구를 활짝 연 채로 920~950도 정도로 온도를 유지했다. 이렇게 하면 유입된 산소가 연소해 산화철(Fe2O3)이 형성되며 유약을 바른 부분과 바르지 않은 도자기 몸체 부분이 모두 붉은색으로 변한다. 붉은색으로 변하면 공기구를 닫고 생나무를 때기 시작했는데, 이러면 산화철의 화학조성이 Fe2O3에서 Fe2O4로 바뀌면서 색이 검게 변한다. 또한 불완전연소가 일어나면서 온도가 낮아진다. 마지막 단계에서 다시 공기구를 열고 산소를 집어넣으면 유약을 바른 부분은 여전히 검은빛을 유지하지만 도자기 몸통 부분은 붉은빛으로 되돌아갔다. 고대 그리스 도공들은 이렇게 색깔을 냈다.

도자기 역시 시대별 변천을 거치며 꾸준하게 발전했다. 선기하학풍, 기하학풍, 동양화풍 도자기 등 다양한 도자기들이 많지만 우리가 흔히 보는 도자기들은 흑회식 도자기(Black-figure pottery)와 홍회식 도자기(Red-figure pottery)들이 주류다. 흑회식 도자기의 경우 기원전 7세기 그리스 고졸기 말에 처음 등장해 고전기 내내 엄청나게 만들어진 도자기였는데, 코린토스에서 처음 제작했고 이후 아테네, 스파르타 등에까지 퍼져나갔다. 붉은색 바탕에 검은색을 띠는 유약을 발라 그림을 넣는 방식이었는데 주요 특징으로는 이전보다 훨씬 생생한 인물과 동물 묘사가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마치 실루엣이나 그림자를 연상시키는 아름다움 덕에 에트루리아레반트 같은 외국 사람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흰색이나 붉은색 벽토를 넣어서 대상을 강조하기도 했다.

흑회식 도자기는 특유의 멋 덕분에 그리스 고전기 초반 내내 주류 도자기로 자리했다. 그러던 중 기원전 6세기 경에 아테네에서 엄청난 혁신이 일어나니 이게 바로 홍회식 도자기다. 흑회식 도자기는 붉은색 바탕에 검은색 유약으로 그림을 그리는 방식이었는데, 홍회식 도자기는 먼저 붉은 바탕에 그림을 그려넣은 뒤에 남은 여백을 검은색으로 칠해넣는 방식을 썼다. 그림을 봐도 알겠지만 당연히 흑회식에 비해서 훨씬 정밀한 그림을 그리는 게 가능해졌고 표정이나 해부학적 묘사도 이전보다 압도적인 수준으로 개선됐다. 도자기 속 인물들도 처음에는 딱딱한 자세로만 그려졌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극적이고 감정을 드러내는 묘사가 많아졌다고 한다. 홍회식 도자기가 엄청난 인기를 끌었지만 흑회식도 여전히 수요가 많아 기원전 300년대까지 쭉 번성했다.[105] 하지만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아테네를 점령하면서 도자기 생산이 중단됐고, 이후 아테네와 그리스가 쇠퇴하며 함께 몰락했다.
 
 
 
 
 
 
 
 
 
 
 
 
 
 
 
 
 
 
 
 
 
 
 
 
 
 
 
 
 
 
 
 
 
 
 
 
 
 
 
 
 
 
 
 
 
 
 
 
 
 
 
 
 
 
 
 
 
 
 
 
 
 
 
 
 
 
 
 
 
 
 
 
 
 
 
 
 
 
 
 
고대 그리스 미술하면 죄다 조각이나 건축, 아니면 도자기 정도만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림을 그려 남기는 회화를 더 중시했다. 탁월한 미술 작품이 있으면 온갖 글을 지어서 이를 설명하거나 예찬하는 글을 남겼고, '에크프라시스(Ekphrasis)'라고 해서 아예 그림을 설명하는 분야의 문학 형식이 따로 존재할 정도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재까지 살아남은 고대 그리스 시대의 유명한 회화들은 단 한 점도 남은 게 없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주로 나무 판자에 왁스칠을 해서 그 위에 그림을 그렸는데, 썩기 쉬운 나무다 보니 모조리 시간이 흐르며 썩어버렸기 때문. 남아있는 사료가 극히 부족하다 보니 그나마 도자기에 그려진 그림을 통해서 당시 그리스 회화를 추정할 뿐이다.[106]

그림의 주요 주제는 사람의 초상화나 풍경화였다. 그 외에도 더 많은 대상을 그렸겠지만 딱히 알려진 바가 없다. 대 플리니우스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주로 왁스로 그림을 그리거나 달걀로 만든 안료를 사용하는 '템페라' 기법을 썼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에서 가장 인기 있었던 작가는 '코스의 아펠레스'[107]였다고. 그 이전이후에도 그를 능가할 작가가 나오지 못했고 아테네테베에서도 그의 작품을 보러온다니 극찬했을 정도였으니 가히 고대 그리스의 미켈란젤로라고 불릴만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앞서 말했듯이 그의 작품들 역시 나무 판때기에 그려져 있던 탓에 현재까지 보존된 건 단 하나도 없으며 심지어 사본조차도 남은 게 없다.

그나마 그리스 회화에 가장 비슷한 종류인 무덤 벽화는 상대적으로 많이 남아 있는 편이다. 특히 이탈리아 식민도시 유적에 있는 무덤에 남은 벽화들이 많은데, 이 작품들을 보면 상당히 정교하게 그려져 있다는 걸 볼 수 있다. 고대 그리스 화가들은 기초적인 형태의 원근법을 쓸 줄 알았고 그림자나 음영, 그라데이션 등을 그림에 활용할 줄 알았다. 여담이지만 지금이야 건축물이나 석상들이 하나같이 색이 바래 허연 모습을 하고 있지만 한때는 화려하게 색이 칠해져 있었다. 석상의 경우 주로 피부는 원재료의 색을 그대로 드러냈지만 옷이나 머리카락 같은 부분들에 색을 칠하는 게 대부분이었고, 아니면 아예 피부나 눈까지 꽉꽉 채워서 색칠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는 건축물도 마찬가지여서 유명한 파르테논 신전 역시 전성기에는 붉은색, 푸른색 등으로 색이 칠해져 있었다.
 
 
 
 
 
 
 
 
 
 
 
 
 
 
 
 
 
 
 
 
 
 
 
 
 
 
 
 
 
 
 
 
 
 
 
 
 
 
 
 
 
 
 
 
 
 
 
 
 
 
 
 
 
 
 
 
 
 
 
 
 
 
 
 
 
 
 
 
 
 
 
 
 
 
 
 
 
 
 
 
고대 그리스 문학은 크게 시와 산문으로 나눈다. 시는 다시 서사시와 가사, 연극으로 나눠졌고, 또 가사를 4가지 장르로 하위분류하고 연극도 비극, 희극, 목가적인 분위기를 담은 목가극으로 분류했다. 이렇게 시는 여러 가지 장르로 세세하게 나누어져 구분된 것과 달리 산문은 워낙 형태가 다양해서 구체적으로 분류되진 않았다. 엄밀히 말하면 산문도 장르를 구분하려 시도하긴 했지만 워낙 경계가 모호해서 하지 못한 거에 더 가깝다.

그리스 문학의 끝판왕 격이자 양대 산맥은 당연히 호메로스일리아스오디세이아다. 일리아스는 트로이 전쟁 당시 두 영웅이던 헥토르아킬레우스 사이의 끝없는 갈등과 투쟁,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묘사한 대서사시고, 너무나도 유명한 오디세이아는 트로이 전쟁이 끝나고 이타카의 왕 오디세우스가 온갖 고생 끝에 이타카로 돌아가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사실 고대 그리스 시대에도 호메로스는 이미 몇백여 년 전 인물이었다. 그래서 거의 신처럼 추앙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고대 그리스 문학의 기본 틀을 모조리 이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에서 잡았고 후대 작가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 오디세이아에 등장하는 페넬로페를 이상적인 여인상으로, 영웅 아킬레우스를 완벽하고 이상적인 영웅의 상으로 여기기도 했다.

그리스 고전기 이전의 서사시 작가들 중 호메로스가 지나치게 유명해서 묻히는 감이 있지만 헤시오도스라고 또다른 서사시인이 있다. 거의 신화적인 인물로 취급받아서 존재 여부조차 논란이 있는 호메로스와는 달리 실재 여부가 확실한 인물인데, 그리스 중부 보이오티아 섬 출신이다. 이 사람의 대표작은 《일과 날 Erga kai Hemerai》및 《신통기(神統記) Theogonia 》가 널리 전한다. 호메로스로 대표되는 화려한 이오니아파와는 달리 헤시오도스로 대표되는 보이오티아파는 종교적 ·교훈적 ·실용적인 면이 두드러진다. '일과 날'은 빈곤하기 짝이 없는 고대 그리스 농부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고, 신통기는 제우스를 포함한 신들의 탄생, 천지창조에 대한 이야기를 대중과 일상생활에 엮어서 다루고 있다.[108] 위의 설명만 봐도 느낌이 오겠지만 헤시오도스는 인간적인 삶과 실생활에 연결되는 작품들을 많이 썼다. 신화적인 존재나 초월적 영웅들을 다루던 호메로스와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가사도 있었다. 이걸 'Lyric'이라고 하는데 리라와 함께 연주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앞에서 말했듯이 4개의 하위 장르로 나눠졌는데, 독특하게도 4개의 장르 중 약식 가사와 애가는 리라가 아니라 플루트로 리듬을 맞췄다. 주로 주제는 영웅들의 승리를 찬미하고 신을 찬양하고 뭐 그런 것들이었는데 이 외에도 다양한 주제를 다뤘다. 뿐만 아니라 정적을 공격하거나 사회를 신랄하게 풍자하는 용도로 쓰이기도 했다. 가사는 운율을 정확하게 맞춰서 3단으로 구성된 형식을 띠고 있었는데 상당히 복잡했다. 운율과 각운을 맞춰야 했고 사회의 다양한 주제를 다뤘다는 점에서 현대의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파로스의 아로킬로쿠스, 여류 시인 사포[109] 등이 유명한데 안타깝게도 현대까지 남아있는 가사들은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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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의 극장[110]
서사시를 제외하고 가장 유명한 게 그리스 비극이다. 그리스에서 연극이라는 개념 자체는 디오니소스 신을 기리는 축제에서 비롯되었고 아테네의 급부상과 함께 크게 발전하며 그리스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상당히 종교적, 사회적으로도 중요한 행사들 중 하나여서 부유한 시민들은 연극단을 후원할 사회적 의무가 있었으며 축제의 연극에 참석하는 건 명예로운 일로 봤다. 당시에는 수많은 연극들이 있었고 그 내용도 가지각색이어서 대부분 다 기록되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었다고 한다. 허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불타 무너지면서 거의 대부분이 소실되어 현재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알려진 것이 거의 없는 수준이다. 그나마 꼽아보자면 소포클레스, 아이스퀼로스, 에우리피데스가 이렇게 그리스 3대 비극작가라고 불리면서 가장 유명하다.

소포클레스는 수많은 작품들을 남겼지만 지금까지 전해져내려오는 건 7개 작품에 불과하다. 가장 잘 알려진 소포클레스의 대표작은 '오이디푸스 왕'. 오이디푸스 왕의 이야기만 알려져 있지만 사실 이 작품은 오이디푸스 왕과 그의 후손들의 이야기까지 담은 3부작 비극이다. 3부작이라고 해서 한꺼번에 쓴 게 아니었고 생애 전반에 걸쳐서 하나하나씩 집필했다. 3부작의 마지막 이야기인 안티고네가 오히려 소포클레스의 등단 시기에 맞춰서 가장 일찍 발표되었고, 가장 유명한 1부 '오이디푸스 왕'이 소포클레스 인생의 중반부인 기원전 429년에 쓰여졌으며 2부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소포클레스가 죽기 직전 써서 소포클레스 사후에야 상연되었다.

또다른 그리스 비극의 거장인 에우리피데스는 상대적으로 가벼운 비극들을 썼다. 소포클레스보다는 훨씬 많은 19개의 작품들이 전해져내려오고 있고 유명한 비극으로는 포이니케 여인들, 메데이아, 히폴리토스 등이 있다. 영웅들을 풍자하고 신들을 이성적으로 그려내면서 상당히 희극적인 요소들을 비극에 도입했기에 비극이라 하기에는 애매한 작품들도 많다. 일반인들이 가장 접근하기 쉬운 그리스 비극작가들 중 하나다. 마지막 작가인 아이스퀼로스의 경우 '그리스 비극의 아버지'라 불릴 정도로 비극의 기본 틀을 제시한 인물이다. 생전 90여 편이 넘는 작품들을 발표했으나 현재 남은 건 7편에 불과하고 이마저도 그의 대표작은 없다.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 햄릿 같은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 싸그리 불타버리고 간단한 단편들만 남은 셈이니 상당히 안타까운 일.

