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오파트라 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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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비아 왕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제14-16대 파라오
클레오파트라 7세
Cleopatra VII
Kleopatra-VII.-A...
클레오파트라의 두상[1]
이름
클레오파트라 7세 필로파토르
Κλεοπάτρα Φιλοπάτωρ
Cleopatra VII Philopator[2]
출생
사망
재위 기간
이집트 파라오
기원전 51년 ~ 기원전 30년
(약 21년)
전임자
후임자
부모
배우자
자녀
종교
서명
 
 
 
 
 
 
 
 
 

1. 개요2. 생애3. 서명4. 평가5. 외모6. 여담7. 창작물8. 둘러보기

 
 
 
 
 
 
 
 
 
 
 
 

1. 개요[편집]

 
 
 
 
 
 
 
 
 
 
 
 
클레오파트라, 그녀의 코가 좀 더 낮았더라면 지상의 모습은 죄다 달라졌을 것이다.
Le nez de Cléopâtre s’il eût été plus court toute la face de la terre aurait changé.

고대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제14~16대 파라오이다.[7] 이집트 역사상 최후의 파라오. 그래서 '마지막 파라오(the Last Pharaoh)'라는 엄청난 별명도 갖고 있다.[8][9] 이렇게 실질적인 마지막 파라오의 역할을 수행한 인물이라는 역사적 의의, 율리우스 카이사르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마음을 사로잡을 정도로 뛰어난 교양과 다국어 실력, 아름다운 미모와 탁월한 정치외교술, 강렬하고 드라마틱한 생애와 최후와 어우러져 역대 이집트 파라오들 중 가장 매력과 존재감이 크고 전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인물 중 1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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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서명[편집]

 
 
 
 
 
 
 
 
 
 
 
 
클레오파트라 7세 파피루스
기원전 33년 2월 23일 이집트 파라오 클레오파트라 7세의 알렉산드리아 궁정 파피루스
We have granted to Publius Canidius Crassus and his heirs the annual exportation of 10,000 artabas of wheat and the annual importation of 5,000 Coan amphoras of wine without anyone exacting anything in taxes from him or any other expense whatsoever. We have also granted tax exemption on all the land he owns in Egypt on the understanding that he shall not pay any taxes, either to the state account or to the special account of us and others, in perpetuity.

We have also granted that all his tenants are exempt from personal liabilities such as the corvée and from paying taxes without anyone exacting anything from them, that they do not even contribute to the extraordinary assessments in the nomes or pay for expenses of soldiers or officers. We have also granted that the animals used for ploughing and sowing as well as the beasts of burden and the boats used for the transportation down the Nile of the wheat are likewise exempt from ‘personal’ liabilities and from taxes and cannot be commandeered by the army. Let it be written to whom it may concern, so that knowing it they can act accordingly.

Ginesthoi (Make it so)

기원전 33년 2월 23일 이집트 파라오 클레오파트라 7세의 알렉산드리아 궁정 파피루스 전문 영어 번역. # #
기원전 33년 2월 23일 이집트 파라오 클레오파트라 7세가 알렉산드리아에서 작성한 궁정 파피루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동료 로마인 장군 푸블리우스 카니디우스 크라수스와 후계자들의 밀의 수출과 포도주의 수입 납세 면제와 푸블리우스 카니디우스 크라수스가 이집트에서 소유한 땅의 납세 면제에 대한 파피루스"이다. 클레오파트라 7세의 코이네 그리스어 서명 "Ginesthoi(이를 시행하라.)"가 포함되어 있다. #
 
 
 
 
 
 
 
 
 
 
 
 

4. 평가[편집]

 
 
 
 
 
 
 
 
 
 
 
 
클레오파트라 7세는 큰 야심을 가진 정치가였다. 권력을 얻기 위해 적극적으로 투쟁하기도 했지만 자신의 능력도 출중했다. 이전까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파라오들이 이집트어 배우기를 거부하고 그리스어만 사용했던 반면, 토착 이집트어를 배운 최초이자 최후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파라오였다고 한다. 이외에도 여러 외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여 통역이 필요없을 정도였으며, 정치 수완도 뛰어나 로마의 최고 권력자들을 휘어잡는 한편 이시스의 현신을 자처하며 토착 이집트 백성들로부터도 인기를 모았다고 한다.

