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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S 헨리 캐번디시 Henry Cavendish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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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
사망 | |
국적 | |
부모 | |
직업 | 과학자 |
분야 | |
수상 | |
종교 | |
헨리 캐번디시(Henry Cavendish)는 제2대 데번셔 공작(Duke of Devonshire) 윌리엄 캐번디시(William Cavendish)의 3남 찰스 캐번디시 경(Lord Charles Cavendish)과 제1대 켄트 공작(1st Duke of Kent) 헨리 그레이(Henry Grey)[4]의 4녀 앤 그레이(Lady Anne Grey) 사이의 2명의 아들 중 장남으로 프랑스의 니스에서 태어났다. 1742년부터 런던 해크니의 뉴컴 스쿨(Newcome's School)에서 학업을 시작했으며 1810년 2월 24일 클래팜 타운(Clapham Town)에서 사망하기 까지 영국에서 화학과 물리학 실험 연구에 생애를 바쳤다.
즉 헨리 캐번디시는 친가와 외가 모두 공작위를 보유하고 있는 대귀족 집안 출신에, 6개의 성과 8개의 별장을 보유했고 재산이 수조 원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부자였다. 게다가 캐번디시의 외삼촌이 후손을 남기지 않고 일찍 죽어서 외갓집 재산의 상당량도 물려받았다.[5] 막대한 유산 덕에 돈이 넘쳐날 정도로 부자라서, 거액의 돈이나 비싼 선물을 지인들에게 거리낌없이 주기 일쑤였다고 한다.
프랑스 물리학자이던 장바티스트 비오는 캐번디시를 "모든 학자들 중에서 가장 부유하고 부자들 중에서 가장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라고 부르며 그 능력을 칭송했는데 그가 부자라는 게 프랑스나 다른 유럽 학자들에게도 워낙 잘 알려져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오죽하면 헨리 캐번디시의 예금을 맡고 있던 은행에서 너무 큰 돈을 예치하고만 있기가 미안해서, '예금의 일부를 투자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고했으나[6] 헨리는 무슨 뜻인지 몰라 당황하면서 도리어 화를 냈다고 한다. 보통 이렇게 돈이 많으면 흥청망청 사치를 부리고 주색잡기에 몰두한다는 편견[7]이 있지만 헨리 캐번디시는 그러지 못했다.
그는 지나치게 내성적인 성격과 심한 여성공포증 탓에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어느 정도로 심했냐면 하녀들이 자신의 방에 절대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마주치지 않게끔 하녀들이 다니는 계단을 따로 만들었고 모든 의사소통을 쪽지로 처리했다. 더욱이 어느 하녀가 자기 얼굴을 보자 바로 해고했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게이였냐면 그것도 아니다. 남자들도 자기한테 가까이 다가오는 걸 싫어해서 오로지 은둔형 폐인으로 화학연구에 전념했다.
한번은 오스트리아에서 헨리의 추종자가 그를 만난 감격을 나타내자 그대로 도주했다. 그에게 연구 결과를 인정받으려면 근처에서 아무도 없는 척하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려야 했을 정도다. 그러나 그래봤자 대부분 도주했으며 심지어 캐번디시가 초상화 그릴 때 화가를 만나는 것조차도 부끄러워했다. 결국 화가는 어쩔 수 없이 대충 몸만 스케치하고 얼굴은 기억해 두었다가 집에 가서 따로 그렸다는 얘기가 있다.[8]
이렇게 사람 만나는 것도 돈 쓰는 것도 싫어했던 그에게 있어서 취미라 할 만한 것은 적당히 맛있는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원하는 실험 장비와 온갖 책자를 풍족하게 사는 정도가 전부였다.[9] 이에 그가 자폐증이나 아스퍼거 증후군 환자라는 분석도 있다. 이 때문에 유일한 사회적 활동이 왕립 사교 클럽에서 같이 식사하는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도 다른 회원들이랑 이야기를 나눌때도 똑같이 내가 없는 것처럼 날 보지 말라고 당부하고 말했을 정도였다.
1766년 코플리 메달을 수상했지만 공동으로 받은 에드워드 허시 델라발(1729~1814)이나 윌리엄 브라운리그(1711~1800)는 시상식에 참여했지만 역시나 그는 불참했다.
