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커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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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CKARD
팩커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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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명
정식
Studebaker-Packard Corporation
한글
스튜드베이커-팩커드 코퍼레이션
본사 소재지
설립일
해체
업종
자동차 제조
 
 
 
 

1. 개요2. 역사
2.1. 엔진
3. 생산 차량4. 기타

 
 
 
 

1. 개요[편집]

 
 
 
 
팩커드 사는 1899년 창립되어 현재는 사라진 미국의 고급차 제조사이다. 팩커드 이름을 단 차는 1899년 처음 생산되었으며 1956년 디트로이트에서 그들의 마지막 컨셉트카 팩커드 프레딕터가 생산되었다.

1903년까지 팩커드의 자동차는 단기통 엔진만 달고 출시되었으며, 그해 팩커드 모델 K가 4기통 엔진을 달고 나오면서 팩커드의 자동차도 다기통 엔진을 사용하게 되었다. 1912년에는 팩커드 최초의 직렬 6기통 엔진 차량 팩커드 6 1-48이 출시되었고, 1915년부터 1923년까지 더블 식스라 불린 팩커드 12를 생산하며 V12 엔진을 생산하기도 했다. 8기통 엔진은 직렬 8기통이 달려나온 1930년의 팩커드 8이 최초였으며, V8 엔진은 1955년에야 출시되었다.

1953년 스튜드베이커를 인수한 팩커드는 인디애나 사우스벤드에서 스튜드베이커-팩커드 법인을 출범했으며, 1957년과 1958년에는 사실상 스튜드베이커 사의 차량을 뱃지 엔지니어링 형식으로 판매하였다.
 
 
 
 

2. 역사[편집]

 
 
 
 
팩커드 사는 1899년 제임스 워드 팩커드와 그의 형 윌리엄 더우드 팩커드, 그리고 파트너 조지 루이스 웨이스에 의해 오하이오 주 워렌에서 창립했다. 기계 엔지니어였던 제임스 팩커드는 윈턴 사의 차량을 운전해 보다가 문제점을 발견하고는 개선하여 더 좋은 자동차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 개선 사항을 적은 서류를 준비하고 윈턴 사의 창립자인 알렉산더 윈턴을 찾아간 적이 있었지만, 오히려 윈턴은 '그렇게 잘 안다면 당신들이 차를 만들어 보세요.'라며 냉정히 거절했다. 결국 무시당한 팩커드 형제는 1899년 11월 그들의 첫 차를 만들어낸다.

이렇게 만든 팩커드 형제의 첫 차는 미국 디트로이트 최고 부자 가문 출신의 헨리 본 조이(Henry Bourne Joy)가 구입하여 높은 수준의 신뢰성을 인정받았고, 헨리 본 조이를 통해 투자단을 꾸리며 1902년 10월 2일에 팩커드 모터 카 컴퍼니를 출범시켰다. 이후 팩커드는 디트로이트로 본거지를 옮겼으며 헨리 본 조이도 팩커드의 매니저, 그리고 이사회장 자리를 맡으며 1926년까지 팩커드의 경영에 참여했다.

1910년 들어 팩커드는 필라델피아에 그들의 사옥 팩커드 모터 코퍼레이션 빌딩을 건축가 앨버트 칸의 지휘 아래 지어냈다. 한편으로 이 시기 들어 팩커드는 트럭 역시 생산했다. 1912년 7월 8일부터 8월 24일까지 3톤의 짐을 올린 팩커드의 트럭은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주행했으며, 한편으로 1912년엔 104개의 도시에서 서비스를 지원하였다.

1930년대까지 팩커드는 미국의 고급차 시장에서 경쟁력 있는 차로 인식되었다. 그들은 미국 자동차의 왕으로 언급되던 뉴욕주 버팔로피어스-애로우, 오하이오클리블랜드피어리스와 함께 3P로 불리며 고급차의 대명사로 이름을 날렸다. 1924년부터 1930년까지는 가장 많이 팔리던 고급차 브랜드였을 뿐더러, 1931년엔 일본 황실에서도 10대의 팩커드 차량을 보유할 정도였다. 1931년에는 캐나다에서도 팩커드 차량의 생산을 시작했다.