또한 카이사르파에 가담하여 자칫 내전에 휘말릴 수도 있는 처지에서 안토니우스가 권력 기반을 공고화하기 위해 파르티아 원정을 나선다는 점을 현명하게 파악하여 직접 타르수스까지 가서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안토니우스를 자신의 정치적, 군사적 후견인으로 삼은 예리함도 있었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첫 만남 장면을 보면 클레오파트라가 나름대로 호화롭게 기획한 흔적이 역력하다.[10]

하지만 다재다능한 여군주도 다 망해 가는 막장 나라를 구할 수는 없었다. 고립된 소수 그리스 - 마케도니아인 지배층의 인적 자원이 완전히 고갈되고 부정부패와 권력 암투에 빠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는 나라를 건사하기 위한 기본적인 군사력조차 없었다.[11]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외세를 이용해 생명연장의 꿈을 노릴 수밖에 없었지만 결국 실패했다. 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 내전에서 가장 중요한 악티움 해전에서 군사적 무능을 드러내기도 했다.[12] 막대한 돈을 쟁여놓고 돈과 정치적 술수를 주 무기로 삼으며 혈육도 가차없이 제거하는 냉정한 모습은 전형적인 고대 서아시아 전제 군주들을 연상시킨다.

당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인물들을 살펴보면 정말 클레오파트라 말고는 답이 없다는 말이 나올 만큼 무능한 인간들 투성이었다. 클레오파트라의 부왕인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내정과 외치 모두를 말아먹다가 반란이 터져 왕위에서 물러나 로마로 망명을 간 적이 있을 만큼 막장이었고, 뒤를 이은 클레오파트라의 언니 베레니케 4세는 한 술 더 떠 지나친 사치를 부리고 내정을 말아먹다가 로마의 지원을 받고 돌아온 아버지에게 패해 처형당한 막장 군주였다. 프톨레마이오스 13세도 정치적인 능력을 보여준 게 없다는 걸 감안하면 당시 이집트로서는 클레오파트라가 마지막 불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현재까지도 이집트에서는 그야말로 이집트의 얼굴마담이자 세종대왕급 위인으로 칭송 받으며 이집트 국민들 사이에서 어마어마한 인기와 명성을 자랑하고 있다.
 
 
 
 
 
 
 
 
 
 
 
 

5. 외모[편집]

 
 
 
 
 
 
 
 
 
 
 
 
클레오파트라 7세 동전
클레오파트라 7세 이미지 1
클레오파트라 7세를 묘사한 동전
클레오파트라 7세를 묘사한 초상화[13]
그녀는 금으로 장식된 이동 닫집 아래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누워 있었는데, 그러한 그녀의 모습은 마치 그림속의 비너스와 같았다.

플루타르코스 <안토니우스> 25
현대 대중 문화에서 그려지는 클레오파트라의 모습들은 당시의 모습과는 완전히 딴판일 가능성이 높다. 클레오파트라는 마케도니아 왕국 출신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장군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에게서부터 이어져 온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출신이므로 그리스계 소아시아 혈통이다. 이집트 관광-고고부의 논평에 따르면 클레오파트라는 갈색 피부색[14]을 가진 고대 그리스 계통의 여성이고 그 판단에 분명한 근거인 그림과 석상들이 있다.

상단에 올라온 당대의 동전이나 두상 따위에서 묘사된 모습을 보면 뽀글뽀글 곱슬머리에 우뚝 솟은 우람한 매부리코, 푹 들어간 눈두덩이 등은 전형적인 그리스 외모이다. 물론 그런 물건들에서 군주를 묘사할 때는 어느 정도 정형화된 기법이 사용되거나 당대 미 의식에 입각한 보정이 들어가게 마련이니, 그걸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이집트 방식으로 묘사된 클레오파트라 유물을 보면 생김새가 딴판이지만, 고대 이집트의 인물 묘사는 정형화의 극치를 보여주기로 유명하다.