희극도 있었다. 하지만 비극에 비해서도 거의 남은 자료가 아예 없는 수준이라 별로 유명하진 않다. 그리스 희곡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게 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가 쓴 11편의 희곡들인데, 이 희곡들의 내용을 보면 정말 신랄할 정도로 사회를 풍자하고 까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작품 '새'에서는 아테네의 형식적인 민주주의를 비판하고 '구름'에서는 소크라테스를 비난하며 '리시스트라타'는 전쟁의 허구성을 힐난한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정말 깔 수 있는 거라곤 모조리 깠는데, 타고난 날카로운 입담과 재치를 적절하게 섞어가면서 해학적인 분위기마저 만들었기에 후대인들이 '그의 곁에서는 몰리에르가 둔해 보이고 셰익스피어가 광대 같아 보인다'면서 아리스토파네스를 칭송하기도 했다.

참고로 아리스토파네스 최고의 걸작은 '개구리들'인데,[111] 비극작가의 거장 아이스퀼로스와 에우리피데스가 서로가 제일 위대한 극작가라면서 상대 작품들을 깎아내리는 내용이다. 결국은 아이스퀼로스가 승리해서 디오니소스 신의 은총을 입어 아테네로 귀환하는 데 성공한다. 이 작품의 의의는 단순한 디스전이 아니라 그 속에 전쟁의 무가치함과 전쟁을 이용해 권력을 누리던 세력을 통렬하게 비판했다는 데 있다. 아테네인들도 이 희곡에 크게 공감했던지 이 작품은 발표되자마자 디오니소스 축제에서 1위를 수상했고 두 달 후에 앙코르 공연까지 열렸다. 수많은 작품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쏟아져나오던 고대 그리스에서 앙코르 공연이 열렸다는 건 정말 대단히 인기가 많았다는 뜻이다. 전쟁과 관련한 교훈을 주는 이야기여서 2004년에 각색되어 브로드웨이에서도 상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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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톤
페플로스
히마티온
클라미스
토가가 유명해서 그리스인들의 옷도 토가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토가는 로마인들이 입는 옷이고 그리스인들이 입었던 건 토가라고 부르지 않는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기본적으로 안쪽에 키톤(χιτών)이나 페플로스(πέπλος)를 입고 그 위에 히마티온(ἱμάτιον)나 클라미스(χλαμύς)를 걸쳤다. 개중에서도 그리스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옷은 키톤이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이 키톤을 입었다. 키톤은 튜닉의 일종으로 무릎이나 발목까지 내려오는 게 일반적이었다.[112] 동방의 영향을 받아 주름이 풍성한 게 특징으로, 끈이나 허리띠로 묶어 고정했다.[113]

키톤은 도리아식 키톤과 이오니아식 키톤으로 분류한다. 초기형 복식에 가까운 도리아식 키톤의 경우 직사각형 모양의 거대한 천을 몸에 둘둘 감아서 끈이나 브로치로 고정한 옷차림이다. 특징은 소매가 없고 팔이 드러난다는 것. 여성들의 경우 '아포티그마'라고 해서 폭 2m 정도의 천을 어깨부터 발목까지 쭉 두른 후 그 절반 크기 정도의 천조각을 따로 어깨에 두르고 양쪽에 핀을 꽂아 어깨부터 밖으로 케이프처럼 늘어지게 만든 복식을 하기도 했다. 도리아식 키톤 다음으로 유행한 건 이오니아식 키톤이다.[114] 이오니아식 키톤은 도리아식 키톤보다 훨씬 크기도 크고 폭도 넓었으며, 팔이 훤히 드러난 도리아식과는 달리 팔 부분에까지 천을 걸친 뒤에 그 위에 매듭을 지어 묶었다. 키톤의 길이가 사람의 키를 훌쩍 뛰어넘었기 때문에 띠로 고정할 때 일부러 끈 윗부분에 옷을 올려서 묶었는데, 이로 인해 옷이 흘러내리는 듯한 효과를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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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톤과 페플로스의 차이[115]
도리아식 키톤과 이오니아식 키톤의 차이
키톤이 남녀 상관없이 모두 입고 다녔던 보편적인 복장이었다면 '페플로스'라고 여성 전용 옷차림도 있었다. 직사각형의 천을 접어 몸에 한 번 두르고 모서리를 한쪽 어깨에 묶어 고정시킨 뒤, 나머지 어깨에도 천을 끌어올려 묶는 방법으로 입었는데, 이때문에 허리 한쪽에 탁트여서 옆트임이 있었다. 사실 그리스식 복장이 다 모양이 하늘하늘한 게 비슷해 보이기 때문에 이오니아식 키톤과 혼동하는 경우도 많은데 이오니아식 키톤은 옆트임이 없었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에 에레크테이온 여신상들이 입고 있는 옷이 바로 이 페플로스다. 여성도 활발히 운동을 해야만 했던 스파르타에서는[116] 페플로스가 유난히 옆트임이 심해서 허벅지가 그대로 드러났다.

위에 아무 것도 없이 키톤만 입는 경우 이걸 '모노키톤'이라 불렀고, 발뒤꿈치까지 오는 길이의 키톤을 '키톤 포데레스', 땅을 끌 정도로 기다란 키톤을 '키톤 시르토스' 혹은 '헬케이톤(ἑλκεχίτων)'이라 불렀다. 다만 여성들은 항상 발목 정도에만 내려오는 키톤을 입었고 남자들만이 주로 기다란 키톤을 입고 다녔다. 하지만 땅까지 질질 끌리는 키톤은 워낙 잘 더러워지고 불편했던터라 나중에는 고위 신관들이나 정치인들처럼 격식을 차려야 할 사람들만 주로 입고다녔다고 한다.

품위를 중시하던 그리스인들은 키톤 위에 망토처럼 천을 둘러서 어깨에 드레이프를 내려뜨리고 다니기도 했다. 이 겉옷을 '히마티온'이라고 부른다. 흔히 고대 그리스인하면 생각나는 빙빙 둘러싼 하얀 천이 바로 이거다.[117]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입고 있는 옷이기도 하다. 기품있어 보이는 외양에 제법 그럴싸해 보이기 때문에 후대 작가들이 예수를 묘사할 때 이 히마티온을 입고 있는 모습으로 그렸기 때문이다. 왼쪽 어깨에 걸친 뒤 오른팔을 제외한 신체를 모두 한 번 빙 두르게 걸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다른 옷들과는 달리 브로치나 핀으로 몸에 고정하지 않았고, 따라서 원한다면 얼마든지 바로바로 내려놓을 수도 있었다. 여성들도 히마티온을 입었는데 마치 숄이나 베일처럼 머리에 쓰고 다니기도 했다. 참고로 이 히마티온은 마치 후드티처럼 필요할 때 천을 머리로 끌어올려 머리를 덮을 수 있었다.

고대 그리스 옷들은 주로 실크양모, 리넨 천 등으로 짰다. 다만 햇빛이 쨍쨍한 그리스의 기후 탓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리넨 천으로 만든 옷을 입었다고 한다. 값비싸고 품질 좋은 리넨 천은 투명해서 속이 비칠 정도였는데, 나체를 금기시하지 않았던 그리스인들은 신경쓰지 않았다. 보통 여성들이 직물을 짜는 경우가 많았는데 상당히 힘든 작업이었고, 그래서 좋은 직물을 짜는 여성은 능력있다고 인정받았다. 이렇게 힘들게 천을 만들어놨으니 한번 천을 짜면 정말 웬만해선 천을 자르지 않았다. 위의 그림들만 봐도 대부분이 그냥 직사각형의 원단 그대로 옷을 만들어입었다는 걸 볼 수 있다. 바느질도 거의 하지 않았고 띠나 줄로 묶어서 풍성하게 드레이프를 만들어 입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흰색 옷을 입고 다녔지만 부유층은 부를 과시하기 위해 초록색, 갈색, 회색 등 다양한 색으로 옷을 지어입었다. 다만 자주색의 경우 염료가 워낙 비싸서 함부로 못입었고[118] 최고 권력층만 입고 다닐 수 있었다.

남성의 헤어스타일은 윗머리와 앞머리를 조금 남기고 옆, 뒷머리를 삭발한 투블럭 비스무리한 헤어스타일을 했다. 그리스 사람들은 장발을 이방인의 헤어스타일로 여겼으며 짧게 깎고 다녔는데, 이는 로마시대십자군까지 유행하게 된다.

머리는 짧게 잘랐던 것에 비해 남자는 수염은 반드시 기르고 다녔다. 그 당시 남자가 수염을 깎으면 어린애 같다는 풍조가 강했던데다 면도 도구도 없어 기르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면도가 발달한 로마 제국과는 정 반대다.

여성들은 올림머리나 똥머리를 자주 하였으며 어떨때는 풀고 다녔다. 또한 남녀 상관없이 그리스인들은 몸에 제모를 하였으며 귀걸이를 하고 다녔다.

고대 그리스의 남성과 여성들은 음모제모하고 다녔으며 특히 고대 그리스인 남성은 남색 문화 때문에 국부의 털을 거의 밀고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이유는 국부에 난 음모를 짐승처럼 여겼기 때문. 그 덕분에 성에 보수적인 현대 그리스에서도 남녀 상관없이 브라질리언 왁싱을 하는 경우가 매우 많다.

그리스 전사들은 전투 시 로리카 비스무리한 흉갑을 입었다. 전투시에는 빨간색이나 노란색 계통의 옷을 흉갑 안에 입었으며 강철치마 비스무리한 것을 입고 모히칸 같은 벼슬장식이 달린 투구를 썼다.

고대 그리스 전사들은 문신을 했는데, 보통은 피부에 칼로 새긴 다음 잉크를 넣어서 문신을 했지만 스컬리핑 같은 반흔문신 또한 즐겨했다.[119] 주로 그리스인들은 기하학적인 문양이나 그리스 문자로 된 글자문신을 주로 하였으며, 그리스 신화에서도 포세이돈이 문신을 한것을 보아 그리스인들은 문신을 전사의 상징으로 보았다고 한다. 특히 스파르타들은 전투에 나가기 전 시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피부를 악어가죽 처럼 우둘투둘한 흉터를 몸에 새겼다고한다. 에릭 킬몽거?

또한 그리스인들은 전투에 나가기 전 시기를 올리고 각오를 다지기 위해 눈가나 얼굴에 검은칠을 했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야구미식축구에서 보이는 아이블랙의 시초인 듯 하다.
 
 
 
 
 
 
 
 
 
 
 
 
 
 
 
 
 
 
 
 
 
 
 
 
 
 
 
 
 
 
 
 
 
 
 
 
 
 
 
 

12.6. 식문화[편집]

 
 
 
 
 
 
 
 
 
 
 
 
 
 
 
 
 
 
 
 
 
 
 
 
 
 
 
 
 
 
 
 
 
 
 
 
 
 
 
 
고대 그리스 지방이 산지가 많고 척박한 탓에 고대 그리스인들의 식단은 좋게 말하면 검소한 편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초라했다. 지중해성 기후에서 잘 자라는 , 올리브, 포도가 핵심이었고 그 외에 지력이 좋지 않은 곳에서도 잘 자라는 이나 다른 곡물들을 조금씩 재배해서 먹었다고 한다.

그리스인들은 하루에 세 끼에서 네 끼 정도를 먹었다. 아침식사는 '아크라티스마(ἀκρατισμός)'라고 불렀는데, 보통 포도주에 담근 보리빵에 무화과올리브를 곁들여서 가볍게 먹었다. 빵과 같이 초기적인 형태의 팬케이크 '타게니아스(τηγανίτης)'를 먹는 경우도 있었다.[120] 이 타게니아스는 흰 밀가루, 올리브유, , 굳힌 양젖을 반죽해서 만들었고 나름 맛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아침으로 즐겨먹었다. 부유한 사람들은 팬케이크 위에 꿀이나 참깨, 치즈를 얹어먹었다.

