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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3년 18세 시절에 그려진 초상화 | ||||||||||||||||||
출생 | ||||||||||||||||||
사망 | ||||||||||||||||||
재위기간 | 그리스 국왕 | |||||||||||||||||
재임기간 | 제12대 총리 | |||||||||||||||||
제14대 총리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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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그리스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나 오스만을 약화시키기 위한 열강의 지원으로 인해 갓 독립된 그리스 왕국의 초대 국왕이 되었다. 그는 그리스와 어떤 관계도 없는 바이에른 왕국 왕자였으나, 당시 영국, 프랑스, 러시아 세 강대국 모두 서로의 왕실에게 그리스를 넘겨주기 싫어서 갈등하는 사이, 열혈 필헬레니즘 추종자였던 아버지 루트비히 1세가 비텔스바흐 가문이 그리스의 왕좌를 책임지겠다고 나섰고, 그리스를 계륵으로 여겼던 당시 강대국들이 이를 지지하면서 순 어부지리로 그리스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이다. 그래도 당시 그리스 민중들은 독일에 대해 별 감정이 없었을 뿐더러, 오히려 루트비히 1세가 그리스 독립 전쟁을 지원한 걸 긍정적으로 여겼기 때문에 처음엔 제법 환영을 받았는데,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바이에른 왕국 출신 섭정들이 섭정을 맡았고, 그리스 전역에 학교와 병원을 설립시키는 등의 일부 업적은 있었다. 그러나 섭정들은 그리스의 현실과 맞지 않은 정책들을 시행했고, 긴축정책을 주창하면서 세금을 올려 오스만 치하보다도 과중한 세금을 부과한데다가, 독립전쟁 영웅들에게까지 사형선고를 남발하는 악정을 펼치다가 오톤에 의해 해임되었다.
오톤은 1835년에 직접 통치에 나섰다. 하지만 직접 통치에 나선 오톤 역시 능력이 썩 좋지 않았고, 헌법 제정을 뒤로 미루면서 영토 확장 및 토목공사에 매진하는 모습을 보였다. 1843년에 그리스인들의 불만이 끓어오르기 시작했고, 군대 역시 반발을 하면서 상황이 심삼치 않게 돌아가자, 결국 압력에 굴복하여 헌법제정을 하였다. 이를 1843년 혁명이라고 한다.
그러나 오톤은 의회를 무시하고 내정에 지속해서 개입하는 방식으로 권위주의적인 통치를 계속해서 벌여나갔기에, 그리스에서 인기는 그야말로 바닥이었다. 종교부터도 인구 대다수가 그리스 정교회를 믿는 그리스인과 달리 오톤은 가톨릭을 믿었고 끝까지 개종을 거부했다.
결국, 고대 그리스와 동로마 제국의 옛 땅과 영광을 되찾겠답시고 참전한 크림 전쟁에서 그리스는 러시아 제국에 줄을 서는 바람에, 러시아의 적인 영국군의 공격으로 큰 피해를 당해야 했다. 이로 인해 많은 배상금을 물어주고 그리스 항구도시 주둔권 및 여러 권리를 영국에게 넘겨준 여파로 안 그래도 바닥이던 인기는 사라질 지경이었다. 1861년의 암살 시도는 간신히 넘겼지만 1862년에 오톤이 지방으로 순방에 나서는 동안 아테네에선 국왕 퇴위 요구 시위가 일어났고, 군대마저 이를 지지하며 의회는 오톤의 탄핵을 선언했다. 결국 왕과 왕비는 다시는 아테네로 돌아오지 못하고 바이에른 왕국으로의 망명길에 올랐다.
오톤은 자식을 낳으면 그 아이만큼은 반드시 그리스 정교회를 믿게 하겠다고 공언하여 현지 민심을 무마하고 있었으나, 아말리 왕비와의 사이에선 당대 의학은 물론 온갖 미신까지 총 동원해도 단 한 명의 자식조차 보지 못했다. 본토의 비텔스바흐 친인척들마저, 차기 그리스 군주는 반드시 정교회 신자가 되어야 한다는 조항 때문에 그리스의 왕위를 이어받거나 자식을 오톤의 양자로 보내는 것을 거부하였다. 결국 오톤이 폐위되면서 그리스 비텔스바흐 왕조는 폐지되었고, 덴마크 왕국의 제안으로 그리스의 왕가는 글뤽스부르크 왕가로 교체되었다. 그가 얼마나 그리스인에게 미움을 받았던지 1863년 그리스 새 국왕을 뽑는 국민투표에서는 24만 1202표 가운데 1표만이 그의 복위를 바란다는 굴욕을 당하기도 했다.