흔히 미인의 대명사로 알려졌고 실제로 빼어난 미모와 매혹적인 목소리, 재치와 지성을 갖추어 남자를 사로잡는 매력이 있었다는 기록들이 있다. 미모로 로마를 좌지우지하다가 아우구스투스에게 패하여 독사로 자살했다는 이미지와 오리엔탈리즘이 어우러져 마녀, 색기 넘치는 요부, 팜므파탈 같은 이미지도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도 있다. 클레오파트라가 미녀로 묘사된 유물과 작품들은 클레오파트라의 미모에 관한 이야기가 성립되고 난 뒤에 만들어진 것이고, 실제로 클레오파트라가 살았던 시대 유물에 묘사된 외모는 커다란 매부리코와 살집 있는 목덜미 등 현대 사람들이 생각하는 미인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또다른 견해로는 중세시대의 미의 기준은 풍만하고 둥글둥글한 원형미를 갖춰야 미인으로 평가받은 데 비해, 현대에서는 날씬한 몸매와 날카롭고 각진 상의 여인들이 미인으로 대접받기 때문에, 당대와 현재의 미의 기준이 달랐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상기한 이미지와 이집트 벽화, 혹은 서구인들의 "동양 미인"(중동 쪽의 아랍계)에 대한 환상 때문인지 근현대 창작물에 등장하는 클레오파트라들은 대개 "이국적인 동방 섹시녀"라는 컨셉을 가지고 있다. 그 대표적인 특징으로 까무잡잡한 피부에 샤프한 이목구비, 짙은 눈 화장이 깔린 길고 째진 눈, 윤기 흐르는 직모 흑발,[15] 늘씬한 몸매에 온갖 보석으로 치장한 노출도 높은 패션 등이 있다.

클레오파트라의 인종 논쟁에 대해 결론부터 말하자면 위에서 말했듯이, 그리스계통의 갈색피부를 가진 코카소이드였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오리엔탈적인 이미지에 대한 반작용으로 클레오파트라 흔히 생각하는 서유럽 계통의 유럽인 이미지였을 것이라는 오해가 존재한다. 일례로 일부 커뮤니티나 유튜브 채널에선 '클레오파트라의 복원도'라는 이름의 빨간머리의 백인 여성의 ai사진이 역사적 사료인 마냥 돌아다니는 것이 있다. 이는 사실 복원도가 아니라 전혀 고증이 되지 않은 근거없는 창작물이다. 해당 사진은 클레오파트라의 조각상에 창백한 피부를 가진 전형적인 진저의 레퍼런스로 짜집기되어 있는데, 정작 클레오파트라의 가문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같은 그리스의 지배계층은 자신들의 갈색피부에 대해 자부심을 가졌으며, 전형적인 백인의 금발, 빨간머리와 하얀 피부를 야만과 미개의 증거(=켈트족)로 여기며 멸시했기 때문이다. 이 당시 이집트에서 금발벽안 외모를 지닌 사람들도 무역상이나 군인으로 분명히 유입은 되었지만, 최상류층은 아니었다는 얘기이다. 이런 낭설과 마찬가지로 일각에서는 클레오파트라가 이집트의 여왕이었다는 이유로 흑인이라는 주장이 나왔는데 물론 흑인설 또한 근거가 부족하며 이집트의 인종 비율이 무시된 주장이다.[16] 이집트인들 가운데서 흑인이 아주 없는 건 아니고,[17] 남부 지역에 흑인 혼혈 주민들이 많이 살고 있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 보았을 때 코카소이드가 훨씬 많은 비율을 유지했으며 무엇보다 근친혼을 유지하던 가문에 굳이 흑인의 피가 섞였을 가능성이 희박하다. 중동계 중에서도 사우디 아랍인 같은 셈계 민족보다는 차라리 튀르키예인에 더 가까운데, 오스만 제국 시절 그리스인튀르크인(정확히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층인 오구즈인) 사이에서의 통혼이 잦아서 양쪽의 외모가 큰 차이가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18][19] 그러므로 사극에서 클레오파트라 7세 역에 올바른 캐스팅을 한다면 그리스계 배우나 튀르키예계 배우가 맡는 게 가장 좋다. 이는 다른 그리스계 인물들도 마찬가지지만 말이다.