아침을 먹고나면 '아리스톤(ἄριστον)'이라고 이른 점심을 먹었다. 늦은 오후에 가벼운 오찬 '헤페리스마(ἑσπέρισμα)'를 드는 경우도 있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점심보다 해질녁에 먹는 저녁을 가장 중요시했다. 이걸 '데이프논(δεῖπνον)'이라고 했는데 시간이 없을 때는 점심을 아예 생략하고 저녁에 한꺼번에 몰아서 밥을 먹는 일도 많았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점심은 거르는 경우가 많았지만 저녁은 단순한 음식 섭취가 목적이 아니라 사교의 장의 역할도 함께 겸하고 있었던 터라 빠지는 일이 드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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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인들의 일반적인 식단[121]

고대 그리스인들의 주식은 곡물, 개중에서도 보리였다. 밀의 경우 수확한 밀알들을 물에 불려 부드럽게 만들고 죽으로 만들거나 가루내어 반죽한 후 빵을 구워서 먹었다. 당시에도 이미 효모가 있었던 터라 부드러운 빵을 먹을 수 있었다. 주로 포도주 찌꺼기에서 걷어낸 효모를 집안 한쪽 구석에 있는 화로에 반죽과 함께 넣어서 빵을 구워냈다. 누룩을 넣은 빵도 비싸긴 했지만 시장에서 파는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효모나 누룩을 넣어 만든 흰 빵은 부유층이나 먹을 수 있는 사치품이었고 일반인들은 그냥 딱딱한 검은 빵을 먹었다.

보리는 밀보다 재배하기 쉬워서 주로 평민들이 많이 재배해서 먹었다. 하지만 보리알들이 거친 터라 밀보다 빵으로 구워내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그나마 거친 보릿가루를 내어 빵을 만들었는데 이렇게 만들어진 보리빵은 밀빵보다 훨씬 거칠고 투박했다. 영양은 괜찮았지만 먹기에는 영 그닥이었다고. 그래서 아예 가루를 내지 않고 보리알들을 통째로 구워서 먹는 사람들도 많았다. 형편이 되는 사람들은 보리빵 위에 밀빵처럼 치즈나 꿀을 올려먹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구할 형편이 안되는 빈민들은 구하기 쉬운 엠머밀이나 기장 등 훨씬 값싼 곡물들로 빵을 만들었다. 콩을 넣어 먹기도 했는데 렌즈콩이나 병아리콩을 가장 많이 먹었다.

과일이나 채소 역시 즐겨먹는 식재료들 중 하나였다. 가장 좋아하던 과일은 무화과건포도, 석류였다. 갓 딴 과일들은 귀해서 식후에 디저트로 먹는 게 일반적이었다. 야채의 경우 삶은 양파, 렌틸콩, 당근, 허브 등을 먹었는데, 농촌이 아닌 도시에서는 싱싱한 야채를 바로 먹는 게 쉽지 않아서 대부분의 도시민들은 말린 야채를 먹었다. 보통 야채를 찌거나 물에 삶아서 수프를 만들어 먹는 게 대중적인 조리법이었다. 찐 야채를 생선 소스에 찍어먹기도 했다. 하지만 가난해서 야채도 생선 소스도 살 돈이 없는 사람들은 참나무에서 딴 도토리나 먹는 게 고작이었다고 한다.

그리스인들도 역시 고기를 좋아했지만 육류가 아무 때나 먹을 만큼 흔한 식품은 아니었다. 주로 이나 오리, 비둘기돼지, , 염소, 가 주요 육류였으나 주로 먹는 건 닭이나 오리 같은 조류나 기껏 해봐야 토끼 정도에 그쳤다. 돼지나 양, 염소, 소는 함부로 잡을 만큼 넘쳐나는 가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 시절에 새끼 돼지 한 마리는 공무원 월급 3일 치인 3드라크마에 달했다. 대신 새 종류는 정말 보이는 날개 달린 것들은 다 먹었다고 해도 좋았을 정도로 다 먹어치웠다. 특히 닭과 오리를 많이 키워 닭고기와 오리고기를 고기로 많이 먹었으며 야생 조류도 많이 먹었는데 , 청둥오리, 종달새, 메추라기, 뻐꾸기는 물론이고 심지어 관상용으로 잡아놓은 저어새도 연회 특별 요리로 대접하기 위해 잡아버리는 경우가 흔했다고 한다.

해안가가 많은 그리스 특성상 해산물은 좋은 영양 공급원이었다. 오징어문어, 조개는 흔해서 넘쳐날 정도였고 가다랑어, 참치 같은 큼직한 생선들도 한가득 잡혀왔다. 내륙에 사는 도시민들의 경우 생선이 그리스의 뜨거운 태양빛에 상하지 않도록 미리 염장해서 만든 정어리멸치를 먹었다. 아테네인들은 장어와 붕장어, 농어를 엄청난 진미로 쳐서 고급 요리라고 여겼다.[122] 또한 현대에서 나름 고급 식품 취급을 받는 멍게 또한 많이 먹었다. 그 외에 민물생선들은 메기가 대중적이었고 바다 생선들은 가오리황다랑어, 황새치철갑상어가 평이 좋았고 보통 소금에 절여 먹었다.

유제품과 계란도 좋아했다. 계란은 반숙이나 완숙으로 만들어서 전채나 디저트로 먹었다. 다만 버터우유의 경우 알고는 있었지만 딱히 먹지는 않았다. 우유는 일부 산악인들이 산양의 젖을 짜먹는 정도에 그쳤고 버터는 그 존재를 알고는 있었다만 느끼하다고 해서 트라키아인들의 습성 정도로만 여겼다. 사실 그리스인들은 식용 기름으로 버터보다 올리브유를 더 선호했고 이런 그리스인들의 식성은 수천년을 지난 오늘날까지도 마찬가지이다. 대신 치즈요구르트는 잘 먹어서 염소나 암양의 젖으로 엄청나게 만들어 먹었다. 치즈를 단단하게 만들어서 매장에서 뭉텅이 채로 팔았는데, 보통 그냥 생으로 먹거나 꿀이나 야채를 얹어서 먹었다. 생선에 녹인 치즈를 올려서 먹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생선의 비린내와 치즈의 향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호불호가 크게 갈렸다는 말이 있다.

음료수의 경우 아무 데서나 구할 수 있는 물이 가장 흔했다. 우물은 많았지만 샘물을 더 선호했다. '나무와 덤불들을 자라게 하는 생명력을 가진 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 우유를 생으로 벌컥벌컥 마시는 건 야만적인 거라 생각해서 잘 먹지 않았으나 포도주는 아예 신의 선물이라고 해서 많이도 마셔댔다. 타소스나 레스보스, 키오스 섬에서 만든 포도주를 최고급으로 쳤고 종류는 백포도주에서 적포도주까지 다양했다. 꿀이나 백리향, 허브를 첨가해서 향을 내기도 했다. 참고로 고대 그리스에서는 포도주에 무조건 물을 타서 마셨다. 포도주에 물을 타지 않고 생으로 들이키는 짓은 광기를 부른다고 생각해서 야만스럽다고 봤고[123] 교양인이라면 물을 타서 먹는 게 당연했다.

스파르타에서 정말 끔찍할 정도로 맛이 없다고 유명한 게 그 검은 죽이었다. 가히 세계 최초의 짬밥이라고 할 만하다. 고전 그리스어로는 '멜라스 조모스(μέλας ζωμός )'라고 불렀고 돼지 선지와 식초, 소금, 그리고 돼지 고기 극히 조금을 넣어서 만들었다. 재료만 봐도 느낌이 오겠지만 정말 먹기 힘들 정도로 맛이 없었다. 검소한 식단을 고집하던 같은 그리스인들조차도 이 스파르타식 검은 죽은 못먹겠다고 혀를 내두를 정도였으니.... 하지만 스파르타에서는 이 죽마저 부족해서 젊은이들에게는 고기를 남겨주고 노인들은 국물만 겨우 먹었다는 썰이 있다. 참고로 스파르타에서는 이 죽 말고는 다른 요리를 하는 게 금지되었다. 는 설도 있으나 스파르타의 시민들은 매달 자신의 식사조 겸 전투조한테 보리 73kg, 포도주 35L, 치즈 3kg에 무화과 1.5kg을 납부해야 했다는 것으로 보아선 실제로는 다른 동시대 그리스인들처럼 보리빵에 포도주와 치즈, 무화과를 곁들여 먹는날이 더 많았을 수도 있다.

음식 예절도 있었다. 남존여비 사상이 있던 고대 그리스였기에 보통 남녀가 따로 식기를 썼는데, 집이 작은 경우 남자가 먼저 숟가락을 들고 그 다음에야 여자가 먹었다. 보통은 의자에 바르게 앉아서 식사를 했다.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벤치에 옆으로 길게 누워서 먹는 건 연회에서나 하는 자세였다. 테이블에서는 고기를 자르는 거 외에는 칼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고 포크는 없었다. 수프와 국을 떠먹는 데 숟가락을 썼지만 그걸 제외하면 모든 음식들을 손으로 집어먹었다.

고대 그리스 남성들은 '쉼포시온(συμπόσιον)'이라고 먹고 마시면서 노는 사교 모임이 있었다. , 을 얹은 팬케이크를 안주삼아 옆사람과 토론하면서 포도주를 들이마시는 게 쉼포시온이었는데, '향연' 혹은 '연회'로 번역된다. 부유한 사람들은 많은 음식을 차리고 무용수나 곡예사, 음악가를 불러서 먹고 놀며 호화로운 연회를 즐겼다. 쉼포시온에서는 참석자들 중 하나를 '만찬의 왕'으로 뽑아서 얼마나 포도주에 물을 많이 탈지 정하도록 했다고. 이후 술의 신 디오니소스에게 감사 인사를 올리고 나면 취할 때까지 흥청망청 노는 일의 연속이었다. 다만 이 쉼포시온은 엄격히 남성 한정의 유흥이었다. 여자는 창녀가 아니라면 감히 쉼포시온 근처에 발을 들여놓을 수조차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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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들은 역사상 최초로 음악을 수학적으로 연구, 분석하고 정교한 음악 이론을 정립한 민족이다. 고대 그리스는 음악을 굉장히 중요시하는 문화권에 속했다. 교양인의 필수 소양들 중에는 '뮤지케'라고 해서 음악이 반드시 포함되었고 음악을 모르는 인간은 야만인 바르바로이 취급을 받았다. 결혼식이나 장례식 등 가정대소사는 물론이고 당시 시민이라면 반드시 참여하는 게 당연할 정도였던 연극에서도 음악을 주로 사용했으니 음악과 친숙하지 않은 게 더 익숙할 정도였다. 철학자 피타고라스는 음악 속에 우주의 법칙이 내재되어 있다고 믿었고[124] 아리스토제누스는 그의 영향을 받아 음악을 수학적인 음률로 분류하려 시도했다. '음악'을 의미하는 영단어 'music'이 고전 그리스어 'musike'에서 유래했을 정도로 고대 그리스 음악이 서양 음악에 끼친 영향은 꽤 크다.

고대 그리스 세계 최고의 음악가오르페우스였다. 신화에 등장할 정도로 전설적인 인물이기에 실존 여부는 불분명하지만 확실한 것은 고대 그리스인들 대다수가 그를 최고로 꼽았다는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오르페우스의 음악은 무생물들을 매혹할 수 있을만큼 아름다웠다고 한다. 심지어 아름다운 노래로 뱃사람을 홀리는 괴물 세이렌보다도 더 아름다운 노래를 부를 수 있었기에 아르고 호의 원정대가 사이렌 곁을 지나는 동안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사이렌에게서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는 썰도 있다.[125] 다만 사별한 아내 에우리디케를 저승세계까지 가서 겨우겨우 되살려올 했지만 결국 한순간의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뒤돌아보는 바람에 아내를 영원히 잃었다는 비극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주로 술자리에서 타던 음악은 '스콜리온'이라고 해서 따로 있었다. 연회에 초대받은 손님들이 리라 선율에 맞춰서 한사람씩 돌아가며 운율을 맞춰 노래를 부르는 게 스콜리온인데, 동양식으로 보면 시를 지어부르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술잔을 돌려가며 마시면서 스콜리온을 부르는 게 일반적이었고 주로 주제는 집주인을 칭찬하거나 신과 영웅들의 영광을 찬양하는 게 일반적이었다고. 당시 그리스 연회에서는 연회 시작 전에 '리베이션'이라고 술을 따라 먼저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 의식을 할 때도 '스폰데이온'이라고 따로 노래를 부르곤 했다.

단순히 연회뿐만 아니라 제사나 예언을 할 때도 음악이 사용되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델포이 신탁 역시 자세히 보면 운율을 갖춘 노래에 가깝다. 그리스인들은 무아지경에 사제가 노래를 내뱉거나 하는 것들이 모두 신의 뜻이라고 믿었다. 노래와 예언을 거의 동일시했던 것. 노래를 부르면 분위기를 고조하는 효과가 있었을테니 보기에도 더 그럴듯했을 것이다. 또한 전쟁을 벌일 때도 음악을 썼다. 사실 트럼펫을 마구 불면서 부대의 진행방향을 알리거나 사기를 고조시키는 것에 불과했기에 음악이라고 하기에는 뭐하지만..... 해군의 경우 모든 노잡이들이 한 번에 리듬을 맞추어 노를 젓는 게 필수적인데, 시끄러운 해상에서 모든 노잡이들이 잘 박자를 맞출 수 있도록 거대한 북이나 드럼을 쓰는 게 보편적이었다.