죽을 때도 엄청난 재산이 남아 있었지만, 그다지 아까워하지 않았고 유언은커녕 그 흔한 유언장도 남기지 않았다. 늘그막에 누군가가 유산 상속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면 "그냥 상속받을 친척들이 알아서 나눠받아라. 난 뭐라고 한들 아쉬울 것도, 상관할 것도 없다."라고 밝혀왔기에 사후 그의 유산은 친척들에게 법에 따라 분배되었다고 한다.
즉 헨리 캐번디시는 친가와 외가 모두 공작위를 보유하고 있는 대귀족 집안 출신에, 6개의 성과 8개의 별장을 보유했고 재산이 수조 원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부자였다. 게다가 캐번디시의 외삼촌이 후손을 남기지 않고 일찍 죽어서 외갓집 재산의 상당량도 물려받았다.[5] 막대한 유산 덕에 돈이 넘쳐날 정도로 부자라서, 거액의 돈이나 비싼 선물을 지인들에게 거리낌없이 주기 일쑤였다고 한다.
프랑스 물리학자이던 장바티스트 비오는 캐번디시를 "모든 학자들 중에서 가장 부유하고 부자들 중에서 가장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라고 부르며 그 능력을 칭송했는데 그가 부자라는 게 프랑스나 다른 유럽 학자들에게도 워낙 잘 알려져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오죽하면 헨리 캐번디시의 예금을 맡고 있던 은행에서 너무 큰 돈을 예치하고만 있기가 미안해서, '예금의 일부를 투자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고했으나[6] 헨리는 무슨 뜻인지 몰라 당황하면서 도리어 화를 냈다고 한다. 보통 이렇게 돈이 많으면 흥청망청 사치를 부리고 주색잡기에 몰두한다는 편견[7]이 있지만 헨리 캐번디시는 그러지 못했다.
그는 지나치게 내성적인 성격과 심한 여성공포증 탓에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어느 정도로 심했냐면 하녀들이 자신의 방에 절대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마주치지 않게끔 하녀들이 다니는 계단을 따로 만들었고 모든 의사소통을 쪽지로 처리했다. 더욱이 어느 하녀가 자기 얼굴을 보자 바로 해고했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게이였냐면 그것도 아니다. 남자들도 자기한테 가까이 다가오는 걸 싫어해서 오로지 은둔형 폐인으로 화학연구에 전념했다.
한번은 오스트리아에서 헨리의 추종자가 그를 만난 감격을 나타내자 그대로 도주했다. 그에게 연구 결과를 인정받으려면 근처에서 아무도 없는 척하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려야 했을 정도다. 그러나 그래봤자 대부분 도주했으며 심지어 캐번디시가 초상화 그릴 때 화가를 만나는 것조차도 부끄러워했다. 결국 화가는 어쩔 수 없이 대충 몸만 스케치하고 얼굴은 기억해 두었다가 집에 가서 따로 그렸다는 얘기가 있다.[8]
이렇게 사람 만나는 것도 돈 쓰는 것도 싫어했던 그에게 있어서 취미라 할 만한 것은 적당히 맛있는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원하는 실험 장비와 온갖 책자를 풍족하게 사는 정도가 전부였다.[9] 이에 그가 자폐증이나 아스퍼거 증후군 환자라는 분석도 있다. 이 때문에 유일한 사회적 활동이 왕립 사교 클럽에서 같이 식사하는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도 다른 회원들이랑 이야기를 나눌때도 똑같이 내가 없는 것처럼 날 보지 말라고 당부하고 말했을 정도였다.
1766년 코플리 메달을 수상했지만 공동으로 받은 에드워드 허시 델라발(1729~1814)이나 윌리엄 브라운리그(1711~1800)는 시상식에 참여했지만 역시나 그는 불참했다.
죽을 때도 엄청난 재산이 남아 있었지만, 그다지 아까워하지 않았고 유언은커녕 그 흔한 유언장도 남기지 않았다. 늘그막에 누군가가 유산 상속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면 "그냥 상속받을 친척들이 알아서 나눠받아라. 난 뭐라고 한들 아쉬울 것도, 상관할 것도 없다."라고 밝혀왔기에 사후 그의 유산은 친척들에게 법에 따라 분배되었다고 한다.
라부아지에와 동시대에 산 엄청난 부자 화학자이며, 둘 다 화학사에 큰 공로를 세웠다. 그는 라부아지에를 살리기 위해 프랑스 혁명정부에 막대한 돈을 지불하겠다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프랑스 혁명정부가 라부아지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그를 영국으로 와서 살게 할 것이고 그 모든 비용은 자신이 부담하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모두 거부당하고 라부아지에는 결국 참수당하고 말았다 사실 라부아지에는 화학자이기 이전에 징세업자로서 당대 프랑스 국민들에게 원성을 산 탐관오리였으므로, 그 누가 구명해도 살아남기는 어려웠다.