서양화 속의 클레오파트라들은 보통 전형적인 중근세 유럽계 백인 왕족의 모습과[20] 현대에서 상상하는 검은 머리에 전형적인 오리엔탈 화풍으로 그려놨다. 당시 화가가 이국에 대한 역사적 정보를 얻기 힘들었던 힘든만큼 유럽의 옷차림을 하고 동양적 이목구비와 하얀 피부를 가진 유럽 여성으로 그려져 있다. 유럽 화가들이 그리스 신화를 재현한 그림에서 신들이 서북유럽인의 금발과 붉은 머리, 유럽 왕족의 복식을 갖추고 있는 고증적 오류와 동일하다. 잘못된 역사 지식과 환상으로 인해 외모가 입맛에 맞게 변형된 건 현대의 클레오파트라도 마찬가지며 결국 클레오파트라의 외모는 사실적 고증보다는 소설, 영화의 영향을 받아 대중들의 입맛에 맞게 왜곡되어 전해져 왔다.[21]

초선, 양귀비처럼 시대와 국가를 대표하는 미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미인, 이국적 이미지를 활용하여 마케팅을 펼치는 경우가 많다. 당장 '클레오파트라가 먹은', '클레오파트라 화장품' 키워드로 검색하면 클레오파트라가 사용했다고 알려진 음식과 화장품 재료가 나온다. 물론 까마득한 먼 옛날 유명 사람이 사용한 재료라고 해서 그것이 그 재료가 좋다고 할 수 있는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다. 연예인이 광고하는 물건이라고 그 물건의 품질을 연예인이 보증하는 것은 아닌 것과 같은 이치.
 
 
 
 
 
 
 
 
 
 
 
 

6. 여담[편집]

 
 
 
 
 
 
 
 
 
 
 
 
