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병두는 1883년 10월 17일 전라남도 순천군 서면 판교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23년 친일 지주와 고육 소작료 부관 및 소작권 이동에 시달리는 농민들을 위해 전남 순천군 서면청년회 부회장, 순천군농민연합 집행위원 등을 역임하며 농민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여수, 광양, 보성군의 농민운동 지도자들과 연계하여 남선농민연맹(南鮮農民聯盟)을 조직하고 선전부 위원 및 상무집행위원으로 활동하며 순천 지역 농민·청년운동을 주도하다가 1924년 경찰에 체포되어 상당기간 옥고를 치렀다. 또한 1924년에는 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이 결성될 때 참가하여 상무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5년 순천군수의 향교토지 소작료에 대한 횡포를 규탄하며 농민들을 주도하여 시위행진을 전개하였고, ‘화요회(火曜會)’가 주도한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全朝鮮民衆運動者大會)의 준비위원에 선정되었으며,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이 수립되자 이에 가입하여 순천 야체이카 소속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1926년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에 휘말려 체포되었고, 징역 1년을 선고받아 수감된 뒤 출옥 후인 1930년부터 1932년까지 전남순천농민조합(全南順天農民組合) 위원장을 맡아 항일농민운동을 주도하다 두 차례 검거되었다.
1931년 7월 1일 진주고등보통학교 독서회 소속으로 활동하다가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정재순(鄭在淳)‧윤봉곤(尹奉坤) 등과 함께 진주검사국에 보내져 며칠간 취조받기도 했으며, 1935년에는 아동보호회에 천여 평의 땅을 기부했다. 1936년 1월 10일 거듭된 옥고와 고문의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박병두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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