한편 동시대에 살던 진보적인 화학자 조지프 프리스틀리가 프랑스 혁명을 옹호하다가 왕당파에게 죽을 뻔해서 미국으로 망명할 때 그 모든 자금과 생활비를 지원한 것도 캐번디시였다. 그의 생활상을 봐도 골수 왕당파는 절대 아니었고 영국 정치 상황에 끼어드는 일도 없었고 남에게 뭐라고 하지 않았기에 꼭 이념이라고 하기에는 어렵다. 캐번디시는 정치적인 부분엔 무관심했고 단지 같은 학자라는 동료 의식으로 과학자들을 도왔다는 게 정설이다. 그의 생활을 보면 이해가 갈 듯 하다.
캐번디시의 가장 유명한 업적 중 하나는 지구의 질량을 계산한 것이다. 1797년에서 1798년 동안 이루어진 이 실험은 당시로서는 굉장히 정밀하고 섬세한 조건이 요구되었었고[10], 이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 집안에 두께 60cm짜리 헛간을 지어야 했다. 이렇게 해서 계산된 지구의 질량은 장장 97년 동안 바뀌지 않았으며 최근의 결과와도 큰 오차가 없다고 한다. 그리고 열기구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 대기 표본을 채취한 최초의 과학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의 성격은 과학사에서는 여러 모로 아쉬움을 남겼다. 그는 물이 산소와 수소로 이루어진다는 사실과 각종 원소들은 물론 쿨롱 법칙과 옴의 법칙 등을 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발표를 안 해서 그 영광을 각각 발견한 것으로 알려진 여러 과학자들이 가져갔다. 전해지는 얘기로는 그가 죽은 뒤에 책상 서랍을 뒤지니 평생에 걸쳐 구해온 자료들이 꽁꽁 숨겨져 있었다고 한다. 헨리가 그런 데에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는 건 그의 성격을 볼 때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특히 그의 자폐 스펙트럼 설이 사실이라면 자신이 먼저 발견해놓고, 발표를 하지 않은 건 일반인 입장에선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어쨌든 이 같은 성격에도 불구하고 과학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건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이 그의 논문들을 파헤친 덕이었다.
한편 동시대에 살던 진보적인 화학자 조지프 프리스틀리가 프랑스 혁명을 옹호하다가 왕당파에게 죽을 뻔해서 미국으로 망명할 때 그 모든 자금과 생활비를 지원한 것도 캐번디시였다. 그의 생활상을 봐도 골수 왕당파는 절대 아니었고 영국 정치 상황에 끼어드는 일도 없었고 남에게 뭐라고 하지 않았기에 꼭 이념이라고 하기에는 어렵다. 캐번디시는 정치적인 부분엔 무관심했고 단지 같은 학자라는 동료 의식으로 과학자들을 도왔다는 게 정설이다. 그의 생활을 보면 이해가 갈 듯 하다.
캐번디시의 가장 유명한 업적 중 하나는 지구의 질량을 계산한 것이다. 1797년에서 1798년 동안 이루어진 이 실험은 당시로서는 굉장히 정밀하고 섬세한 조건이 요구되었었고[10], 이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 집안에 두께 60cm짜리 헛간을 지어야 했다. 이렇게 해서 계산된 지구의 질량은 장장 97년 동안 바뀌지 않았으며 최근의 결과와도 큰 오차가 없다고 한다. 그리고 열기구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 대기 표본을 채취한 최초의 과학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의 성격은 과학사에서는 여러 모로 아쉬움을 남겼다. 그는 물이 산소와 수소로 이루어진다는 사실과 각종 원소들은 물론 쿨롱 법칙과 옴의 법칙 등을 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발표를 안 해서 그 영광을 각각 발견한 것으로 알려진 여러 과학자들이 가져갔다. 전해지는 얘기로는 그가 죽은 뒤에 책상 서랍을 뒤지니 평생에 걸쳐 구해온 자료들이 꽁꽁 숨겨져 있었다고 한다. 헨리가 그런 데에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는 건 그의 성격을 볼 때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특히 그의 자폐 스펙트럼 설이 사실이라면 자신이 먼저 발견해놓고, 발표를 하지 않은 건 일반인 입장에선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어쨌든 이 같은 성격에도 불구하고 과학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건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이 그의 논문들을 파헤친 덕이었다.
