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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 제26대 내각총리대신 다나카 기이치 田中 義一|Tanaka Giichi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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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
사망 | |
도쿄부 도쿄시 (現 도쿄도) | |
재임기간 | 제26대 내각총리대신 |
조슈 번 하급무사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3살에 야마구치현에서 일어난 사족 반란인 일명 '하기의 난'에 참가했다가 반란 실패 후 너무 어린 나이라 훈방조치 되었다. 마을사무소의 직원과 초등학교의 교원을 거쳐 20세에 육군교도단에 입대, 이후 자신의 유능함과 조슈 번의 후원이 어울러지면서 일본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교을 졸업하여 본격적으로 직업군인의 길을 걸었다. 청일전쟁에 종군한 이후에는 1898년부터 1902년까지 러시아에 유학하고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하는 등 철저하게 러시아를 연구하여 '러시아통(通)'으로 불렸다. 러일전쟁에서는 만주군 참모로 근무. 1906년에 『수감잡록隨感雜錄』이 야마가타 아리토모에게 높게 평가되면서 육군 중좌로서 제국국방방침의 초안을 작성했다.
1910년(메이지 43년)에 재향군인회를 조직하였다. 이 조직은 이후 다나카의 표밭으로 불렸다. 1915년에 참모본부 차장, 하라 내각 및 제2차 야마모토 곤노효에 내각에서 육군대신을 역임하고 여론확보를 위해서 육군성 내부에 신문반을 창설했다.
1910년(메이지 43년)에 재향군인회를 조직하였다. 이 조직은 이후 다나카의 표밭으로 불렸다. 1915년에 참모본부 차장, 하라 내각 및 제2차 야마모토 곤노효에 내각에서 육군대신을 역임하고 여론확보를 위해서 육군성 내부에 신문반을 창설했다.

하라 내각에서 육군대신이 된 후 남작위를 받고, 육군대장으로 승진하는 등, 이대로 가면 원수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평판을 들었다. 시베리아 출병을 주도하는 등 팽창정책에 앞장섰으나, 1920년 이후엔 출병이 출구전략없는 진창이라고 판단하고 즉각철수론으로 입장을 바꾸었다. 그러나 곧 협심증으로 쓰러져 한직인 군사참의관으로 전보, 요양 생활을 하였고, 시베리아 철수는 1922년 내각이 한번 바뀌고 나서야 이루어졌다.
다나카가 워낙에 거물이었던 까닭에, 그가 쓰러진 뒤에도 이른바 무당파 운동이라든가 키요우라 내각으로 귀결된 연구회 내각 등 현직 시절부터 총리 후보로 몇 번 이름이 거론된 적이 있었으나, 그가 본격적인 정치가로 전업을 한 것은 입헌정우회(立憲政友會)의 분열로 인해 다카하시 고레키요가 정우회 총재직을 사임하면서 부터이다. 당초 가장 유력한 총재후보였던 요코타 센노스케는 와병중으로 죽어가고 있었고, 당외인사에서 총재을 영입하기로 하였는데, 이토 미요지나 고토 신페이 등이 거절하면서 요코타가 밀던 다나카 기이치에게 차례가 돌아온 것이다.
정우회 입당 시에 300만엔을 지참한 것으로 인해 육군대신의 관방기밀비를 횡령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받았으며, 총재 취임 후에는 군부대신에 문관 및 예비역만 앉힐 수 있도록 한 정우회의 정책을 파기하고 모리 가쿠, 쿠하라 후사노스케, 스즈키 기사부로 등 국수주의에 가까운 인물들을 영입하고, 하토야마 이치로, 야마모토 테이지로, 오가와 헤이키치 등 비주류 보수파 인사를 당내 요직에 기용해 정우회의 색채를 친군부로 바꾸었다.