그리스 시대의 노래는 많은 수가 남아있지 않으나 굳이 정리해보자면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첫째가 신들에게 바치는 찬송가(Hymn)다. 이 쪽이 가장 수도 많고 남아있는 사료도 많다. 둘째는 '파이안'이라고 추수감사를 하거나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 부르는 노래였다. 주로 찬미하는 대상은 태양신 아폴론이나 지혜의 여신 아테나였다. 셋째로 신전으로 제물을 바치기 위해 행진하는 중에 부르는 노래도 있었다. 이걸 '프로소디온'이라 부른다. 마지막 '디티람스'의 경우 디오니소스 제전에 부르는 축제용 음악이었고, 남성이나 소년들로 구성된 합창단들이 불렀고 관악기 아올로스로 리듬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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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리라, 바비톤, 하프의 모습
아올로스를 부는 아테나 여신
고대 그리스에서 가장 널리 쓰이던 악기는 리라다. 신화에 의하면 헤르메스아폴론 소유의 소 500마리를 훔치고 이를 배상하기 위해 직접 만든 악기라는 내용이 있는데, 사실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고대 그리스인들은 리라가 신의 선물이라고 부를 정도로 이 리라를 사랑했다. 거북이 등껍질로 만든 프레임에 보통 7개의 현을 붙여 손에 들고 연주하는 악기였다. 아폴론에게 봉헌된 악기였기에 주로 아폴론 제전이나 축제에 가장 많이 썼고 아니면 독백에 운율을 넣기 위해 쓰기도 했다. 현대의 기타 정도로 생각하면 될 듯하다. 당시 귀족 사회에서는 필수소양이나 다름없는 악기였다.

그리스 현악기하면 리라만 지나치게 유명해서 그렇지 다른 악기들도 존재했다. 전문 악사들이 주로 공연할 때 애용하던 현악기 '시타라'가 있는데 이건 리라의 개량 버전이라서 더 다양한 음을 낼 수 있었다. 또한 시타라를 더 크고 베이스음이 많이 나게 만든 것도 있는데 이걸 '바비톤'이라고 한다. 신화의 그림 속 사티로스들이 악기를 들고 다니는 게 바로 이 바비톤이다. 여성 철학자로 유명한 '사포'가 좋아했던 악기기도 하다. 하프도 존재했다. 따지자면 그리스에서 발명된 건 아니고 고대 메소포타미아이집트에서부터 쓰였던 엄청나게 역사가 오래된 악기지만 특유의 몽환적인 분위기로 많이 사랑받았다. 당시의 하프는 현대처럼 생긴 게 아니라 에 더 비슷하게 생겼다고 한다.

관악기를 살펴보자면 '아울로스(Aulos)'가 대중적이었다. 이것도 리라처럼 신이 만든 악기다. 전설에 따르면 페르세우스메두사를 죽이자 아테나 여신이 이를 기뻐하며 관악기 아울로스를 만들어 불고 다녔는데, 여신이 관악기를 불고 있는 제 모습을 보자 불 때마다 볼이 불룩해지는 걸 보고 흉측하다며 버렸다는 말이 있다. 이후 사티로스가 아테나 여신이 버린 아울로스를 주워서 세상에 전파했다는 게 전설의 내용이다. 아울로스는 2개의 리드를 가진 관악기로 갈대 줄기 2개를 서로 이어놓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소리는 대충 낮은 클라리넷 같은 소리를 냈다고.

리라와 아울로스 외에 주요 악기들에는 관들을 이어만든 팬플루트가 있다. 그리스어로는 '시링크스(συριγξ)'라 불렀다. 그 외에도 초기적인 형태의 유압 오르간을 만들어 썼다는 기록도 있으며 '살핑크스'라고 군사용으로 사용하기 위한 일종의 트럼펫도 존재했다. 마우스피스는 뼈로 만들었다고 한다. 타악기도 양은 적지만 분명히 있긴 했다. '팀파눔'이라고 탬버린 비슷하게 생긴 타악기를 즐겼고 '크로탈룸'이라는 이름의 캐스터네츠도 가지고 있었다. '쿠두니아'라고 구리로 만든 작은 종을 사용하는 경우도 많았다. 쿠두니아의 모습은 마치 우리나라 구세군에서 쓰는 종 같은 모양이었다.
 
 
 
 
 
 
 
 
 
 
 
 
 
 
 
 
 
 
 
 
 
 
 
 
 
 
 
 
 
 
 
 
 
 
 
 
 
 
 
 

12.8. 과학기술[편집]

 
 
 
 
 
 
 
 
 
 
 
 
 
 
 
 
 
 
 
 
 
 
 
 
 
 
 
 
 
 
 
 
 
 
 
 
 
 
 
 
세계를 합리적인 이론으로 이해하려 시도했던 고대 그리스였던만큼 과학기술 면에서도 큰 발전을 이룩했다. 가장 대표적인 분야가 천문학이다. 천문학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초기 과학자들 중에 반드시 그리스 과학자가 껴 있는 걸 볼 수 있을 정도로 고대 그리스에서는 천문학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하다 못해 별자리나 황도 12궁의 이름들도 살펴보면 죄다 그리스 신화에서 이름을 따온 것들이다. 그리스인들이 천문학을 중시했다는 증거는 문학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그리스 문학의 양대산맥인 호메로스일리아스오디세이아에도 목동자리, 히아데스 성단, 오리온성운, 플레이아데스 성단, 시리우스, 큰곰자리 등 다양한 천체들이 등장한다.

초기 그리스 천문학에 대해선 알려진 게 많지 않다. 그나마 기원전 500년대에 아낙시만데르가 원통형의 지구가 불의 고리에 둘러싸여 있다는 최초의 우주관을 제시했고, 피타고라스학파가 달, 지구, 행성들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불덩어리를 중심으로 공전한다는 우주관을 내세웠다. 당시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미 행성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고[126] 심지어 지구가 둥글다는 것 역시 어느 정도 느끼고 있었다고 한다. 당대에 지어진 시 구절을 보면 지구는 둥글고 축을 중심으로 하루에 한 번 회전하며, 지구에 세 개의 기후대가 있고 태양이 마법적인 힘으로 행성과 지구를 붙잡고 있다는 내용이 있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육안으로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 이렇게 딱 5개의 태양계 행성들을 관찰할 수 있다. 그리스인들은 얘네를 다른 별들과 구별해 각각 헤르메스, 아프로디테, 아레스, 제우스, 크로노스의 이름을 붙였고, 나중에 태양을 추가해서 총 7개의 기본 천체를 만들었다. 개중에서 지구와 가까운 금성의 관측이 상당히 어려웠는데, 그래서 극초반에는 샛별개밥바라기가 다른 별인줄 착각하기도 했다. 허나 피타고라스가 새벽에 뜨는 샛별과 저녁에 뜨는 개밥바라기가 같은 금성임을 밝혀내면서 나중에는 같은 별이라고 인정한다.

플라톤은 저서 티마이오스와 국가론에서 나름 독창적인 우주관을 제시했다. 모든 걸 두 개로 나누는 걸 좋아하던 플라톤답게 우주론 역시 2개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보다 아래에 있는 지구를 포함한 세계는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달보다 위에 있는 천체들은 에테르로 구성되어 하늘을 공전한다고 믿었다. 특이하게도 7개의 행성들은 각각의 궤도에서 공전하는 대신에 나머지 별들은 죄다 천구에 박혀서 고정되어 있다고 믿었는데, 이 천구 자체가 회전하면서 별들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었다. 플라톤은 당시 천문학자들이 풀지 못하던 별들의 운동을 이 천구 모형을 통해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기원전 4세기라는 걸 감안하면 꽤나 참신한 이론이었다.

이후 세계 최초로 행성의 운동을 수학적으로 설명하려 시도한 에우독소스의 등장으로 고대 그리스 천문학은 큰 전환점을 맞았다. 에우독소스는 각 행성들에 동심 궤도를 부여해 천체의 운동을 설명했고, 구체의 구를 기울이고 각각의 공전 주기를 따로 지정해서 체계적인 행성 운동표를 만들었다. 에우독소스 역시 플라톤의 영향을 받았던지 운동하는 천구에 박힌 별들의 개념을 그대로 가져와서 제 우주관에 써먹었다. 이후 기원전 4세기에 칼리푸스가 에우독소스의 우주관에 7개의 구체를 더 추가했다.

다만 에우독소스의 천문관에도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에우독소스의 우주론에 의하면 천체들은 모조리 지구를 중심으로한 동심 구형 궤도를 돌고 있는데, 이 논리대로라면 행성들의 밝기가 변한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게 불가능했다. 게다가 행성들의 속도 역시 주기적으로 변화를 거듭했고 지구에서 멀어지고 가까워지는 등 에우독소스의 우주론으로는 도저히 설명하는 게 불가능한 사실들이 많았던 것이다. 이때 나타난 게 아폴로니우스다. 아폴로니우스는 '주전원'과 '대원'의 개념을 도입했는데, 주전원이란 행성이 지구 주위를 공전하는 동시에 또다른 작은 공전 궤도를 따로 독자적으로 공전하고 있다는 개념이었고 대원은 지구가 중심 공전 궤도의 중심에서 약간 벗어나 있다는 개념이었다. 둘다 굉장히 복잡한 개념이었고 사실상 천동설에 관측 기록을 끼워맞추려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등장한 것이었다.

당시 고대 그리스의 천문기술은 놀라운 수준이었다. 기원전 2세기 경 히파르코스[128]는 동시대 바빌론의 천문학자들보다 더 정확하게 별들의 운동을 예측할 수 있었고 태양의 속도 변화와 계절들의 길이 차이를 설명할 수 있는 천문관을 확립했으며 후대의 것보다 더 정확한[129] 세계 최초의 별자리 지도를 작성하였다. 달의 경우에는 대원과 주전원 논리를 도입해서 운동과 공전 주기를 설명했다. 히파르코스의 최대 업적은 별의 등급을 처음으로 확립했다는 것. 여담으로 본인은 의도치 않았겠지만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후손들이 머리를 싸매게 만든 주범이기도 한데, 이때 가장 밝은 별을 1등급, 가장 어두운 별을 6등급으로 설정하며 1등급마다 차이가 2.5배 정도라는 애매한 숫자로 잡아버렸고 이게 2,000년 동안 그대로 유지되면서 계산이 골치아파졌기 때문이다. 어쨌든 히파르코스는 이 외에도 별의 연주시차를 발견했고 수많은 별들의 운동을 기록하며 크나큰 업적을 남겼다. 워낙 업적이 대단한지라 프톨레마이오스 이전 최고의 그리스 천문학자라고 불리기도 한다.

기원전 1세기 경에는 고대 천문학계의 끝판왕인 프톨레마이오스가 등장했다.[130] 고대 천문학의 경전이나 다름없는 책 알마게스트를 저술했고, 프톨레마이오스가 남긴 천문학적 유산은 1400년대 코페르니쿠스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약 1,400년에 걸쳐서 고대~중세 유럽과 아라비아 천문학의 핵심으로 남았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천동설을 이전보다 훨씬 세련되고 한층 체계화시켰는데, 그는 하늘이 지구를 중심으로 , 수성, 금성, 태양, 화성, 목성, 토성, 그리고 저 천구에 박혀있는 별들 순으로 공전한다고 믿었다. 별들이 박혀있는 천구 바깥의 영역은 소위 '에테르의 영역'이라고 부르며 그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신의 영역이라고 말했다. 행성의 움직임의 경우 주전원과 대원, 평등점 등 엄청나게 복잡한 개념들을 모조리 총동원해서 이를 설명했는데, 이는 나중에 갈릴레이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별들의 움직임을 훨씬 간단하고 정확하게 설명하면서 깨지고야 만다.[131]

수학도 발전했다. 사실 당시 천문학은 수학의 한 갈래였는데, 고대 그리스 수학 역시 워낙 그 성취가 뛰어나서 나중에 세계 수학의 근본으로 굳건히 자리매김한다. 수학을 의미하는 영단어 'math'가 '지시하다'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마테마(μάθημα)'에서 왔다. 가장 유명한 수학자 피타고라스는 아예 수를 세계의 근원으로 보고 세상만물을 수로 설명하려 시도했고 유클리드기하학의 기초를 세웠다. 그 외에도 아르키메데스의 경우 '무한히 작게 쪼개어 수렴하는' 개념, 즉 기초적인 미분적분의 개념을 이해하고 있었다. 아르키메데스의 업적은 여기에 그치지 않아서 소거법을 사용해 파이의 값을 근사했고 포물선의 구적분법을 통하여 무한기하급수까지 뻗어나가기도 했다. 아폴로니우스는 원뿔곡선을 연구해 원뿔곡선들을 타원, 포물선, 쌍곡선으로 나누어 분류했다.

