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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 제10·13대 내무대신 이타가키 다이스케 板垣退助 | Itagaki Taisuke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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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
사망 | |
재임기간 | 제10대 내무대신 |
제13대 내무대신 | |
일본의 정치가. 일본 최초의 근대적 정당이자 현 자민당의 전신격이 되는 자유당을 창당한 인물이다.
메이지 유신에서 활약한 유신지사이자 일본 의회의 수립을 이끈 정치인이며 자유민권운동의 중심인물이었지만, 군사를 동원해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는 초과격 정한론자였으며, 이토 히로부미와 손잡고 대한제국의 보호국화를 주도한 제2차 이토 내각을 출범시키는데 기여해 내무대신까지 올랐던 인물이다.
일본 의회 창설을 주도하고 자유민권을 위해 반 메이지 정부 활동을 벌인 정치가라는 타이틀은 화려하지만, 죽기 전까지 정한론을 고수했으며 식민지인 차별 반대도 진정한 자유 독립이 아니라 결국 식민지 상태에서의 차별 반대라는 차원을 벗어나지 못한 주장이었던 등 이토 히로부미와 결탁한 당시 일본 자유주의 운동의 한계를 보여주는 인물이다.
토사 번의 상급 무사 출신. 번주 야마우치 요도의 친(親) 도쿠가와 요시노부 행보에도 불구하고 독단적으로 삿쵸군에 가세하여, 무력 토막 운동의 핵심인 보신 전쟁에서 곤도 이사미를 격퇴하는 등 승승장구했다. 유신 후에는 참의(參議)로 신정부에 출사하였다.
1873년, 메이지 6년 정변에서 조선 출병을 바탕으로 하는 과격한 정한론을 주장했다. 두루뭉술하게 조선과의 단교 내지는 무력으로 본때를 보여야 한다는 정도의 얘기가 오가던 일본 내에서 처음으로 대대급 병력으로 부산을 점령하고 조선을 개항시키자는 상세하게 과격한 주장을 일삼아 동료 정한론자인 사이고 다카모리가 그를 뜯어말려야 했을 정도. 구미 시찰에서 귀국한 이와쿠라 도모미 등의 반대에 부딪히게 되자 사이고와 함께 하야했는데 역설적으로 이 행동이 지지를 받으면서 많은 관료가 함께 하야했고, 이들과 함께 사이고가 택했던 무력으로서의 저항과는 토사 현을 중심으로 평화적인 방법으로 메이지 정부에 대항하는 자유민권운동의 중심 인물로서 떠올랐다.
이후 1874년 국회개설 청원을 주도[3]하여 1881년 제국의회가 수립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 공적을 바탕으로 후일 '국회를 만든 남자(国会を創った男)'로 불리게 된다. 국회 탄생 이후에는 자유당을 창당하여 총리 자리에 올랐고, 기후시에서 연설 도중 암살당할 뻔하거나[4], 유럽을 방문하거나 분열로 자유당이 해산되거나 하는 우여곡절을 겪은 후 보신 전쟁에서의 공훈과 메이지 유신에 대한 공적을 바탕으로 1887년 백작위를 받아 화족의 반열에 들었다. 특권 계급이 되려고 유신을 하려고 한 게 아니라며 작위를 안 받겠다고 사작표(辞爵表), 재사작표(再辞爵表)를 냈지만, 메이지 덴노와 이토 히로부미의 의지가 확고해 이토의 의뢰를 받은 타케우치 츠나가 '삼고초려를 보듯 3회 거절은 불경하다'고 설득하자 결국 백작위를 받았다. 출사표 흉내[5]부터 삼고초려 운운까지 나온걸 보면 이토가 제갈량 구도라도 흉내내고 싶었던 모양.
참의로서 정부에 복귀한 후 정치가로서 활동하였으며 1896년에는 이토 히로부미와 손잡고 2차 이토 내각의 내정대신까지 올랐다. 이후 1900년 입헌정우회 창당과 함께 은퇴했으며, 은퇴 후에도 이런저런 정치 활동을 하면서 대만에 방문해 대만동화회의 창설에 관여했고, 유작으로 <신과 인간의 길(神と人道)>, <독론 7년(独論七年)>, <입국의 대본(立国の大本)>을 남긴 후 1919년 폐렴으로 사망했다.
이 중 <입국의 대본(立国の大本)> 14장 <일본은 침략국이 아니니(日本は侵略国にあらず)>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조선 병합에 대한 변명으로 일관되어 있다. 청이나 러시아가 조선을 점령할 경우 일본 국방에 위협이 되므로 조선이 자력으로 방위가 불가능한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예방전쟁의 개념으로 조선을 병합했다는 것인데, 사실 이는 이토 히로부미의 생각과 완벽히 일치하는 주장이다. 참으로 자유주의자스러운 주장으로[6], 말년까지도 정한론에 바탕한 사상을 갖고 있었음을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제목을 저렇게 지은 것은 자유주의자로서 그나마의 양심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결국 본질적으로는 변명에 지나지 않는 소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873년, 메이지 6년 정변에서 조선 출병을 바탕으로 하는 과격한 정한론을 주장했다. 두루뭉술하게 조선과의 단교 내지는 무력으로 본때를 보여야 한다는 정도의 얘기가 오가던 일본 내에서 처음으로 대대급 병력으로 부산을 점령하고 조선을 개항시키자는 상세하게 과격한 주장을 일삼아 동료 정한론자인 사이고 다카모리가 그를 뜯어말려야 했을 정도. 구미 시찰에서 귀국한 이와쿠라 도모미 등의 반대에 부딪히게 되자 사이고와 함께 하야했는데 역설적으로 이 행동이 지지를 받으면서 많은 관료가 함께 하야했고, 이들과 함께 사이고가 택했던 무력으로서의 저항과는 토사 현을 중심으로 평화적인 방법으로 메이지 정부에 대항하는 자유민권운동의 중심 인물로서 떠올랐다.