1922년 3월 28일에 의열단원 김익상이 다나카 기이치 대장을 처단하기 위해 상하이 황포탄에서 폭탄을 던졌으나, 미수에 그쳤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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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대 총리 취임 후 |
1927년 쇼와금융공황으로 인해 제1차 와카쓰키 레이지로 내각이 총사퇴하면서 다나카 기이치의 입헌정우회에게 내각 조성의 대명이 내려졌고, 입헌정우회 총재로서 제26대 일본 내각총리대신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다나카는 인사권을 휘둘러 정우회 계통만 승진시키는 등 엽관주의의 화신을 보는 듯한 내각운용을 보여주며 권력을 집권당인 정우회에 집중시키게 되었다. 이는 한편으로는 다이쇼 데모크라시 하에서 보통선거에 의해 선출된 의회세력이 비선출세력을 배제하고 국가권력을 송두리째 장악하는 진보적 시대상을 보여주는 모습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당파성과 편파성으로 인하여 의회정치가 부정부패의 온상지로 지목되도록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했고, 그동안 친정우회로 알려졌던 이노우에 준노스케를 비롯한 관료집단의 반감과 불신을 사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내치에선 금융공황을 모라토리엄 선언으로 가라앉히고, 보통선거법을 실시했으나 안보법 등의 악법으로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 기타 반정부 운동가들을 대거 검거했다.
외교에서는 적극적인 팽창정책으로 전환하여 자신이 스스로도 외무대신을 겸직하고 정무차관으로 대중국 강경 침략론자인 모리 가쿠를 앉혔다.[4] 처음에는 다나카와 모리 둘은 잘 맞은 편이었지만, 그러나 모리의 지나친 강경론에 어느 정도는 조정의 필요성도 있다고 느끼는 다나카의 성향은 점차 대립하게 된다. 하지만 이미 모리는 상당한 세력을 얻고 있었는데, 모리 가쿠의 주도하에서 "동방 회의"가 개최되어 외무성, 육해군 등의 중국 관련 인사들을 소집하여 중국에 대한 외교 방침을 정할 정도였다. 1927년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에서 하야한 장제스가 일본을 방문하자 극진히 대접하고 자신의 사저에서 장제스-다나카 회담을 개최했으나 과거 소련이 그랬던 것처럼 국민당과 합작하여 중국의 통일을 도와달라는 장제스의 요청에는 남방의 안정에 진력하라고 답변하면서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고 장제스는 다나카가 자신을 일개 군벌 중 하나로 대한다고 크게 불쾌해했다. 이후 1928년 국민당의 2차 북벌로 일본의 조계지가 있는 산동성에 국민혁명군이 진주하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 2차 산동파병을 거행하여 제남의 장제스의 1집단군을 공격, 제남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1928년 황고둔 사건이 발생하자 초기에 관련자들에 대한 엄격한 처벌을 주장하였으나, 육군내부의 반발에 밀려 포기하였다. 그러나 제1야당인 입헌민정당이 이를 계속 공격하고 히로히토 천황까지 책임자들에 대한 처벌이 없다는 점을 들어서 "다나카를 더 이상 보지 않겠다, 다나카는 아주 싫다"는 발언을 하자 결국 1929년 7월 2일 내각총사퇴를 하면서 총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내치에선 금융공황을 모라토리엄 선언으로 가라앉히고, 보통선거법을 실시했으나 안보법 등의 악법으로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 기타 반정부 운동가들을 대거 검거했다.
외교에서는 적극적인 팽창정책으로 전환하여 자신이 스스로도 외무대신을 겸직하고 정무차관으로 대중국 강경 침략론자인 모리 가쿠를 앉혔다.[4] 처음에는 다나카와 모리 둘은 잘 맞은 편이었지만, 그러나 모리의 지나친 강경론에 어느 정도는 조정의 필요성도 있다고 느끼는 다나카의 성향은 점차 대립하게 된다. 하지만 이미 모리는 상당한 세력을 얻고 있었는데, 모리 가쿠의 주도하에서 "동방 회의"가 개최되어 외무성, 육해군 등의 중국 관련 인사들을 소집하여 중국에 대한 외교 방침을 정할 정도였다. 1927년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에서 하야한 장제스가 일본을 방문하자 극진히 대접하고 자신의 사저에서 장제스-다나카 회담을 개최했으나 과거 소련이 그랬던 것처럼 국민당과 합작하여 중국의 통일을 도와달라는 장제스의 요청에는 남방의 안정에 진력하라고 답변하면서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고 장제스는 다나카가 자신을 일개 군벌 중 하나로 대한다고 크게 불쾌해했다. 이후 1928년 국민당의 2차 북벌로 일본의 조계지가 있는 산동성에 국민혁명군이 진주하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 2차 산동파병을 거행하여 제남의 장제스의 1집단군을 공격, 제남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1928년 황고둔 사건이 발생하자 초기에 관련자들에 대한 엄격한 처벌을 주장하였으나, 육군내부의 반발에 밀려 포기하였다. 그러나 제1야당인 입헌민정당이 이를 계속 공격하고 히로히토 천황까지 책임자들에 대한 처벌이 없다는 점을 들어서 "다나카를 더 이상 보지 않겠다, 다나카는 아주 싫다"는 발언을 하자 결국 1929년 7월 2일 내각총사퇴를 하면서 총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총리에서 사임한 후인 9월 28일에 귀족원 의원 당선축하연회에 출석하였지만 병색은 완연하였고, 결국 그 다음날 협심증으로 사망하였다. 고작 3달 만이었다.