  • 사치스러움을 과시하기 위해 진주식초에 녹여 먹어서 주위를 놀라게 했다는 일화가 있다. 안토니우스와 하루에 20만 세스테르티우스 상당의 돈을 다 써버릴 수 있느냐 없느냐는 내기를 걸어서 진주를 식초에 녹인 다음 원샷으로 승리했다는 일화다. 그런데 사실 진주는 식초 정도의 산도에는 그렇게 빨리 녹지 않고, 강산을 들이부어야 순식간에 녹는다고 한다. 황산이나 염산을 쌩으로 들이켰다고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니, 아마 거짓과 과장이 상당히 많이 가미된 에피소드일 터이다. 역사학자들의 추정에 따르면 클레오파트라는 사실 진주를 식초에 녹인 척 하고 그냥 삼켜버렸을 것이며 그 진주는 나중에 자연스레 몸 밖으로 배출되어 회수되었을 것이라 한다. 전승에 따라서는 양 귀에 진주 귀걸이를 달고 나와서 연회 끝무렵에 시종에게 식초를 두 잔 가져오게 해 우선 귀걸이 한 쪽을 떼어서 식초에 넣어 마셔버렸다. 그리고 다른 한 쪽도 떼어내려 했는데 놀란 안토니우스가 패배를 인정하고 두 번째 진주를 먹는 것은 제지했다고도 한다. 클레오파트라가 식초에 녹여마셨다는 진주 일화에서 쓰인 식초는 와인으로 해석되기도 하는데 그 중에서도 마레오틱 와인(mareotic wine)이란 고대 이집트산 화이트 와인이 아니냐는 추측이 있다. 사실 그리스, 로마를 포함한 지중해권에서 와인이나 와인이 오래되어 식초가 된 물건에 물을 적당히 타서 음용하는 포스카는 매우 흔하디 흔한 음료였다. 이외에 클레오파트라가 와인이나 당나귀 젖으로 목욕을 했다는 말이 있지만 헛소문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 양귀비리치를 좋아한 만큼 클레오파트라는 무화과를 좋아했는데 굉장한 대식가여서 하루에 먹어 치우는 무화과나 식사량이 엄청났다. 클레오파트라가 시원시원하게 먹는 모습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반했다고 한다.
  • 클레오파트라의 자녀들 중 카이사리온은 아우구스투스에게 살해되었고, 안토니우스와의 사이 두 아들도 행적이 전해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요절한 것으로 보이지만[22], 딸인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는 지금의 리비아인 누미디아의 왕 유바 2세와 혼인하여 자손을 남겼고, 이들의 자손들은 로마 귀족들과 오랫동안 통혼했다고 전한다.
  • 남녀 태아의 발육에 속력 차이가 있는지 궁금하다는 이유로 여자 노예 여럿을 임신시킨 뒤 산 채로 배를 갈라 아이의 발육 정도를 확인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다만 이런 이야기는 막 갖다붙이는 '폭군의 악행' 내러티브의 스테레오 타입이라 믿을 만한 출처가 없는 한 걸러 들어야 좋다. 중국 상나라제신달기,[23] 그리고 더 고대의 파라오, 신성 로마 제국황제이자 시칠리아 왕국 국왕 프리드리히 2세 등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붙어있다.
  • 클레오파트라 7세가 고대 이집트 문명 출신이라는 이미지를 가진 이들이 있다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개략적인 역사의 흐름도 잘 모르는 이들이 가질법한 해괴한 이미지이다. 그녀는 카이사르와 같은 시기, 즉 고대 이집트 문명보다 한참 나중에 탄생한 고대 그리스 문명보다도 또 한참 나중에 탄생한 로마 제국 시대에 활동한 인물인 것이다. 현대인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자면, 클레오파트라가 활동한 시기(B.C. 1세기)는 고대 이집트 문명의 위대한 유산인 기자의 대피라미드가 지어진 시기(B.C. 26세기)보다 스마트폰이 대중화된 현대(A.D. 21세기)에 훨씬(500년쯤) 가깝다. 즉 로마 제국 사람들의 관점에서 피라미드는 이미 아득한 고대의 유적이었던 것. 심지어 이집트 문명의 시발점인 최초의 이집트 통일(B.C. 32세기)를 기준으로 하면 클레오파트라의 시대보다 무려 3천년 이상 더 옛날이다.