아르키메데스와 동시대인인 에라토스테네스는 위대한 수학자이자 천문학자로 알려져 있지만 당대에는 문학가로 더 유명했으며 과학적 지리학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현대 의사들이 의대 졸업식에서 필수적으로 하는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주인공 히포크라테스가 바로 고대 그리스 사람이다. 고대 그리스 의술은 상당히 뛰어난 수준이었는데, 병과 질환의 원인을 단순한 미신에 돌리지 않고 과학적인 데에서 탐구했다. 극초반기에는 그리스인들 역시 병에 걸리면 단순히 신이 노해서 생긴 일이라고 믿었지만 시간이 흐르고 지식이 쌓이면서 몸에 이상이 생기는 과학적인 이유를 찾아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역사에 기록된 그리스 최초의 의사는 아스클레피오스다. 워낙에 전설적인 인물이라 의술의 신이라 추앙받을 정도로 대단한 사람인데,[132] 그리스인들은 이 아스클레피오스가 태양신 아폴론의 아들이라고 믿었다. 아스클레피오스의 치료법은 상당히 희한했다. 병에 걸린 사람이 아스클레피온(Ἀσκληπιεῖα)이라 부르는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으로 가면 신관들이 엔코이메시스(ἐγκοίμησις)라고 하는 수면 상태를 유도해서 환자를 재웠다. 그리고 이 상태에서 증기나 약초, 향유 등을 이용해서 환자를 치료했다. 신전의 지하실에는 깨끗한 지하수 샘물이 흘렀는데, 그리스인들은 이 샘물에 신성한 기운이 돈다고 믿어서 매일마다 이 물을 길어 환자에게 떠주었다.[133] 그 외에도 진흙으로 목욕을 하거나 캐모마일을 우려 따뜻한 차를 마시기도 했다. 신전 유적에서 복부의 농양을 제거하거나 기본적인 외과 수술에 대한 내용이 적혀있는 석판이 발견된 적도 있다.[134]

당시 고대 그리스인들은 4체액설을 주장했다. 사람의 몸은 기본적으로 혈액, 점액, 황담즙, 흑담즙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얘네들이 균형을 이루고 있으면 건강하지만 한쪽이 넘치거나 모자라면 병에 걸린다고 생각했다. 혈액은 심장, 점액은 , 황담즙은 담낭, 흑담즙은 지라에서 만들어진다고 여겼다. 참고로 그리스인들은 이 4개의 체액들을 각각 계절과 원소에 대응하기도 했다. 혈액은 공기의 성질을 가졌고 혈액이 많은 사람은 우호적이고 사교성이 좋다고 생각했다. 혈액이 적당히 많은 사람들은 얼굴에는 장밋빛이 돌고 혈색이 좋았다. 점액은 겨울의 성질을 가졌다. 점액이 많으면 기운이 없고 건망증이 있으며 흰머리가 많다고 생각했다.[135]

황담즙은 여름의 성질을 가졌다. 황담즙이 많은 사람들은 성질이 괄괄하며 대담하고 말그대로 불같은 기질이 있다고 믿었다. 황담즙이 많으면 피부가 노래진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마지막 흑담즙의 경우 가을의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흑담즙이 많으면 게으르고 병이 많으며 병약하다고 생각했다. 또한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이 특징이라고 믿었다. 이렇게 인체를 4개의 구성요소들로 나누어서 설명하려는 시도는 저멀리 이슬람 의학과 중근세 서양 의학까지 쭉 지속되었는데 안타깝게도 과학적인 근거는 거의 없었다. 이후 근현대 의학이 발달하고 인체의 구성에 대한 정확한 조사가 이루어지면서 체액설 자체는 역사속으로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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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를 치료하는 의사의 모습[136]

어쨌든 이 체액설을 가지고 그리스 의학의 토대를 확립한 이가 히포크라테스다. 그는 신이나 악마가 질병을 내리는 게 아니라 사람 주위의 '나쁜 환경'이 병을 유발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지나치게 습하거나 건조하거나, 아니면 체액 간의 균형이 깨지면 병이 생긴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 의사들은 환자들을 치료할 때 '체액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예를 들어 불의 기운이 강한 황담즙이 많은 사람에게는 추운 곳에서 지낼 것과 냉기가 많은 약초를 처방하고, 반대로 물의 기운이 강한 점액이 지나친 사람에게는 더운 물에서 목욕하거나 따뜻하게 지낼 것을 권유하는 식이었다.

해부학분류학도 고대 그리스에서 처음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특히 생물들을 기준에 맞추어 분류하는 걸 굉장히 좋아해 540여 종에 달하는 동물들을 처음으로 분류해 기록으로 남겼고 개중 최소 50여 종이 넘는 동물들을 해부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적 후계자들 중 하나인 테오스프라스투스는 '식물의 역사'라고 해서 식물들에 관한 책을 저술했고, 이 책은 중세 유럽에까지 가장 중요한 식물학 관련 저서로 자리한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테오스프라스투스의 최대 업적은 생물들을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그 공통분모들을 찾으려 시도했다는 것. 이러한 탐구정신은 훗날 과학의 기초가 된다.

'해부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헤로필루스도 고대 그리스 사람이었다. 헤로필루스는 뇌가 정신에 관여한다는 사실을 밝혀냈고 신경이 근육과 운동을 통제한다는 것 역시 알아냈다. 뿐만 아니라 돼지의 정맥과 동맥을 비명소리가 멈출 때까지 계속 하나씩 절단하는 다소 기괴한 방법을 통해서 정맥동맥의 작동원리를 밝혀냈다는 업적을 남겼다. 그와 동시대 인물인 에라시스트라투스는 정맥과 신경의 배치를 조사해 온몸에 그물처럼 퍼져 있는 정맥과 신경의 대략적인 지도를 세계 최초로 제작하기도 했다. 이들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허락을 받아서 체계적으로 시체를 해부했다.

후일 로마 제국 시대에는 '히포크라테스 이래 최고의 의사'라 불릴만한 갈레노스가 그리스에서 탄생했다. 고대 그리스의 의학을 싸그리 집대성해서 해부학, 생리학, 병리학 등 온갖 분야에 탁월한 성과를 남겼다. 그의 대표적인 업적은 심장이 펌프처럼 온 몸에 혈액을 순환시킨다는 사실을 밝혀냈다는 것이었다.[137] 다만 체내 혈액 순환설에서 약간 오류가 있었는데 이 오류는 19세기 윌리엄 하비가 등장해 바로잡기 전까지 2,000년 가까이 세계 의학계의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갈레노스는 이 과정에서 돼지나 소, 심지어는 사람까지 수많은 사체들을 직접 연구했는데, 심장의 판막을 묘사하고 정맥과 동맥의 차이점을 밝혀내기도 했다. 그 외에도 약초의 효능과 그 투여량, 구체적인 처방전까지 수없이 적어 남기며 약초학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니 업적만 보면 가히 고대 의학계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꼽혀도 모자르지 않다.

고대 최고의 약학자였던 디오스코리데스는 소아시아 출신이다. 타르수스[138]에서 멀지 않은 아나자르바에서 태어난 그는 서기 1세기에 살았으며, 약효가 있다고 여겨지는 세 가지 자연계(식물, 동물, 광물)의 산물에 대한 고대 최대 규모의 저서를 남겼다. 그 결과물이 바로 『약재론(De materia medica)』이다. 5권으로 나뉜 이 책은 1,000가지가 넘는 물질을 분석하고 있는데, 그중 4분의 3은 식물이나 식물 유래 물질이다.

각 물질은 전형적인 틀에 따라 구성된 장에서 다루어지며, 가장 흔한 이름과 다른 가능한 이름들, 물리적 특징(특히 식물의 경우), 추상적인 방식으로 표현된 치료 효능,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의학적 적용 사례를 제시한다.

디오스코리데스와 그의 저작은 의학과 식물학이 그리스에서 로마로 전래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기도 하다.[139]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크라테바스를 언급할 뿐만 아니라[140], 소아시아 킬리키아 속주에 있는 로마 행정관들과 교류했을 가능성도 있다. 또한 그는 기원전 1세기경 라틴 학자 섹스티우스 니게르의 저서에 실린 것과 유사한 약용 식물 자료를 수록한 것으로 보인다.

약학 분야에 갈레노스와 디오스코리데스가 있다면, 외과 분야에는 안틸로스가 있다.[141] 많은 저술들이 남아 있는 갈레노스[142]와 다르게 그의 저술들은 온전히 전하지 않으며 아랍어와 시리아어 단편들이 남아 있을 뿐이지만, 동맥류·백내장·방광결석 등에 대한 안틸로스의 처치법은 19세기까지 유럽과 아랍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12.10. 스포츠[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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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탄한 육체를 숭배하다시피하던 고대 그리스인들은 스포츠를 단순한 운동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가꾸는 숭고한 행위로 여겼다. 당대 가장 인기가 많던 종목은 달리기, 멀리뛰기, 원반던지기, 창던지기, 팡크라티온 등이 있었다. 그리스인들은 상대를 추월하고 승리를 쟁취하는 행위 자체를 중시했기에 기록을 세우거나 따로 기록하는 종목은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개인의 육체 기량을 가장 중요시했기에 공동체의 협력이 필수적인 팀 경기 역시 딱히 선호하는 편이 아니었다. 이 외에는 경마나 전차경주가 인기가 있었다.

당시 사람들이 열광하던 경기들 중에 팡크라티온이라는 게 있었다. 대충 복싱레슬링을 섞고 이걸 엄청나게 잔혹하게 만든 버전 쯤으로 생각하면 된다. 두 남성 선수가 알몸으로 링 위에서 싸웠는데, 금지하는 건 손톱으로 할퀴기, 이빨로 깨물기, 눈 찌르기였는데 이 3개를 제외한 모든 행위가 허용됐다. 말 그대로 고환을 터뜨리거나 항문을 찌르는 등 그어떤 짓거리를 해도 위의 3개만 아니면 그대로 용납되었다는 뜻. 심판이 옆에서 선수들을 지켜보고는 있었다만 저 3개의 가장 기본적인 금지 규정마저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심지어 경기 도중 선수가 손톱으로 상대방의 복부를 마구 찔러서 내장이 흘러나와 죽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하지만 그 잔혹성에 비례해서 고대 그리스 세계에는 엄청나게 인기가 많았고 매년 수많은 지원자들이 꾸역꾸역 등장해 팡크라티온 챔피언이 되기 위해 경쟁했다. 일부 학자들은 이 팡크라티온이 현재 종합격투기의 기원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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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들은 성소 올림피아에 모여 4년마다 제우스 신에게 바치는 성스러운 운동 경기, 즉 올림피아 제전(Ὀλυμπιακοὶ ἀγῶνες)을 열기도 했다. 이 정신을 계승한 축제가 바로 그 유명한 올림픽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최초의 올림픽은 기원전 776년에 처음으로 열렸고[143] 처음에는 종교적 성향이 강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인기가 많아지며 전 그리스의 폴리스들이 참여하는 초대형 규모의 축제로 발전했다. 사람들이 경기를 관람하기 위해 몰려드니 당연히 상인들과 예술가들이 사람들을 찾아 올림피아로 향했고, 이 시기의 올림피아 제전은 헬레니즘 문화의 결정체나 다름없었다. 다만 로마 제국이 들어오고 유희성과 오락성이 강해졌고,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한 테오도시우스 1세가 '이교도의 제전'이라는 이유로 폐지해버렸다.

올림피아 제전이 열리는 시기만큼은 모든 폴리스들이 의무적으로 전쟁을 금지하는 휴전 기간이었다. 폴리스들 간 전쟁이 빈번했던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는 몇 되지 않는 평화의 시기였던 것이다. 이걸 '에케체이리아(ekecheiria)'라고 부른다. 각 폴리스마다 3명씩 '스폰도포로이(spondophoroi)'라고 하는 선수를 선발해 올림피아로 보냈는데, 선수와 관객들의 통행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서 웬만하면 모든 폴리스들이 휴전 원칙을 준수하는 게 보통이었다.[144]

올림피아 제전에서 가장 인기 많던 종목은 단연 달리기 경주 '스타디온'이었다. 제1회부터 13회까지의 올림피아 제전에서는 아예 달리기 경기 하나만 치렀다.[145] 그러다가 점차 장거리 달리기, 창던지기, 원반던지기, 멀리뛰기, 레슬링, 사륜마차 경주, 경마, 팡크라티온 등이 추가되면서 후대에는 23개에 달하는 종목을 두고 겨루었다. 경기에는 오직 자유민 남성만이 참가할 수 있었다.[146] 기원전 632년부터는 청소년들을 위한 종목들도 따로 개설되었다. 대부분의 주자들은 나체로 경기에 임했다. 원래는 옷을 입고 했지만 아무래도 옷을 입지 않은 선수들이 성적이 더 좋았고 다른 선수들이 이를 모조리 따라하면서 그렇게 변한 것이다. 몸을 더 매끈하게 만들고 육체미를 자랑하기 위해 기름을 바르는 경우도 있었다.