이후 오톤은 고국인 바이에른 왕국으로 돌아와 뮌헨과 밤베르크를 오가며 지내다 사망한다. 비록 혈통적으로도 그리스인이 아니었고, 그리스 본토에서 지독하게 인기가 없었던 인물이었지만, 정작 오톤은 열혈 필헬레니즘 주의자였고 스스로 그리스인임을 자부했다. 오톤은 말년 거처인 밤베르크에서도 그리스어를 사용하며, 그리스의 전통 복장을 입고 지내며 그리스 문화를 전파했고, 홍역을 앓다 사망하기 직전에도 "Griechenland, mein Griechenland, mein liebes Griechenland(그리스, 나의 그리스, 내 사랑하는 그리스)." 라는 유언을 남기며 남은 전 재산을 그리스 국고에 기부하도록 하는 등 애처로운 짝사랑을 이어갔다.[1] 이 때문에 민심이 바닥을 쳤던 19세기 당대와는 달리, 현대 그리스에서는 오톤이 암군이었다는 건 인정하면서도, 아테네 시를 그리스의 수도로 재정비한 것과 같은 근대화 관련 업적, 그리고 그리스에 대한 애정만큼은 재평가하는 분위기다. 1990년대 이미 그리스 정부 대표단이 뮌헨에 안장된 오톤의 관에 정식 성묘했고, 2009년 실시된 위대한 그리스인 100인 투표에서는 무려 솔론과 헤로도토스를 제치고 오톤이 65위에 선정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오톤은 1835년에 직접 통치에 나섰다. 하지만 직접 통치에 나선 오톤 역시 능력이 썩 좋지 않았고, 헌법 제정을 뒤로 미루면서 영토 확장 및 토목공사에 매진하는 모습을 보였다. 1843년에 그리스인들의 불만이 끓어오르기 시작했고, 군대 역시 반발을 하면서 상황이 심삼치 않게 돌아가자, 결국 압력에 굴복하여 헌법제정을 하였다. 이를 1843년 혁명이라고 한다.
그러나 오톤은 의회를 무시하고 내정에 지속해서 개입하는 방식으로 권위주의적인 통치를 계속해서 벌여나갔기에, 그리스에서 인기는 그야말로 바닥이었다. 종교부터도 인구 대다수가 그리스 정교회를 믿는 그리스인과 달리 오톤은 가톨릭을 믿었고 끝까지 개종을 거부했다.
결국, 고대 그리스와 동로마 제국의 옛 땅과 영광을 되찾겠답시고 참전한 크림 전쟁에서 그리스는 러시아 제국에 줄을 서는 바람에, 러시아의 적인 영국군의 공격으로 큰 피해를 당해야 했다. 이로 인해 많은 배상금을 물어주고 그리스 항구도시 주둔권 및 여러 권리를 영국에게 넘겨준 여파로 안 그래도 바닥이던 인기는 사라질 지경이었다. 1861년의 암살 시도는 간신히 넘겼지만 1862년에 오톤이 지방으로 순방에 나서는 동안 아테네에선 국왕 퇴위 요구 시위가 일어났고, 군대마저 이를 지지하며 의회는 오톤의 탄핵을 선언했다. 결국 왕과 왕비는 다시는 아테네로 돌아오지 못하고 바이에른 왕국으로의 망명길에 올랐다.
오톤은 자식을 낳으면 그 아이만큼은 반드시 그리스 정교회를 믿게 하겠다고 공언하여 현지 민심을 무마하고 있었으나, 아말리 왕비와의 사이에선 당대 의학은 물론 온갖 미신까지 총 동원해도 단 한 명의 자식조차 보지 못했다. 본토의 비텔스바흐 친인척들마저, 차기 그리스 군주는 반드시 정교회 신자가 되어야 한다는 조항 때문에 그리스의 왕위를 이어받거나 자식을 오톤의 양자로 보내는 것을 거부하였다. 결국 오톤이 폐위되면서 그리스 비텔스바흐 왕조는 폐지되었고, 덴마크 왕국의 제안으로 그리스의 왕가는 글뤽스부르크 왕가로 교체되었다. 그가 얼마나 그리스인에게 미움을 받았던지 1863년 그리스 새 국왕을 뽑는 국민투표에서는 24만 1202표 가운데 1표만이 그의 복위를 바란다는 굴욕을 당하기도 했다.