    물론 클레오파트라와 고대 이집트 사이에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본 문서에서도 설명하듯 그녀는 마지막 파라오, 즉 고대 이집트로부터 이어져 온 군주의 호칭을 가지고, 형식상으로든 실질적으로든 독립된 이집트를 다스린 마지막 군주였기 때문이다.[24] 하지만 그녀가 속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탄생 자체가 이집트 말기 왕조의 종식, 즉 고대 이집트 왕국이 독립적 지위를 완전히 상실한 기점으로 여겨진다. 그러니까 흔히 '고대 이집트 문명'으로 여겨지는 고왕국~신왕국 시대와는 한참 동떨어진 시대인 것이다. (신왕국 멸망에서 클레오파트라의 시대까지만 해도 간격이 천년이다.) 말하자면 아슬아슬하게 고대 이집트의 연장선상에 둘 수 있는 시대의 끝자락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인물이 바로 클레오파트라 7세인 것. 본 문서에서도 설명하듯 그녀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정체성 자체가 이집트 문명보다는 헬레니즘 문명에 속해있는 것이다.물론 현대 이집트 역사학계에서는 고대와 중세의 분기점을 보통 이슬람 세력이 이집트를 정복한 639년으로 보니 클레오파트라의 일대기는 고대사에 속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이는 세계사의 보편적 관점에서 <고대/중세/근세/근대/현대>를 구별하는 기준을 이집트사에 적용한 것이고, 이집트 문명은 세계사에서도 유독 시작시기가 이른 문명이기에 저 기준으로 나누면 고대가 굉장히 길어진다. 기원전 32세기~기원후 7세기까지 대충 4천년이 고대인데 중세+근세+근대+현대를 다 합치면 기원후 7세기~기원히 21세기의 대충 1400년 수준인 것. 그러니까 위에서도 설명된 것처럼 고대 이집트 문명의 전성기란 고대인이 보기에도 이미 고대문명이었다. 결론은 매머드와 같은 시대에 존재했던 문명을 우습게 보면 안된다.
  • 안토니우스와의 사이에서 얻은 딸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는 오늘날 모로코에 위치한 로마의 속국 마우레타니아 왕국(오늘날의 모로코)의 왕 유바 2세와 결혼해 공동 통치자가 됐다. 어머니를 닮아 총명했던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는 교양인으로 유명한 현군 유바 2세와 함께 마우레타니아의 부국강병을 이끌어냈고, 마우레타니아의 번영은 클레오파트라의 외손자(유바 2세와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의 아들)까지 이어졌다. 이 외손자가 바로 '마우레타니아의 프톨레마이오스'로 불리는 프톨레마이오스인데, 그는 자신의 부모를 신격화하고 스스로를 살아있는 신으로 자처하면서 농업생산력을 증대시키고 군사원정을 벌이며 국력을 신장시켰다. 이때 프톨레마이오스 왕은 외할머니처럼 로마의 친구라는 칭호 속에서 마우레타니아를 지중해 서부의 부유한 국가로 이끌면서, 로마 내 유력자들과의 친분 속에서 그 영향력을 확장한다. 그는 자신이 안토니우스의 외손자이고, 어머니의 이복자매 소 안토니아와 그녀의 두 아들 게르마니쿠스, 클라우디우스 1세와 어릴 때부터 함께 로마에서 자라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황족들과 원로원 귀족을 남편으로 둔 여동생 드루실라 및 현직 원로원 의원들인 조카들을 통해 인맥으로 이어진 원로원 주요인사들과의 친분을 철저히 이용했다. 그래서 프톨레마이오스는 60년을 갓 넘은 원수정 체제의 한계와 로마 내 권력구도를 기회 삼아 로마 내정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런 까닭에 클레오파트라의 외손자 프톨레마이오스는 당시 옥타비아누스의 증손자로 당시 황제였던 가이우스와 로마 원로원 및 당시 집정관 등 최고위층들에게 과거 클레오파트라처럼 위험인물, 경계의 대상으로 제대로 찍혔다. 따라서 그는 서기 40년 로마를 방문했다가, 이를 크게 경계한 황제와 원로원 수뇌부들의 지령에 따라 암살됐다. 이후 로마는 이집트를 병합할 때처럼 마우레타니아를 속주로 만들 준비에 들어가는데, 이에 베르베르인들은 크게 반발해 무려 3년 가까이 전쟁이 지속됐다. 당시 로마군은 프톨레마이오스 암살 이후 몇 달 되지 않아 공화정 복귀를 원한 원로원 일부 의원과 공모한 근위대장 카시우스 카이레아 및 휘하 20명에게 가이우스 황제가 서기 41년 피살된 상황 속에서 잠시 헤맨데다 베르베르인들의 저항이 거세어 초반에는 고전했다. 그렇지만 애당초 로마의 국력은 피살 전 칼리굴라의 판단처럼 큰 무리가 아닌 까닭에, 다음 황제로 즉위한 칼리굴라의 삼촌 클라우디우스 1세가 공화정 복귀 움직임을 제압하고 원로원을 물갈이해버린 이후 반격하면서 기어이 마우레타니아를 굴복시켰다. 이때 로마는 칼리굴라 시대 때 계획한 전략에 따라 이 왕국을 2개로 쪼갠 다음 속주로 병합시켰다.