이후 1874년 국회개설 청원을 주도[3]하여 1881년 제국의회가 수립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 공적을 바탕으로 후일 '국회를 만든 남자(国会を創った男)'로 불리게 된다. 국회 탄생 이후에는 자유당을 창당하여 총리 자리에 올랐고, 기후시에서 연설 도중 암살당할 뻔하거나[4], 유럽을 방문하거나 분열로 자유당이 해산되거나 하는 우여곡절을 겪은 후 보신 전쟁에서의 공훈과 메이지 유신에 대한 공적을 바탕으로 1887년 백작위를 받아 화족의 반열에 들었다. 특권 계급이 되려고 유신을 하려고 한 게 아니라며 작위를 안 받겠다고 사작표(辞爵表), 재사작표(再辞爵表)를 냈지만, 메이지 덴노와 이토 히로부미의 의지가 확고해 이토의 의뢰를 받은 타케우치 츠나가 '삼고초려를 보듯 3회 거절은 불경하다'고 설득하자 결국 백작위를 받았다. 출사표 흉내[5]부터 삼고초려 운운까지 나온걸 보면 이토가 제갈량 구도라도 흉내내고 싶었던 모양.
참의로서 정부에 복귀한 후 정치가로서 활동하였으며 1896년에는 이토 히로부미와 손잡고 2차 이토 내각의 내정대신까지 올랐다. 이후 1900년 입헌정우회 창당과 함께 은퇴했으며, 은퇴 후에도 이런저런 정치 활동을 하면서 대만에 방문해 대만동화회의 창설에 관여했고, 유작으로 <신과 인간의 길(神と人道)>, <독론 7년(独論七年)>, <입국의 대본(立国の大本)>을 남긴 후 1919년 폐렴으로 사망했다.
이 중 <입국의 대본(立国の大本)> 14장 <일본은 침략국이 아니니(日本は侵略国にあらず)>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조선 병합에 대한 변명으로 일관되어 있다. 청이나 러시아가 조선을 점령할 경우 일본 국방에 위협이 되므로 조선이 자력으로 방위가 불가능한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예방전쟁의 개념으로 조선을 병합했다는 것인데, 사실 이는 이토 히로부미의 생각과 완벽히 일치하는 주장이다. 참으로 자유주의자스러운 주장으로[6], 말년까지도 정한론에 바탕한 사상을 갖고 있었음을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제목을 저렇게 지은 것은 자유주의자로서 그나마의 양심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결국 본질적으로는 변명에 지나지 않는 소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1882년~1883년 사이에 유럽 시찰을 갔을 때 일본인 최초로 루이비통 가방을 구매했다고 한다.
- 암살범에게 피습을 당했을 때 '이타가키는 죽어도 자유는 죽지 않는다'는 명언을 했으나 죽지는 않았다.
- 1990년 방영된 대하드라마 나는 듯이에서 사이토 요스케가 연기했다. 2013년 방영된 대하드라마 야에의 벚꽃에서 가토 마사야가 연기했으며, 2018년 방영된 대하드라마 세고돈에서는 시부카와 키요히코가 연기했다.

▲ 가토 마사야가 연기한 이타가키 다이스케▲ 시부카와 키요히코가 연기한 이타가키 다이스케 - 소설 조선, 혁명의 시대에선 일본 자유 민권론자로 언급된다. 김옥균을 지원하여 조선에 연속혁명을 일으켜서 일본의 민권과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시도한다.
- 만화 바람의 검심 -메이지 검객 낭만기-에서 켄신 일행에 빨간 기와에서 처음 사가라 사노스케와 만난 에피소드에서 가게 안에서 술에 취해 격론을 벌이던 자유민권운동가 사이에서도 그 이름이 언급된다.
[1] 사후 추서(1919년)[2] 보신 전쟁의 공으로 토사 번주 야마우치 토요노리에게 하사받았다.[3] 이 청원 자체는 각하당했다.[4] 이때 치료를 맡은 것이 후일 거물 정치인으로 성장하게 되는 고토 신페이였다고.[5] 출사표는 2편 있어서, 보통 '전출사표'와 '후출사표'로 구분한다. 그냥 작위 거절 표문을 연거푸 올렸다고 하면 되는 것을 굳이 '재사작표'라고 칭해 남긴 것을 보면 출사표의 흉내가 분명하다.[6] 사실 자유주의를 표방하던 사람들 중 제국주의 내지는 억압적 정치체제를 옹호한 사람들이 적지는 않은데, 대표적으로 존 로크의 경우 노비제를 제한적으로나마 옹호했고, 존 스튜어트 밀도 영국의 제국주의를 옹호한 바 있다. 아니 아예 밀 같은 경우는 영국 동인도회사 직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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