캐번디시는 수소와 산소를 반응시켜 물을 실험적으로 만들어 냄으로써 물의 구성이 산소와 수소만으로 이루어졌다고 추측하였다.
- 런던시는 클래팜 타운(Clapham Town)에 그의 이름을 딴 캐번디시 길(Cavendish Rd)를 지정했다.[17]
- 영국 총리 윌리엄 캐번디시와는 사촌 관계이다.
[1] 제2대 데번셔 공작 윌리엄 캐번디시의 삼남.[2] 제1대 켄트 공작 헨리 그레이의 딸.[3] 사실 현대 화학도 핵화학이나 양자화학 등의 분야는 물리학과의 접점이 매우 많다. 대한민국의 중등교육 과정에서 현대 물리학을 이해시키기위해 화학의 역사를 먼저 파헤치는 이유도, 화학이 생각 이상으로 물리학과 연관된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4] 해군사령관이었다.[5] 다만 켄트 공작위는 이어받지 못했다. 영국은 현재도 모계 후손에게는 작위 상속권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6] 어느 정도였냐면 죽을 때 당대 영란은행 예금액 1위였다. (...) 액수로는 당시 돈으로 100만 파운드, 2017년 기준 원화로 환산하면 2조 원 정도 되었다. 정말 영국을 통틀어 가장 부자까지는 아니었겠지만, 상술했듯 투자의 ㅌ도 모르는 사람이었고 사치를 부리지도 않았기 때문에 다른 형태의 자산 같은 건 상대적으로 많지 않고 그냥 대부분 현금으로 예금되어 있었으리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똑같은 양의 거액을 보유하고 있더라도 이를 주식의 형태로 보유하는 사람과 현금의 형태로 보유하는 사람 간에는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7] 이 편견은 괜히 생긴 것이 아니라 상당 부분 사실에 기반한다. 당대 세계의 많은 귀족이나 지식인 계층에 속한 인물들이 도박을 특히 좋아했던 것만 보아도 그렇다. 이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나타난 현상이다. 헨리 캐번디시가 오히려 이례적인 쪽.[8] 그래서 그 초상화(문서 최상단의 그림)도 캐번디시가 옆으로 슬쩍 얼굴을 돌린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9] 당시에는 이런 화학장비나 책도 비싸긴 했지만 그가 이런 비싼 장비를 사서 마구 부숴버리는 것도 아니고, 일단 사두고 실험하면 그만이었기에 엄청나게 돈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었다. 실험하겠다고 다이아몬드를 태워버리는 짓은 안 했다.[10] 오히려 집에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게 도움이 됐다고 분석한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11] (Philosophical Transactions , The Royal Society) Experiment XIX. Three papers, containing experiments on factitious air,Henry Cavendish,Published:01 January 1766 https://doi.org/10.1098/rstl.1766.0019[12] (Philosophical Transactions , The Royal Society) VIII. An account of a new eudiometer, Henry Cavendish ,Published:01 January 1783 https://doi.org/10.1098/rstl.1783.0008[13] (American Physiological Society) <American Journal of Physiology-Lung Cellular and Molecular :PhysiologyVol. 307, No. 1> Henry Cavendish (1731–1810): hydrogen, carbon dioxide, water, and weighing the world , John B. West,01 Jul 2014 doi.org/10.1152/ajplung.00067.2014 https://journals.physiology.org/doi/full/10.1152/ajplung.00067.2014[14] Cavendish H. Experiments to determine the density of the earth. 1798-01-01 Proceedings of the Royal Society of London, https://archive.org/details/philtrans07861996[15] (Philosophical Transactions , The Royal Society)XXI. Experiments to determine the density of the earth,Henry Cavendish, Published:01 January 1798https://doi.org/10.1098/rstl.1798.0022[16] 캐번디시 본인은 이를 전기화도(degree of electrification)라고 불렀다.[17] 구글맵 Cavendish Rd, London, 영국https://www.google.co.kr/maps/place/Cavendish+Rd,+London,+%EC%98%81%EA%B5%AD/@51.4479798,-0.1471913,17z/data=!3m1!4b1!4m5!3m4!1s0x487605cb99ac89b3:0xa1ec341a8e47d32e!8m2!3d51.4479765!4d-0.1450026?hl=ko[18] 앞서 언급한 제2대 데번셔 공작 윌리엄 캐번디시의 후손으로, 헨리 캐번디시의 친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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