LE 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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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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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은 세계사에 이름을 남긴 여성들을 선정했다.
긍정적 영향을 미친 여성들뿐 아니라 '세계사에 족적을 남긴 여성들'을 뽑았기 때문에 부정적인 인물들 혹은 논란 있는 인물들도 있다.
성인들
지도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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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선수들
퍼포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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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클레오파트라가 로마를 방문했을 즈음인 기원전 1세기 경에 제작되었다. 아피아 가도 인근의 한 빌라 유적에서 발굴되었다. 그러나 곽민수 소장의 발언에 따르면 이것이 클레오파트라의 두상이라고 여겨지는 이유는 클레오파트라의 로마 방문 시점에 제작된 게 확인되었기 때문이지 이 조각이 클레오파트라를 표현한 것이라고 명시하는 표시나 기록은 없다고 한다. 그렇기에 가능성이 높지만 확신할 수는 없다고 한다. 이 두상은 현재는 독일 베를린 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2] 이명은 '클레오파트라 테아 네오테라(Κλεοπάτρα θεα νεωτερα)'.[A] 3.1 3.2이집트 알렉산드리아.[5]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클레오파트라의 연인으로 유명하지만 그건 연인 관계일 뿐 실제로 결혼식을 올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안토니우스는 기원전 32년에 클레오파트라와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6] 기원전 33년 2월 23일 이집트 파라오 클레오파트라 7세가 알렉산드리아에서 작성한 궁정 파피루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동료 로마인 장군 푸블리우스 카니디우스 크라수스(Publius Canidius Crassus)와 후계자들의 밀의 수출과 포도주의 수입 납세 면제와 푸블리우스 카니디우스 크라수스가 이집트에서 소유한 땅의 납세 면제에 대한 파피루스"에서 발견된 클레오파트라 7세의 그리스어 서명 "Ginesthoi"이다. #[7]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에서 남자 통치자들은 전부 프톨레마이오스란 이름을 썼고 여자 통치자들은 클레오파트라, 베레니케, 아르시노에라는 이름을 썼다. 그러다보니 당대에는 이름 뒤에 붙이는 별칭으로 구분하기도 했는데 클레오파트라의 별칭은 '테아 네오테라'이며 새로운 여신이라는 뜻이다.[8] 정확하게 따지고 들어가면 그녀의 친아들인 카이사리온족보상으로는 최후의 파라오지만 카이사리온은 단독 재위 기간이 없고 평생 어머니와 공동 즉위 형태로 파라오 생을 보냈으며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족적을 남기지 못했기에 일반적으로는 이래저래 인상이 강한 클레오파트라를 마지막 파라오로 치는 편이다.[9] 또한 그녀 사후에 로마 황제들이 파라오를 칭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은 수사적인 칭호만 파라오지, 행정적인 면에선 여전히 '로마 황제'로써 이집트를 다스렸기에 계보에 포함되는 일이 드물다. 