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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7ㆍ8ㆍ9ㆍ10대 국회의원 윤인식 尹仁植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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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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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
의원 선수 | 4 |
의원 대수 | |
1923년 9월 3일 전라남도 함평군 대동면 상옥리 옥동마을에서 함평의 첫 복음 전도자 중 한명인 파평 윤씨 윤태언(尹泰彦)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중앙신학교 사회사업과를 졸업하였다.
1952년 지방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함평군 2선거구[2]에 출마하여 전남도의원에 당선되었다.
1952년 도의원 당선 후, 함평읍에 동생인 윤한식 옥동교회 장로[3]와 함께 전쟁고아 보호를 목적으로 보육원인 삼애원[4]을 설립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전라남도 함평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김의택 후보에 밀려 2위로 낙선하였다.
1956년 지방선거에서도 자유당 후보로 함평군 2선거구[5]에 출마하여 전남도의원에 다시 당선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 전라남도의회 부의장을 역임하였다.
4.19 혁명 이후에는 공민권을 제한받는 정치활동 규제를 받기도 했으나 1963년 민주공화당에 입당하여 민주공화당 전남 18지구당(영광,함평)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또한, 민주공화당 전남도당 부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에 전라남도 함평군-영광군 선거구 공천을 신청했지만, 정헌조에 밀려 탈락하였다. 1966년에는 국가조찬기도회 창설 멤버로 활동하였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전라남도 함평군-영광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지역의 거물인 신민당 조영규 후보를 압도적인 큰 표차로 꺾고 당선되었다. 함평군에서는 불과 한달 전 대선에서 공화당 박정희 후보가 신민당 윤보선 후보에 근소하게 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무려 약 74프로를 득표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후 한국사회복지협의회장을 역임하였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전라남도 함평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신민당 이진연 후보와 치열한 접전을 벌인 끝에 당선되었다. 이후 민주공화당 중앙위원회 부의장을 역임하였다. 또한, 민주공화당 국토통일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전라남도 함평군-영광군-장성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같은 함평출신 신민당 이진연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74년 9월 차지철이 대통령경호실장에 임명되어 국회의원직을 사임하면서 후임 대한민국 국회 내무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76년 대한민국 국회 문교공보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유신정우회 국회의원이 되었다.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국국민당 후보로 전라남도 함평군-영광군-장성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정의당 조기상 후보와 신정당 이원형 후보에 밀려 4위로 낙선하였다.[6] 이후 한국국민당 부총재직과 함평군-영광군-장성군 지구당위원장 직을 사퇴, 정계를 은퇴하였다. 그 후 선교 활동에 전념하였다.
2000년 아프리카 지방 선교를 다녀온 후 본인의 대치동 자택에서 갑작스럽게 폐럼으로 인해 별세하였다. 이후 고향마을 선영에 세상을 먼저 떠난 부인과 합장되었다.
1952년 지방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함평군 2선거구[2]에 출마하여 전남도의원에 당선되었다.
1952년 도의원 당선 후, 함평읍에 동생인 윤한식 옥동교회 장로[3]와 함께 전쟁고아 보호를 목적으로 보육원인 삼애원[4]을 설립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전라남도 함평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김의택 후보에 밀려 2위로 낙선하였다.
1956년 지방선거에서도 자유당 후보로 함평군 2선거구[5]에 출마하여 전남도의원에 다시 당선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 전라남도의회 부의장을 역임하였다.
4.19 혁명 이후에는 공민권을 제한받는 정치활동 규제를 받기도 했으나 1963년 민주공화당에 입당하여 민주공화당 전남 18지구당(영광,함평)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또한, 민주공화당 전남도당 부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에 전라남도 함평군-영광군 선거구 공천을 신청했지만, 정헌조에 밀려 탈락하였다. 1966년에는 국가조찬기도회 창설 멤버로 활동하였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전라남도 함평군-영광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지역의 거물인 신민당 조영규 후보를 압도적인 큰 표차로 꺾고 당선되었다. 함평군에서는 불과 한달 전 대선에서 공화당 박정희 후보가 신민당 윤보선 후보에 근소하게 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무려 약 74프로를 득표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후 한국사회복지협의회장을 역임하였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전라남도 함평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신민당 이진연 후보와 치열한 접전을 벌인 끝에 당선되었다. 이후 민주공화당 중앙위원회 부의장을 역임하였다. 또한, 민주공화당 국토통일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전라남도 함평군-영광군-장성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같은 함평출신 신민당 이진연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74년 9월 차지철이 대통령경호실장에 임명되어 국회의원직을 사임하면서 후임 대한민국 국회 내무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76년 대한민국 국회 문교공보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유신정우회 국회의원이 되었다.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국국민당 후보로 전라남도 함평군-영광군-장성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정의당 조기상 후보와 신정당 이원형 후보에 밀려 4위로 낙선하였다.[6] 이후 한국국민당 부총재직과 함평군-영광군-장성군 지구당위원장 직을 사퇴, 정계를 은퇴하였다. 그 후 선교 활동에 전념하였다.
2000년 아프리카 지방 선교를 다녀온 후 본인의 대치동 자택에서 갑작스럽게 폐럼으로 인해 별세하였다. 이후 고향마을 선영에 세상을 먼저 떠난 부인과 합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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