이후 오톤은 고국인 바이에른 왕국으로 돌아와 뮌헨과 밤베르크를 오가며 지내다 사망한다. 비록 혈통적으로도 그리스인이 아니었고, 그리스 본토에서 지독하게 인기가 없었던 인물이었지만, 정작 오톤은 열혈 필헬레니즘 주의자였고 스스로 그리스인임을 자부했다. 오톤은 말년 거처인 밤베르크에서도 그리스어를 사용하며, 그리스의 전통 복장을 입고 지내며 그리스 문화를 전파했고, 홍역을 앓다 사망하기 직전에도 "Griechenland, mein Griechenland, mein liebes Griechenland(그리스, 나의 그리스, 내 사랑하는 그리스)." 라는 유언을 남기며 남은 전 재산을 그리스 국고에 기부하도록 하는 등 애처로운 짝사랑을 이어갔다.[1] 이 때문에 민심이 바닥을 쳤던 19세기 당대와는 달리, 현대 그리스에서는 오톤이 암군이었다는 건 인정하면서도, 아테네 시를 그리스의 수도로 재정비한 것과 같은 근대화 관련 업적, 그리고 그리스에 대한 애정만큼은 재평가하는 분위기다. 1990년대 이미 그리스 정부 대표단이 뮌헨에 안장된 오톤의 관에 정식 성묘했고, 2009년 실시된 위대한 그리스인 100인 투표에서는 무려 솔론과 헤로도토스를 제치고 오톤이 65위에 선정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오톤 (Όθων) | |||
팔츠줄츠바흐의 마리아 프란치스카 여백작 (Maria Franziska von Pfalz-Sulzbach) | |||
헤센다름슈타트의 아우구스타 빌헬미네 (Augusta Wilhelmine von Hessen-Darmstadt) | |||
헤센다름슈타트 공작 게오르크 빌헬름 (Georg Wilhelm von Hessen-Darmstadt) | |||
라이닝겐닥스부르크팔켄부르크의 마리아 루이제 (Maria Luise von Leiningen-Dagsburg-Falkenburg) | |||
작센힐드부르크하우젠 공작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3세 (Ernst Friedrich III von Saxe-Hildburghausen) | |||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의 에르네스티네 (Ernestine von Saxe-Weimar-Eisenach) | |||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샤를로테 게오르기네 (Charlotte Georgine von Mecklenburg-Strelitz) | |||
헤센다름슈타트의 프레데리케 (Frederike von Hessen-Darmstadt) |

- 건축과 예술을 사랑한 왕인 그 유명한 루트비히 2세의 삼촌이기도 하다. 올덴부르크의 아말리와의 사이에 자녀는 없었다. 만약 오톤이 국왕의 신분으로 사망하여 그리스 비텔스바흐 왕조가 계속 이어졌다면 오톤의 동생인 루이트폴트 폰 바이에른이 오톤의 뒤를 이어 그리스 왕위에 올랐을 가능성이 높다.[2] 바이에른 국왕 오토가 폐위된 후 즉위한 루트비히 3세가 루이트폴트의 장남이므로, 이론상으로는 루트비히 3세의 후손이며 현 바이에른 왕위 요구자인 프란츠 폰 바이에른이 프랑기스코스[3] 왕으로서 그리스 비텔스바흐 왕조의 적법한 왕위 요구자가 된다.
- 현재 그리스의 의사당인 그리스 고궁은 원래 그를 위해 지어진 건물이다.
- 재위 중인 1837년에는 오늘날의 아테네 국립 카포디스트리아스 대학교를 설립했다.
- 재위 중 그리스의 제12대 총리, 제14대 총리를 겸직했다.
- 본명은 오토(Otto)이나 그리스어 표기인 오톤(Othon)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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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톤의 사망 당시 그리스 정부는 오톤의 기부금은 쓱싹하면서도, 오톤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질까봐 두려워 이 사실을 민중에겐 비밀로 부쳤다.[2] 당시 그리스 헌법상 오톤의 형제와 그 자손들도 왕위 계승권이 있었기에, 오톤에게 아들이 없는 상황에서는 오톤의 동생 루이트폴트가 추정상속인이었다. 그러나 이 헌법에 따르면 오톤의 후계자는 반드시 정교회 신자여야 했는데, 루이트폴트가 이 조건 때문에 오톤의 후계자가 되기를 거부하고 다른 형제들도 마찬가지로 상속을 거부하면서 후계구도가 붕 떠버린 것이다. 공화정 전환은 당시 그리스인 절대다수가 왕정을 선호해서 힘을 얻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열강의 조정에 의해 요르요스 1세가 차기 국왕으로 선출되었다.[3] 독일어권의 프란츠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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