레슬링도 인기가 많았는데, 엉덩이나 등, 혹은 어깨 이렇게 세 부위들 중 하나가 땅바닥에 닿으면 진 걸로 간주했다. 원시적인 형태의 권투 역시 존재해서 '히마스'라고 하는 가죽 장갑을 끼고 싸웠다. 레슬링에 비해서 훨씬 연령대도 낮고 잔인도도 덜했다고 한다. 원반던지기의 경우 현대의 원반던지기와 거의 비슷했다. 청동으로 만든 무거운 원반을 주로 썼지만 돌이나 철덩어리로 만든 원반을 쓰기도 했다. 대략 무게는 2kg, 지름은 약 21cm로 회전력을 이용해 가장 멀리 던지는 선수가 승자였다. 멀리뛰기의 경우 '홀터레스'라고 하는 납으로 만든 추를 이용해 반동을 주었다. 승마나 전차경주는 일단 값비싼 말이 있어야 참여할 수 있어서 입문 문턱 자체가 높았다. 그래서 부유한 여성 후원자가 우승한 선수를 후원했을 경우 이 후원자도 우승한 걸로 쳤다. 그래서 스파르타의 공주 시니스카는 이런 방식으로 여성의 몸으로도 올림픽 우승자라는 영예를 누렸다.

참고로 고대 그리스에서 올림피아 제전의 우승자는 엄청난 영예를 누렸다. 한번 우승을 하고 나면 전 폴리스의 영웅이 되었고, 올림피아와 해당 선수의 고향에는 그 선수를 기리는 조각상을 세워줄 정도였다. 또한 올림피아 제전을 관람하는 일은 꽤나 고역이었다. 제전은 완전히 뜨거운 햇볕이 쨍쨍 내려쬐는 벌판에서 치러졌고 관객들은 차양도 그늘도 제대로 없는 먼지투성이 광장에서 경기를 관람해야만 했다. 당연히 기력을 많이 소모하는 일이었고 경기를 치르거나 관람하다가 탈진하는 일들도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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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라톤이 고대 그리스에서 처음 유래했다.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대군에 맞섰던 정신을 기린다는 의미로 쿠베르탱 남작이 근대 올림픽에서 복원했고, 이후 쭉 역사가 내려오면서 현재의 올림픽에까지도 핵심 육상종목으로 자리하고 있다. 유래부터가 페르시아에 맞서싸운 걸 기리는 것이었기에 페르시아의 후계국인 이란이 주최한 1974 테헤란 아시안 게임에서는 마라톤 종목이 빠졌다. 자세한 내용은 마라톤 전투마라톤 문서 참조.
  • 요요를 처음으로 발명한 것도 그리스인이다. 기원전 500년대에 아테네에서 만들어진 요요가 그리스 유적에서 발견되었기 때문. 고고학자들은 이를 토대로 요요가 세계에서 2번째로 가장 오래된 장난감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 최초의 자판기의 경우 기원전 1세기 경 알렉산드리아의 헤론이 발명했다. 동전을 넣으면 약간의 성수가 흘러나오는 자판기였다. 동전을 넣으면 동전이 레버에 부착된 팬 위에 떨어지는데, 이 레버가 밸브를 열어 물이 흘러나오게 만들었다. 동전이 흘러 떨어지면 다시 레버가 원래대로 돌아가면서 밸브가 잠겼다.
  •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세계 최초의 악보가 그리스에서 왔다. 세이킬로스의 비문이라고 하는데, 원통형의 돌에 악보와 가사가 쓰여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 파에스토스 원반이라고 그리스령 크레타 섬 파이스토스 지역에서 발굴된 고대 유물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대표적인 오파츠들 중 하나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계식 계산기가 고대 그리스인이 만든 안티키테라 기계다. 컴퓨터의 가장 기본적인 본질이 계산기라는 걸 생각하면 세계 최초의 아날로그 컴퓨터라고 불리기도 한다. 투박한 외관과는 달리 정말 당시의 최첨단 기술들이 총집합되어 있는 유물로, 당시 고고학자들이 그 안을 엑스레이로 찍어보고 경악할 정도였다. 더 자세한 내용은 안티키테라 기계 문서 참조.
Melas+Zomos+(Spa...
  • 스파르타에서 먹던 상상을 초월하는 끔찍한 맛의 검은 죽이 유명하다. 고전 그리스어로는 '멜라스 조모스'라고 하는데 아테네인들이 이걸 먹고 '아테네의 돼지도 이거보단 맛있는 걸 먹겠다'라면서 끔찍해했다고. 주요 재료는 돼지의 선지와 식초, 소금과 돼지 뒷다리살 극히 조금이었다고 한다.
  • 영어로 멍청이를 뜻하는 단어 'idiot'가 고전 그리스어에서 왔다. ' ἰδιώτης'라고 해서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을 부르는 멸칭이었다. 당시에는 참정권이 있음에도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고 한심하게 여겼다.
  •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 주식들 중 하나였다. 그래서 그리스 로마 신화의 대표적인 영웅 헤라클레스가 콩을 즐겨 먹었다는 내용을 희곡에 집어넣기도 했다.
parthenon-18th
  • 그리스 문명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파르테논 신전은 상당히 수난을 많이 겪은 건축물이다. 올림포스 신앙이 몰락하고 기독교화된 이후에는 교회로 쓰이다가 모스크로도 사용되었고, 오스만 제국 시절에는 폭약 창고로도 쓰다가 일부분이 파괴되기 까지 했다. 위의 모습은 18세기 시절 파르테논의 모습. 지금에야 겨우 안쪽의 성당 건물을 철거하고 고대의 모습을 복원하고 있지만 문화재 보호 명목으로 극도로 조심스레 복원하고 있는터라 옛 모습을 완전히 되찾으려면 시간이 엄청나게 오래 걸릴 것으로 보여진다.
  • 델포이에서 내려주던 델포이 신탁이 굉장히 유명하다. 그리스인들은 무녀가 무아지경에서 내뱉는 말들을 예언의 신 아폴론이 내려주는 신탁이라고 굳게 믿었고, 이를 근거삼아서 국가 정책을 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은근히 안에 꼬아놓은 말고 넌센스 같아서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았다고. 대표적인 예시로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는 전쟁을 벌이기 전 '거대한 제국이 망할 것이다'라는 신탁을 듣고 신이 나서 전쟁을 벌였는데 키루스 2세에게 깨지고야 만다. 알고보니 '거대한 제국'은 자신이 다스리던 리디아를 뜻했던 것.
  • 큰 음경을 미련함의 상징으로, 작은 음경을 현명함의 상징으로 여겼다.
  • 우리나라서유럽 국가들, 미국, 캐나다, 일본, 뉴질랜드, 호주 등 해외 각국에서는 그리스 하면 아무래도 고대 그리스의 인지도가 더 높은지 사람들이 키톤과 페플로스, 히마티온 등 고대 그리스 시기때 의상들을 입고, 제우스, 포세이돈, 헤라, 아레스, 아테나, 아르테미스, 아폴론, 헤르메스, 데메테르 같은 그리스 신화에서 등장하는 올림포스 12신들을 종교로 숭앙하는 스테레오타입으로 많이 인식하거나 해당 국가들에서 제작, 발간되어지는 애니메이션이나 게임, 영화 등 대중매체 작품이나 어린이용 서적들에서도 옛날 그리스의 모습을 주로 고대 그리스 시기의 모습으로 많이 묘사하며[148] 고대 그리스 시기에 그리스인들이 입었던 키톤이나 히마티온을 그리스의 전통 의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사실 이는 근현대의 서방 열강들이 고대 그리스와 고대 로마 문명을 자국과 서구 문화의 근원으로 여기며 고대 그리스 시기의 모습을 그리스의 문화로 묘사해 전세계에 퍼트린 영향이 더 크며 정작 고대 그리스 문명기의 본산인 그리스에서는 고대 그리스와 그리스 신화보다는 동로마 제국과 동방 정교회를 가장 먼저 떠올리거나 동로마와 정교회를 자국의 정체성으로 두는 경향이 더 크다. 이 때문에 현재의 그리스인들은 다른 나라들에서 자국의 전통의상을 고대 그리스 문명기의 키톤이나 히마티온으로 소개하면 "이 옷들은 우리나라의 진짜 전통의상이 아니다"라고 욕을 퍼붓거나 푸스타넬라 등 고대 그리스 문명기 이후에 등장한 현 전통의상이 진짜 그리스의 전통복식이라고 강조하고 있지만 이미 전세계적으로 고대 그리스의 이미지가 강렬하게 자리잡혀버렸는지라 현재 서방국가들과 우리나라, 일본 등 타국의 대중 매체와 시판되는 아동용 도서들에서 그려지는 그리스의 옛날 모습들이 현대 그리스와 문화, 종교적으로 가장 가까운 동로마 제국 시기의 모습으로 바뀌기에는 어려울 듯 싶어보인다.
 
 
 
 
 
 
 
 
 
 
 
 
 
 
 
 
 
 
 
 
 
 
 
 
 
 
 
 
 
 
 
 
 
 
 
 
 
 
 
 

15. 외부 링크[편집]

 
 
 
 
 
 
 
 
 
 
 
 
 
 
 
 
 
 
 
 
 
 
 
 
 
 
 
 
 
 
 
 
 
 
 
 
 
 
 
 
 
 
 
 
 
 
 
 
 
 
 
 
 
 
 
 