대공황이 발발하자 팩커드는 더욱 호화롭고 비싼 차종을 생산하고, 다양한 플랫폼에 기반한 차종을 생산해 더 많은 차량과 경쟁력을 보유해 주식 시장의 붕괴와 대공황을 이겨내고자 했다. 그러나 팩커드는 설상가상으로 각각 제너럴 모터스포드를 등에 업은 캐딜락링컨의 공세에 시달리게 된다. 결국 팩커드는 1935년 팩커드 120과 같은 1천 달러 이하의 평범한 차량도 생산하기 시작했으며 뷰익, 크라이슬러를 겨냥하는 보급형 모델 클리퍼(Clipper)도 1941년형 라인업으로 도입되었다. 그럼에도 팩커드는 여전히 고급 브랜드로 인식되고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팩커드는 완전 전시생산체제에 돌입했다. 롤스로이스의 멀린 엔진을 V-1650이라는 이름으로 라이센스 생산해 P-51 머스탱 등의 전투기에 장착했으며, PT 보트에 들어갈 V12 엔진 등을 생산했다. 유럽 전역이 끝나갈 때쯤 팩커드는 약 5만 5천여 기에 달하는 엔진을 생산했었다.

2차 세계대전이 종전한 시점의 패커드는 3,300만 달러에 달하는 자산을 보유하며 사상 최고의 경제적 안정기에 접어들었으나 동시에 시간이 흐를수록 경영 실수가 점차 명백해지고 있었다. 여타 미국 브랜드가 그랬던 것처럼 팩커드도 1945년 연말부터 1942년의 차량을 약간의 부분변경만 거쳐 1946년형으로 팔았는데, 클리퍼의 금형밖에 없는 탓에 시니어 시리즈는 생산되지 못하고 오직 클리퍼만 생산하게 되었다. 또한 팩커드에서는 1941년형 클리퍼를 개발하느라 많은 돈을 쓴 데다가 클리퍼가 시판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2차 세계대전으로 차를 얼마 팔지도 못해 완전신차를 마련하지 못하고, 클리퍼의 설계를 기반으로 디자인을 현대화한 신차를 계속 개발해 발매했다.

1950년까지는 팩커드가 캐딜락보다 많이 생산하고 있었으며, 캐딜락보다 하위 시장을 겨냥한 보급형 모델이 판매고를 견인했다. 당시 캐딜락은 1941년의 하이드라매틱 변속기로 자동변속기를 도입한 최초의 미국 자동차 브랜드가 되었는데, 팩커드도 1949년 상위 모델에 이어 1950년 모든 모든 모델에 울트라매틱이라는 이름의 자체개발 2단 자동변속기를 도입하며 캐딜락을 추격했다.

한편, 팩커드는 시대에 뒤쳐져가는 디자인, 시대에 뒤쳐진 플랫헤드 직렬 8기통 엔진과 2단 자동변속기같은 파워트레인에 발목을 잡혀 충성고객층만 유지하고 있었으며, 경영난을 타계하기 위해 1951년형 모델의 대대적인 디자인 변경과 함께 팩커드 200을 비롯한 보급형 라인업을 확충하는 방법을 택했으나 브랜드 이미지에 타격만 입힌 채 기존의 고급 모델과 함께 부진한 판매고를 이어가며 대실패를 거두었다.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팩커드는 1952년에 제임스 낸스(James J. Nance)를 CEO 겸 회장으로 스카웃했다. 제임스 낸스 휘하의 팩커드는 마케팅 차원에서 팩커드의 모델명 체계를 변경하고, 1950년대 미국 신차 트렌드에 맞춰 신차를 대대적으로 부분변경함과 함께 직렬 8기통을 대신하는 OHV V8 엔진도 이 시기에 시판했다. 헤일로카로 시판한 팩커드 캐리비안도 세간으로부터 높은 호흥을 받았다. 나아가 팩커드 브랜드를 고급차 위주로 재편하는 차원에서 보급형 팩커드 라인업은 클리퍼를 개별 브랜드로 부활시켜 독립시키려고 했으나 클리퍼의 독립 브랜드화는 딜러들의 저항으로 인해 무산되었다.

나아가 제임스 낸스는 GM, 포드, 크라이슬러 3사가 무한 치킨게임에 돌입하여 미국 내 중견 자동차 메이커들이 고사당할 위기에 처하자 인수합병에 참여했다. 처음에는 내시-켈비네이터, 허드슨 모터 카 컴퍼니, 스튜드베이커와의 합병 논의에 참여했으나 제임스 낸스가 새 회사의 수장 자리를 요구했다가 내시-켈비네이터의 CEO 조지 메이슨이 거절했고, 조지 메이슨이 사망한 뒤에는 합병 논의 자체가 무산되었다. 1954년 말에는 스튜드베이커와 합병하여 스튜드베이커-팩커드를 결성, 제임스 낸스가 두 회사를 이끌었으나 신차의 개발비가 없어 허덕이고 있었다. 팩커드에 차체를 공급하던 회사인 브리그스(Briggs)를 매각한 뒤 차체를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품질문제도 평판을 흐렸다.