다나카의 몰락은 한때 육군을 독립적 왕국처럼 경영했던 조슈벌의 몰락을 상징하였고, 나름 다나카의 후계자 격이었던 우가키 가즈시게가 3월 사건과 우가키 군축으로 군부의 미움을 사 조선 총독으로 퇴출되면서 조슈벌은 와해되었다. 이후 조슈번이 있었던 야마구치현 출신 육군장교들은 한동안 육군대학에 입학 추천을 받지 못하는 사태까지 겪었다(...)
히로히토 천황은 단순히 총리대신을 질책한 것이 내각 총사퇴로 번졌을 뿐만 아니라 죽음으로까지 몰아버린 것에 책임을 느껴서 이후로는 정치적 현안에 대해서는 일체 발언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고 한 바 있다. 이 기록은 1990년에 발굴되고 이른바 '독백 8시간' 내지는 '쇼와천황독백록'으로 공개되면서 역사학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다만 이 '독백록'은 전후 전범재판이 열렸던 1946년에 기록된 것이고 히로히토 천황의 자기 변호 위주여서 비판적 분석이 필요하다.
진위 여부 논쟁으로 유명한 일본제국주의 방침을 나타냈다는 "다나카 상주문"을 썼다고도 한다.
장남 다나카 타츠오(田中龍夫)는 야마구치현 지사를 거쳐 자유민주당 소속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육군 출신인데도 퇴역 후에는 군복을 입지 않았다. 보통 육군 출신 정치인들은 퇴역 후에도 군복을 입는데 조금 특이한 부분.
히로히토 천황은 단순히 총리대신을 질책한 것이 내각 총사퇴로 번졌을 뿐만 아니라 죽음으로까지 몰아버린 것에 책임을 느껴서 이후로는 정치적 현안에 대해서는 일체 발언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고 한 바 있다. 이 기록은 1990년에 발굴되고 이른바 '독백 8시간' 내지는 '쇼와천황독백록'으로 공개되면서 역사학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다만 이 '독백록'은 전후 전범재판이 열렸던 1946년에 기록된 것이고 히로히토 천황의 자기 변호 위주여서 비판적 분석이 필요하다.
진위 여부 논쟁으로 유명한 일본제국주의 방침을 나타냈다는 "다나카 상주문"을 썼다고도 한다.
장남 다나카 타츠오(田中龍夫)는 야마구치현 지사를 거쳐 자유민주당 소속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육군 출신인데도 퇴역 후에는 군복을 입지 않았다. 보통 육군 출신 정치인들은 퇴역 후에도 군복을 입는데 조금 특이한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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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小澤太郎, 1906 - 1996. 자유민주당 소속 중의원 의원, 참의원 의원, 3-4대 야마구치현지사.[2] 小澤克介, 1944년생으로 아버지 타로와는 달리 자유민주당이 아닌 일본사회당 소속으로 (구) 야마구치현 제2구에서 3선 중의원 의원을 지냈으며, 1996년 야마구치현지사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현재는 입헌민주당 야마구치현 총지부연합회 고문으로 있다.[3] 이 과정에서 항구에 있던 민간인 영국인 여성이 의열단의 오발로 죽게 되었다. 의열단은 황포탄 의거에서 이중삼중으로 계획을 준비했으나 그 일로 주변이 훨씬 어수선해져서 결국 처단에 실패한다.[4] 요시다 시게루도 이 당시 외무차관으로 기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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