[1] 도시들마다 민주주의왕정, 과두정이 혼재하였다. 예를 들어 아테네직접민주주의 국가였고 스파르타는 형식적이긴 했지만 어쨌든 왕을 모시는 공치제였다.[2] 더 넓게는 지중해 해안 곳곳에 식민지를 건설하였고, 알렉산드르 3세 이후에는 페르시아, 이집트 지역까지 영향을 미쳤다.[3] 그리고 스파르타인들 스스로도 결코 자기들을 민주국가로 생각하지 않았지만[4] 역시 동방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키고 타자화시킨 것이긴 하지만[5] 아테네, 스파르타, 코린토스 정도만이 자치권을 지니게 되었다.[6] 스파르타가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도 다른 폴리스들에 간섭을 크게 하지 않았던 이유가 그 위치 때문이었다. 애초에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도 가장 구석진 데 처박혀 있어서 육상으로는 다른 도시들과 충돌할 일이 없었고 외부 접촉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7] 이런 이유로 플라톤은 시인들을 모두 도시 밖으로 쫓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8] 심지어 일리아스 안에서도 경건한은 "제우스가 이러이러한 일을 하였다"는 식의 내러티브를 믿는 것이 아니라, 헤카톰베(대규모 제사)로 제시된다.[9] 가령 플라톤은 대화편 파이돈에서 최악의 흉악범죄 예시로 신전 모독을 든다.[10] 다소 뜬금없어 보일지라도 이런 사례는 고대 이스라엘에서도 확인된다. 고전적인 설명에 의하면, 왕정 성립 전의 이스라엘은 야훼의 계약궤가 있는 실로를 중심으로 한 성소 동맹이었다. 즉 제사와 성소를 공유하며 '이스라엘'이라는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비록 지파끼리 서로 다르고 때로는 서로 얼굴을 붉히기도 하지만, 공동의 성소인 실로에서 함께 제사를 봉헌하면, 필리스티아인도 암몸인도 모압인도 아닌 '이스라엘인'이었다.[11] 이는 고대 로마 또한 마찬가지였다. 전근대 문명 수준에서는 아무리 합리적인 사고를 한다고 해도 자연재해나 전염병 등을 제대로 예측하고 대비할 수 있는 과학적 지식과 수단은 없었기 때문에 결국에는 신의 권능에 의존하면서 그런 재앙들이 자신들을 피해가길 바라는 심리가 강하게 존재할 수 밖에 없었다.[12] 테르모필레 전투로 유명한 레오니다스 1세가 이 가문의 왕이다.[13] 아테네의 첫 성문법을 만든 인물이다.[14] 고대 아테네에서는 1년이 10개월이었다.[15] 이 관습은 기원전 410년대쯤 되면 너무 구식이라 아리스토파네스가 작품 속에서 시대착오적이라고 대놓고 조롱할 정도였다.[16] 소크라테스는 젊은 제자에게 이렇게 묻기도 했다. "누구 앞에서 말하는 게 부끄러운가? 천 짜는 사람이나 가죽쟁이? 건축가나 대장장이, 아니면 농부들? 아고라에서 물건 떼다 비싸게 팔 궁리나 하는 자들인가? 의회는 바로 그런 부류들로 채워져 있다네." 그러면서 그는 그들이야말로 "가장 무지하고 힘없는 자들"이라며 뼈 있는 말을 덧붙였다.[17] 물론 알키비아데스처럼 야심만만한 인물은 20대부터 정치판에 뛰어들기도 했다.[18] 노예를 부려 큰돈을 번 사업가였다.[19] 그는 페리클레스는 찬양했지만 반대로 클레온은 혐오했다.[20] 정교한 행정 시스템을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아테네에는 국가 차원의 중앙 집중식 통합 등록제가 없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21] 이들은 성인이 될 때까지 나라 돈으로 먹고살았다.[22] 정치인 클레온을 대놓고 비판하는 캐릭터.[23] 참고로 당시 관객들은 정치적인 사안에 침묵하지 않고 환호와 야유를 아끼지 않았다.[24] 투키디데스는 이를 두고 아테네인들의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관습이라 전했지만, 사실 기원전 5세기 초반에나 들어서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25]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건 이런 추도사가 당시에 정말 수도 없이 행해졌다는 사실이다. 다만 연설문 대부분이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을 뿐이다. 현재 여섯 편 정도가 통째로 혹은 일부만 남아 있는데, 그중 몇몇은 그저 수사학 연습용 글일 뿐이고 플라톤의 대화록 『메넥세노스』에 실린 한 편은 상당히 뼈 있는 풍자를 담고 있다.[26] 현대의 배심원제처럼 강제는 아니었으며, 시민이 신청하면 일정 절차를 거쳐 추첨했다.[27] 전성기 아테네의 관직은 의원직을 빼고도 700개가 넘었다.[28]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각 부족에서 20명씩 선출된 80인 평의회가 사법과 경제 권한을 가졌다고 한다.[29] 임정관. (2018). 지역정치와 다양성: 직접민주주의 제도로서 추첨제의 활용 가능성 연구. GRI연구논총, 20(2), 146-148쪽[30] 신용인. (2016). 추첨 방식의 주민자치위원회 구성에 관한 고찰. 지방자치법연구, 16(3), 227-255.[31] 신용인. (2016). 추첨 방식의 주민자치위원회 구성에 관한 고찰. 지방자치법연구, 16(3), 227-255.[32] 최고 자산 계급이자 사실상 아테네를 좌지우지하는 유력 가문들.[33] 기병 복무 가능자.[34] 중장보병 복무 가능자[35] 특히 법정의 상대방을 꽁꽁 묶어버리는 주문인 '데픽시오네스'가 횡행했다. "나의 원수인 데메트리우스와 파나고라를 모든 죽은 자와 함께 피와 재로 묶어버린다"라는 문구가 적힌 납판이 발견되기도 했다.[36] 대표적인 예로 기원전 399년 소크라테스의 불경죄 재판을 들 수 있는데, 당시 반대파는 사형을 주장했지만 소크라테스는 자기가 도시에 세운 공이 크니 평생 공짜 밥을 먹으며 대접받아야 마땅하다고 맞받아쳤다.[37] 이렇게 고소를 남발하던 경향은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 자원 기소자로서 남의 사건을 대신 맡을 수 있게 한 오래된 법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38] '아레스 신의 바위'라는 의미이다. 고대 로마의 원로원과 같은 역할을 했으며, 의도적 살인에 대한 재판 법정(Dicasteries)으로서의 기능도 했다.[39] 나우크라로이/콜라크레타이[40] 서기관, 그라마테이스[41] 위원, 신그라페이스[42] 상업 활동 및 소송을 관장했다.[43] 35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44] 이들은 '다른 신들(Other Gods)' 기금에 통합되었다[45] 19세기의 뱅자맹 콩스탕은 이를 "현대인에겐 끔찍한 불의지만, 아테네에서는 개인이 공동체에 얼마나 종속되어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평했다. 하지만 당시 민주정에서 유혈 사태 없이 정적을 밀어내는 데 이보다 확실한 방법도 없었을 것이다.[46] 히페르볼로스의 아버지가 문신 있는 노예였다는 비하 섞인 농담인데, 사실은 아니다.[47] '-nom'이라는 어근은 원래 '나누다'라는 뜻의 'nemein'에서 왔으며, '법'을 뜻하는 'nomos'와는 뿌리가 다르다. 따라서 엄밀히 말해 '법 앞의 평등'이라는 의미는 아니다.[48] 이런 경향은 훗날 로마 공화정에서도 나타난다.[49] 'ison'은 평등뿐 아니라 공정이라는 뜻도 담고 있다.[50] 기원전 427년, 미틸레네를 완전히 파괴할지를 두고 벌인 아테네 민회의 논쟁이 대표적이다.[51]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오직 출생 성분만이 시민과 거주 외국인을 가르는 기준이었다는 점이다. 또 다른 쟁점은 출생의 평등이 재산 같은 물질적 평등까지 포함하느냐는 것이었다. 가끔 재산 몰수나 재분배가 일어나긴 했지만, 고대 민주 국가 중 물질적 평등을 정의의 필수 요건으로 삼은 곳은 거의 없었다. 다만 '레이투르기아'나 여러 세금을 통해 부를 공동체에 환원하고, 시민의 품격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공공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힘썼다.[52] 소위 '신사'와 '무리'를 가르는 이 '진정한 자유'라는 개념은 오늘날까지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과거 유럽의 상류층들이 자신들의 권위를 정당화하려고 활용했던 고등 교육, 즉 '자유 교양'이나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람에게 어울리는 예술'을 뜻하는 '아르테스 리베랄레스'라는 용어의 역사에서도 그 뿌리를 찾아볼 수 있다.[53] 당시 공직자들을 '감사 대상(hypeuthynos)'이라고 불렀던 이유다.[54] 4세기에는 이를 '신들의 어머니' 성소로 쓰이던 옛 의사당에 모아두었다.[55] 민주 국가였던 아르고스에서도 국고 거래를 기록한 100여 개의 청동판이 발견되었다. 여기에는 행정 구역 명칭부터 관료제, 재정 운영 방식까지 상세히 적혀 있어 고대 그리스 행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56] 학자들은 돌에 결정을 새기는 아테네인들의 유별난 '비문 집착(epigraphic habit)'을 두고 논쟁을 벌여왔다. 이 기록들이 정말 시민을 위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귀족들이 자신의 과시욕을 뽐내기 위한 수단이었는지, 그것도 아니면 신들에게 바치는 보고서였는지를 두고 말이다.[57] 테오프라스토스가 묘사한 '과두정치적 인간'은 이렇게 불평한다. "정치인들에게 아첨하는 짓은 관둬야 한다. 그래야 민중(데모스)에게 모욕(hubrizomenous)을 당하거나 존경(timōmenous)받는 일에 일희일비하지 않을 것 아닌가."[58] 플루타르코스는 "민중(데모스)이 장군들에게 저지른 잘못을 조사한 모든 저자"라는 표현을 쓰며 당시의 가혹한 분위기를 전했다. [59] 최고자산계급이자 사실상 아테네를 좌지우지하는 유력 가문들.[60] 기병 복무 가능자.[61] 중장보병 복무 가능자[62] 그리고 계급이 나뉘어 있다지만 민주주의를 시행한 후에는 계급간의 격차가 어느 정도 좁혀진다. 정치적으로는 테티스 1명과 펜타코시오메딤노이 1명 모두 동등한 표가 주어지고 당연히 테티스들의 숫자가 더 많기에 자연스레 테티스들의 영향력이 강해졌다.[63] 그나마 5세기 중엽에는 37% 수준까지 떨어졌다. 반면 시민은 55% 정도로 절반을 넘었는데 이는 민주주의로 인해서 무산자까지도 평등하게 시민권을 주다 보니 가능했다. 반면 시민권 제한에 엄격했던 스파르타는 65%가 노예였고 시민은 6% 정도였다.[64] 법적용어였다.[65] 아리스토텔레스는 스파르타 여성들이 지나치게 개방적이고 퇴폐적이라면서 스파르타의 무책임한 사회 질서가 그 원인이라고 대놓고 비판한 적도 있다.[66] 사실 꼭 아프로디테 신전의 여사제만이 아니라 코린토스의 풍습을 들여온 다른 폴리스의 고급 매춘부들도 이렇게 불렸다. 코린토스의 헤타이라가 가장 유명하긴 했지만 말이다.[67] 당시에는 외양의 아름다움을 곧 선량함, 훌륭함, 그 외 온갖 덕목과 동일시하는 외모지상주의적 풍조가 심했다. 이 프리네란 인물은 신성모독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됐는데, 재판관들 앞에서 옷을 벗어 아름다운 나체를 드러내 보이자 재판관들이 전술한 논리에 따라 "저렇게 아름다운 사람이 신성모독 죄인일 리 없다"며 무죄 판결을 내렸다고 한다.[68]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리스 투구다. 아주 멋진 외형을 하고 있지만 시각과 청각이 저하된다는 치명적 단점 때문에 후대로 갈수록 쓰는 빈도가 줄어들었고 나중에는 거의 장식용이나 과시용으로만 썼다.[69] 고대 그리스 후기로 가면서 청동 투구를 살 돈이 없던 일부 호플리테스들은 아예 투구를 빼고 필레우스만 쓰고 전투에 나가는 경우도 많았다.[70] 체육관을 의미하는 영단어 'gym'의 기원이다. 김나지움의 어원이다.[71] 고대 그리스 학생들은 이 서사시들을 툭 치면 줄줄 흘러나올 정도로 열심히 암송해야만 했다.[72] 이 소피스트들을 비난하면서 등장했던 소크라테스 역시 당시에는 그저 소피스트들 중 하나로 취급받았다.[73] 하지만 훗날 사회 분위기가 바뀌고 점차 소피스트들이 쇠퇴하면서 이들에 대한 평가도 박해졌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는 이들을 혐오했던 걸로 유명하다. 이들이 대중들을 선동해 소크라테스를 죽음에 몰게 한 책임이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74] 막사에 갇혀 지냈던 터라 한창 사춘기가 오고 성애에 눈이 뜰 나이에 여성들을 제대로 만나지 못하고 자라게 되는데, 이때문에 막사 내에서 동성애가 일어나는 게 오히려 보통이었다.[75] 근세 유럽과 대등한 수준이었다고 추정하는 연구들도 있다[76] 당시 그리스와 적국 관계였던 페르시아는 그리스 화폐를 쓰는 걸 달갑지 않게 여겼지만 그래도 별 수단이 없어서 그냥 놔두었다.[77] 가장 비싼 자줏빛 염료인 '티리안 퍼플'의 경우 거의 대부분이 이 대형 작업장에서만 만들어졌다. 소규모 작업장의 경우 이 비싼 염료를 조달할 형편이 못됐기 때문이다.[78] 최초의 해상 보험도 기원전 6세기 그리스에서 발달했다.[79] 예술가나 운동선수 같은 예능인들의 사회적 지위가 높았다는 것도 고대 그리스의 특이성 중 하나다. 유명한 예술가들과 운동선수들의 이름은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80]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 라는 진술을 듣곤, 마치 탈레스가 말하는 물이 현대의 원자나 분자인 것처럼 생각한다. 이 학파에서 말하는 만물의 근원은 만물의 시작이나 가장 처음의 형태, 뿌리가 되는 근본적인 형태, 생명의 시작 같은 개념이다.