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창규(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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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
사망 | |
본관 | |
부모 | 박현배(1871) |
자녀 | 장남 박영추(1908) |
직업 | 독립운동가 |
상훈 | 건국포장 |
1892년 8월 17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안동면(安東面) 송현동(松峴洞)에서 태어났다. 농업에 종사하면서, 1920년 흠치교(吽哆敎)에 입교하여 활동하다가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흠치교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 이후 급진적 성격을 지닌 강일순을 중심으로 시작된 신종교운동의 하나였다. 이후 차경석이 교주가 되어 교단을 이끌었다. 흠치교는 “종교를 표방해 치성비라고 하는 군자금을 모집하고 다수의 교인 집단을 만들어 1924년 갑자년을 기하여 국외에서 이미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다른 독립결사단과 호응하여 한국 독립운동을 개시할 것”이라며 선전해 자금모집과 교단 성장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흠치교는 교주 아래로 60인의 고문을 두고 각 고문은 6인조를 두고 6인조는 다시 각 12인조, 12인조는 각 8인조, 8인조는 각 15인조 등 순서를 통해 전국적으로 대규모의 조직을 갖출 수 있었다. 또한 각 조직별로 치성비라는 이름으로 6인조는 30원, 12인조는 15원, 8인조는 10원, 15인조는 5원을 거두어 종교 행사비를 충당하고 나머지는 본부로 보내 독립운동 자금으로 활용하였다.
박창규는 1920년 음 5월경 서후면 교동 권영묵(權寧黙)의 집에서 일심동체를 맹세하고, 이남호(李南鎬)·김구현(金龜顯)과 함께 12인조의 신도로 가입하였다. 이후 주변 일대에 거주하는 인사들을 대상으로 한국의 독립은 반드시 이루어 질 것이라는 점을 설득하여 흠치교에 가입하게 했으며 이때 권영묵(權寧黙)으로부터 교첩을 받고, 치성비 15원을 기부하였다. 교도를 조직하고 독립자금을 모집했다는 죄목으로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1921년 7월 11일 박창규는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소위 ‘1919년 제령 제7호(정치범처벌령)’ 위반으로 징역 2년(미결구류 120일 통산)을 선고받고 항소하였으나, 11월 2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 판결이 나왔다. 그러나 다시 상고하였으나 1922년 2월 27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었다. 1923년 7월 1일 안동감옥소에서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가 10개월 후 사망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흠치교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 이후 급진적 성격을 지닌 강일순을 중심으로 시작된 신종교운동의 하나였다. 이후 차경석이 교주가 되어 교단을 이끌었다. 흠치교는 “종교를 표방해 치성비라고 하는 군자금을 모집하고 다수의 교인 집단을 만들어 1924년 갑자년을 기하여 국외에서 이미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다른 독립결사단과 호응하여 한국 독립운동을 개시할 것”이라며 선전해 자금모집과 교단 성장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흠치교는 교주 아래로 60인의 고문을 두고 각 고문은 6인조를 두고 6인조는 다시 각 12인조, 12인조는 각 8인조, 8인조는 각 15인조 등 순서를 통해 전국적으로 대규모의 조직을 갖출 수 있었다. 또한 각 조직별로 치성비라는 이름으로 6인조는 30원, 12인조는 15원, 8인조는 10원, 15인조는 5원을 거두어 종교 행사비를 충당하고 나머지는 본부로 보내 독립운동 자금으로 활용하였다.
박창규는 1920년 음 5월경 서후면 교동 권영묵(權寧黙)의 집에서 일심동체를 맹세하고, 이남호(李南鎬)·김구현(金龜顯)과 함께 12인조의 신도로 가입하였다. 이후 주변 일대에 거주하는 인사들을 대상으로 한국의 독립은 반드시 이루어 질 것이라는 점을 설득하여 흠치교에 가입하게 했으며 이때 권영묵(權寧黙)으로부터 교첩을 받고, 치성비 15원을 기부하였다. 교도를 조직하고 독립자금을 모집했다는 죄목으로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1921년 7월 11일 박창규는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소위 ‘1919년 제령 제7호(정치범처벌령)’ 위반으로 징역 2년(미결구류 120일 통산)을 선고받고 항소하였으나, 11월 2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 판결이 나왔다. 그러나 다시 상고하였으나 1922년 2월 27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었다. 1923년 7월 1일 안동감옥소에서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가 10개월 후 사망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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