1956년에는 스튜드베이커-팩커드가 커티스-라이트와 3년간의 경영계약을 맺으면서 제임스 낸스가 사임했다.

재정난 끝에 나온 마지막 팩커드 신차는 스튜드베이커 차종을 기반으로 만든 1957년형 팩커드 클리퍼와 1958년형 팩커드, 그리고 팩커드 호크였으며 사실상 대중차를 배지 엔지니어링하여 만든 임시방편에 불과했던 탓에 상업적으로 실패하며 팩커드 브랜드는 1958년형 신차를 끝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후 팩커드는 사명으로만 1962년까지 유지되었으며, 팩커드 라인업의 공석은 메르세데스-벤츠의 미국 판매로 대체했다.

팩커드가 단종된 이후 스튜드베이커-팩커드는 프랑스의 파셀 베가가 만든 GT카 엑설런스를 수입하여 팩커드 엔진을 탑재, 팩커드 명의로 판매하는 계획을 구상했으나 메르세데스-벤츠가 판매간섭을 이유로 반대하여 무산되었다. 또한 90년대에는 사업가 로이 걸릭슨(Roy Gullickson)의 주도로 브랜드가 부활할 여지가 있었으나, 생산 설비를 들이고 판매하는 데 너무 많은 돈이 들어 결국 실패했다.
이 기획들은 벤틀리 플라잉 스퍼 기반의 원오프 커스텀 카인 팩커드 액설런스에 영감을 주었다. 액설런스의 전면부는 그릴 양 옆으로 작은 그릴 2개가 붙어있는 형상인데, 파셀 베가 엑설런스의 전면부를 형상화한 것이다.
 
 
 
 
 
 
 
 

3. 생산 차량[편집]

 
 
 
 

4. 기타[편집]

 
 
 
 
  • 뮤지컬 시카고의 넘버 중 All I Care About Is Love(국내 번안명 내겐 오직 사랑뿐)의 가사에 I don't care for drivin' Packard cars[1] 라는 대목이 나온다. 당시 팩커드의 위상을 알 수 있는 깨알 디테일. 정작 영화판에서 이 노래를 부른 빌리 플린은 비싼 자동차를 타고 다닌다.
  • 이영숙(야인시대) 문서에서 언급되는 바카드 사건에 나오는 바카드라는 자동차의 제조사가 바로 이 팩커드다. 바카드 사건의 차종은 불명이나 이승만이 탔던 팩커드는 1956년식 팩커드 패트리시안 3세대로 57년 방한한 베트남 대통령의 의전차량으로도 쓰였고 윤보선도 잠깐 탔다.
  • 패커드 12 프로토타입
  • 패커드 엑설런스
    놀랍게도 미국에서 멀리 떨어진 네덜란드에 패커드 컬렉션이 존재한다. 컬렉션의 소유자는 과거 스낵바 회사를 운영하던 사람으로, 은퇴 후 본인 소유의 회사를 처분한 뒤 우연히 팩커드을 사게 되었는데, 유럽과는 다른 미국산 차 특유의 매력에 관심을 가지고 모으게 되었다고 한다. 일반적인 패커드 외에도 1999년 제작된 패커드 12 프로토타입[2] 과 상술한 패커드 엑설런스[3]도 소유하고 있다.
 
 
 
 
[1] 원문에 가깝게 옮기면 난 팩커드 차 몰고 다니는 덴 관심 없어 정도지만 국내에서는 최재림비싼 자동초ㅏ!!!!! 관심없쓰ㅓ!!!!!로 유명하다.[2] 90년대 후반, 사업가 로이 걸릭슨(Roy Gullikson)의 브랜드 부활 시도가 있었다. 패커드 12 프로토타입은 실제로 생산할 계획도 있었으나 재정 악화로 결국 실패. 이후 컬렉션 소유자와 직접 만나 이 차를 넘겨줬다고 한다.[3] 패커드 엑설런스가 제작된 이유도 바로 이 사람이 디자이너와 기술자를 고용해 제작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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