[81] 정확히 말하면 사실 헤라클레이토스는 '변화 속의 불변'인 '로고스'를 언급했고 파르메니데스는 순수 논리적 차원에서 '있다'의 불변성을 고찰했다.[82] 어떤 세계에는 해도 없고 달도 없으며, 어떤 세계는 우리의 것들보다 훨씬 더 크다. 세계들 사이의 거리들은 똑같지 않아서, 어떤 곳에는 세계들이 더 많고, 어떤 곳에는 더 적다. 그리고 어떤 세계들은 커지고 있고, 어떤 세계들은 전성기에 달했으며, 어떤 세계들은 쇠퇴하고 있다. 또 어떤 곳에서는 세계들이 생겨나고 있고 어떤 곳에서는 사라지고 있다. 그것들은 서로 충돌함으로써 소멸한다. 몇몇 세계에서는 동물도 식물도 없고 물기도 전혀 없다. - 데모크리토스 어록 중에서.[83] 애초에 당시에는 지금처럼 학문이 나뉘어 있지 않았다. 철학자가 이것 저것 다 했다. 철학 중 자연에 대한 내용을 다루는 자연철학자연과학으로 계승된 것도 꽤 근대의 일이다.[84]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말로 유명하다.[85] 산파가 아이를 낳을 때 산모를 옆에서 도와주는 것처럼 보조적으로 옆에서 질문을 던지면서 스스로 진리를 깨닫게 만든다는 말이다.[86] 라틴어 구절 ipse se nihil scire id unum sciat로 이어지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철학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말이다. 일단 자신이 모르고 있다고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남에게 배워서 아는 것이든 스스로 숙고해서 깨닫는 것이든, 진정한 앎이 시작되기 때문이다.[87] 플라톤이 마치 현대 민주주의의 적처럼 오해되는 건, 많은 사람들이 "국가"를 대화편 전체 맥락에서 고립시켜 독해하였고, "법률"이 친저 논란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플라톤 연구자들은 "법률"을 플라톤의 친저로 보고, 이를 통해서 플라톤에 대한 음해를 논파하는 데 성공했다.[88] 선거 민주정은 고전기 아테네의 관점에서 보면, 뜨거운 아이스아메리카노 만큼이나 자체 모순적인 단어이다.[89] (논문 내 주석) 『법률』 701a-b에서는 덕으로서의 자유(eleutheria)가 아닌 방종으로서의 자유(eleutheia)가 언급된다.[90] (논문 내 주석)“지성이 그 어떤 것의 시종이거나 노예라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이 모든 것들을 다스리는 것이 이치에 맞다”(『법률』 875d)[91] (논문 내 주석)법률이 관리들과 시민들에게 부여하는 모든 권리(자유)에는 지성의 분별력을 벗어나는 부분이 섞여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성과 자유의 혼합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강제가 필요하고 때로는 설득이 필요하며, 불복, 항소, 사정, 고발, 재판 같은 견제와 교정 장치가 있는 것이다.[92] 오히려 강의노트가 남은 아리스토텔레스보다 플라톤이 더 어렵다. 대화편은 장르 특성상, (설령 작중 소크라테스라 하더라도) 등장인물들의 발언이 플라톤의 생각을 대변한다는 보장이 전혀 없다. '소크라테스의 대화 상대자가 플라톤의 생각을 아예 반영하지 않는다'는 보장조차 없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남긴 건 강의노트이기에 일단 그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이라고 안심하고 읽을 수 있다. 게다가 대화편은 서로간에 내용이 긴장관계를 이루는데, 현대의 플라톤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플라톤이 학설을 수정한 것인지', '수정하지 않은 것인지', '애당초 단일한 플라톤 사상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플라톤은 단지 지혜를 탐구하는 태도만을 가르친 것인지' 합의가 안되었다.[93] 타악기 팀파니의 어원이다.[94] 진품은 박물관에 있다.[95] 스파르타 인근에 있던 도시. 아나톨리아 서남부의 카리아 지방과 발음이 비슷하나 연관이 없다.[96] 기원전 5세기 전설적인 조각가인 폴리클레이토스는 세계 최초의 미술 지침서인 『카논』을 저술하였다. 『카논』은 수학적으로 완벽한 비례와 균형을 갖춘 인체를 묘사하는 방법을 다루었으나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97] 특히 미소년을 미의 기준으로 보던 그리스에서는 젊은 미소년들의 나체상들을 많이 제작했다. 여성의 누드상은 외설적이라고 여겨져서 아예 기원전 4세기까진 만들지도 않았고 이후에 만든 것도 남성 나체상보다 수가 확연히 적었다.[98] 만들기 까다로운 머리카락 같은 부위는 석회로 따로 만들어 붙이기도 했다.[99] 제우스포세이돈을 묘사한 조각상으로 추정된다. 남아있는 몇되지 않는 고대 그리스 청동상들 중 하나다.[100] 고대 헬레니즘 조각의 대표작이나 다름없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다.[101] 그리스 아티카 지방의 철분이 많이 함유된 흙을 구우면 예쁜 붉은빛이 난다.[102] 이 도자기 물레가 역사가 엄청나게 오래됐다. 거의 기원전 2500년 전까지 역사가 거슬러올라간다. 그 이전에는 고리를 만들어서 한층씩 쌓아나가는 방법을 썼다.[103] 붉은 바탕에 검은색으로 인물을 그려넣은 왼쪽이 흑회식이고 검은 바탕에 붉은색으로 인물을 그려넣은 오른쪽이 홍회식이다.[104] 당시 고대 그리스에서 전형적인 항아리인 암포라의 모습이다. 저렇게 생긴 항아리를 가장 보편적으로 많이 사용했다.[105] 기원전 6세기 말에는 '백회식 도자기'라고 해서 아예 백색 바탕에 그림만 그려넣고 채색한 도자기도 등장했다. 색깔이 아무래도 검은색과 붉은색으로 제한된 흑회식이나 홍회식에 비해서 훨씬 다채롭다는 게 장점이었다.[106] 다만 그리스 도예공들은 화가와는 상당히 달랐다. 도공들은 실력도 화가들에 비해서 좋지 않았고, 고대 그리스인들이 화가는 그토록 찬미한데에 반해서 도공들의 기술은 예찬한 기록을 남기지도 않았다. 도자기에 그려진 그림만을 보고 고대 그리스 회화가 저랬구나라고 하기에는 힘들다는 뜻이다.[107] 알렉산드로스 3세가 총애한 화가로도 유명하다. 오죽 총애했으면 대왕의 애인과 불륜을 했음에도 대왕이 아펠레스에게 애인을 넘겨줬을 정도였다고 한다.[108] 워낙 내용이 풍부해서 고대 그리스 창세신화를 이야기할 때 이사람의 판본을 바탕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109] 그리스의 페미니스트라고 불릴 정도로 여성 간 동성애에 관심이 많은 인물이었다. 그래서 훗날 교황 그레고리오 8세가 그녀를 기원전의 창녀라고 부르면서 그녀가 지은 책들을 싹 불태워버리라 명령하기도 했다.[110] 반원형으로 소리가 잘 울려퍼져서 멀리서도 공연을 관람할 수 있었다.[111] 쾌락의 신 디오니소스가 저승으로 내려가던 도중 삼도천에서 들었던 개구리들의 개굴개굴거리는 소리에서 제목을 따왔다.[112] 몸을 쓸 일이 많은 노예나 운동선수들은 훨씬 밑단을 짧게 만든 키톤을 입었다.[113]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그 이전까지는 훨씬 직선형에다가 딱딱한 느낌이었다.[114] 헤로도토스가 이에 대해 흥미로운 설화를 실어놨다. 아테네의 여성들이 아에기아 해로 원정을 떠난 남편들의 생사를 묻다가 지나치게 흥분해 유일하게 살아돌아온 생존자를 옷의 핀으로 찔러죽여버린 후부터 도리아식 키톤이 사라졌다는 것이다.[115] 맨 위에가 키톤이고 그 아래가 페플로스, 맨 아래가 히마티온이다.[116] 스파르타인들은 건강한 여성이 건강한 전사를 낳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 여성들에게도 운동을 시켰다.[117] 후일 로마 시대에 토가의 원형이 된다. 다만 훨씬 장식적이고 볼륨감이 풍부한 토가와는 달리 히마티온은 그나마 부피가 덜하고 입는 방법도 간단하다.[118] 이걸 '티리안 퍼플'이라고 부른다. 바닷속 고둥의 껍질로 만들었는데, 워낙 희귀하다 보니 로마 시대에는 같은 양의 금보다도 비쌌다.[119] 스컬리핑이란 피부의 한겹한겹을 도려내는 방식으로 피부에 우둘투둘한 흉터를 만들어 잉크 없이 흉터로만 새기는 문신이다.[120] 프라잉팬을 의미하는 고전 그리스어 '타게논(τάγηνον)'에서 따왔다.[121] 와인에 적신 빵과 염장한 생선, 올리브, 무화과 따위가 주를 이루고 있다.[122] 후세의 로마인들도 생선을 가장 좋은 진미로 여겼고, 그래서 양어장을 많이 만들어 생선을 길렀으며 부유한 귀족들은 신선한 생선을 얻기 위해 매일 같이 생선을 파는 경매장에 나갈 정도였다. 반면 소나 돼지 같은 육류는 생선보다 저급한 음식으로 취급했다.[123] 이 같은 인식은 후일 고대 로마에까지 전해져 내려간다.[124] 단순히 피타고라스뿐만 아니라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저명한 철학자들도 모두 음악이 중요하다고 믿었다. 플라톤은 이데아를 중시했기에 음악이 이데아의 모상체인 현실을 또다시 모사했다고 여겨 다소 음악을 폄하한 감은 있었다. 하지만 음악이 잘못된 방향으로 발전해 시민들을 망치고 있다고 개탄하는 등 분명 음악이 사회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데에는 동의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예 음악을 공교육에 반드시 포함시켜야한다고 말할 정도로 음악을 중시했다.[125] 아르고 호가 유유히 빠져나가는 걸 보고 경악한 사이렌들은 제 노래가 통하지 않은 것에 대해 지나치게 상심해서 물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126] 행성을 의미하는 영단어 planet이 '방랑자'를 의미하는 고전 그리스어 '플라네테스(πλανήτης)'에서 왔다.[127] 당시 히파르코스는 수천 년의 천문 관측 기록이 쌓여 있던 고대 이집트에서 연구를 했다.[128] 천문학자일 뿐만 아니라 삼각법의 아버지이기도 하다.[129] 1도 이내의 차이로, 육안으로 관측했다고는 믿을 수 없는 정확성을 보여준다.[130] 이 사람이 연구를 진행했던 곳이 그 유명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다.[131] 다만 이게 프톨레마이오스의 역사적 중요성을 깨뜨린 건 아니다. 당대 프톨레마이오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지식을 가지고 최적의 이론을 뽑아낸 것이었고,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관은 수천 년에 걸쳐, 그리고 심지어 지금까지도 천문학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132] 뱀 한마리가 막대기를 타고 오르는 아스클레피오스의 막대기는 현대 의학의 상징이다. 종종 헤르메스의 '카두세우스'와 혼동되는 경우가 있는 카두세우스는 뱀 두 마리가 서로 꼬면서 올라가는 모습이고 날개가 달려 있다. 하지만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는 날개도 없고 한 마리만 있다.[133] 그 외에도 개가 상처를 핥으면 빠르게 회복된다고 해서 신전에서 기르는 개를 신전 내부에 데리고 다녔다.[134] 당시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에는 들이 드글드글했다. 아스클레피오스의 상징이 뱀이었기 때문이다.[135] 여기서 말하는 점액은 고름, 콧물, 눈물, 정액, 땀 등 모든 종류의 색깔없는 인체 분비물들을 총칭한다. 굳이 뇌에서 분비된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뇌가 색이 비슷한 하얀색이었기 때문이다.[136]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137] 이미 헤로필로스와 에라시스트라투스에 의해 증명된 사실이다. 고대 그리스-로마에서 사용되던 포스 펌프가 심장의 구조에 영향을 받았다는 학설도 있다.[138] 사도 바울의 출생지로 유명하며, 당시에는 한 지방의 수도이자 약용으로 사용되는 식물 및 기타 천연자원을 연구하는 학교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139] 디오스코리데스의 저술은 훗날 라틴어뿐만 아니라 아랍어로 번역되어 널리 사용되었다.[140] 디오스코리데스 이전 세대 의사로, 약용 식물 도감을 저술했다.[141] 갈레노스와 동시대인으로, 당대 로마에서 갈레노스에 필적하는 명성을 누렸다.[142] 다양한 언어로 대략 20-25% 정도가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143] 확실한 건 아니다. 디오도로스는 113회 올림피아 제전 3년 차 되는 해에 일식이 있었다고 썼는데, 과학자들의 연구를 토대로 보면 이 일식은 기원전 316년에 일어난 일식이다. 그런데 이걸 토대로 계산하면 제1회 올림픽이 열린 연도는 기원전 765년이다.[144] 무조건적인 건 아니었다. 올림픽이고 뭐고 나라의 국운을 걸고 싸우던 펠로폰네소스 전쟁 시기에는 아테네도 스파르타도 이딴 원칙을 지킬 여유가 없어서 거의 안 지켰다.[145] 여담이지만 첫 올림픽 챔피언은 엘리스 출신의 코로이보스다.[146] 여자들은 심지어 참석조차 금지되었다. 여자가 남장을 하고 제전에 참가하면 절벽에 밀어서 죽여버릴 정도로 제한이 엄격했다. 다만 헤라 여신에게 바쳐진 일부 축제의 경우 여성들의 관람을 허가했다.[147] 다만 현대의 그것처럼 다가가면 열리는 형식이 아니라 직접 횃대에 불을 붙여야 열리는 식이였다.[148] 특히 한국에서 시판되는 어린이용 세계전래동화나 그리스 신화 만화책 등에서 고대 그리스 시대의 모습으로 많이 그려지는 경우들이 백중지세로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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