그마저도 막시미누스 다이아를 마지막으로 유명무실이 된다.[10] 플루타르코스는 이렇게 묘사했다. "금으로 장식된 뱃머리, 은으로 된 노를 갖춘 호화로운 선박에 비너스처럼 장식한 그녀는 금으로 장식된 별실에 누워 있었다. 그녀의 주위는 큐피드 신을 닮은 아이들이 부채질을 하며 서 있었다. 바다의 요정 네레이드처럼 꾸민 시녀들은 키와 돛줄을 잡아 배를 몰았다. 이 배에서부터 풍겨나는 야릇한 향기는 강기슭까지 퍼져 나갔다. 클레오파트라가 도착하자 안토니우스는 그녀를 초대했지만 오히려 그녀는 안토니우스가 자신의 배를 방문해 줄 것을 요구했다. 안토니우스를 맞이하기 위해 그녀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하고도 성대한 준비를 했다. 안토니우스를 놀라게 한 것은 엄청나게 밝은 실내였다. 천장에 매달린 것, 가지각색의 방식으로 벽면에 비스듬히 세운 것, 서로 마주보고 서 있는 것 등 사방 가득 등불이 놓여있었다."[11] 물론 이집트 군대를 모으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건 아니었지만 그 군대의 구성원은 대부분 토착 이집트인들이었고 그들은 아쉬울 때만 자기들을 찾고 정작 전쟁 후에는 봉급도 제대로 안 주는 이방인 왕조에 대한 충성심 따위 그리 많지 않았다.[12] 아직 전투가 한창이고 승패가 명확히 갈리지도 않았는데 배를 돌리라는 지시를 내려 버렸다. 그가 탄 함선은 진형의 비교적 뒤쪽에 위치해 있어서 상대적으로 안전했을뿐더러 해전의 전체 판도를 관망할 수 있었는데, 이런 배가 탈주할 경우 중간급 지휘관은 물론이고 말단 병사들까지도 꼼짝없이 패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은 클레오파트라가 전투 경험이 전무했기 때문으로, 실제로 악티움이 그가 참가한 첫 번째이자 마지막 전투였다.[13] 1세기 고대 로마의 고대 도시 헤르쿨라네움에서 전시된 초상화다.[14]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배 계층에선 그리스인들의 그을린 갈색 피부색을 지성인의 상징으로 여겼으며, 이를 켈트족 등의 유입민족과의 차별성으로 여기며 왕권을 공고히 하는데 쓰였다. 다만 아프로센트리즘에서 말하는 피부와는 다르다. 미노스 문명 문서에서 추정할 만한 피부색을 볼 수 있다.[15] 높은 확률로 칼단발이나 히메컷으로 묘사된다[16] 아프리카는 사하라 사막을 기준으로 아랍인들이 대다수인 북아프리카와 흑인들이 대다수인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로 나뉜다. 이집트는 당연히 북아프리카에 속한다.[17] 고대 이집트에 누비아계 흑인 왕조가 들어선 적도 있다. 당연히 이때는 파라오도 흑인이었다.[18] 고대 이집트의 후기 왕조들은 외부에서 유입된 경우가 많이 있다(아시리아, 페르시아, 누비아, 그리스). 물론 지배층만 교체되었을 뿐 인구의 대부분은 중동계인 기존 이집트인이었으며, 클레오파트라의 부계 조상이자 왕조의 창립자인 프톨레마이오스는 확실한 마케도니아인(그리스인)이었다. 아무리 당시 왕조 내 근친혼이 흔했더라도 수백 년간 수도 많지 않은 그리스인들끼리만 결혼해 이어오는 건 무리니, 클레오파트라의 밝혀지지 않은 모계 혈통을 통해 그녀가 주류 인종이었던 이집트인과 혼혈이었을 가능성은 있긴 하다. 그러나 인구비가 높은 편도 아니었을 중남부나 서아프리카(흔히 흑인이라 불리는) 출신 혼혈이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며(애초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수도였던 알렉산드리아부터가 흑인 인구가 이집트 남부에 비해 거의 드물다시피 한 이집트 북부에 있는 도시이기도 하고), 당연히 이집트가 흑인 문명이었다는 건 그냥 대놓고 헛소리다. 흑인이 지배층이었던 적은 누비아가 정복한 25왕조 뿐이며 백 년도 못 갔고, 이 지배층도 결국 이집트화되었다.[19] 클레오파트라가 흑인이란 주장을 동양에 비유하면 중국의 주류 민족이 한족이고 비교적 짧은 시간 몽골계, 여진계 왕조들이 존재했는데, 과거에 몽골이 잠깐 제국을 세웠었다고 한참 후인 청나라 황제 인종을 몽골계일 수 있다고 추정하는 꼴이다. 다만 이건 좀 틀린 말인데, 청나라 황제들은 정말로 몽골계의 혈통을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몽골계 보르지긴트 씨족은 칭기즈 칸의 피를 물려받았으므로 유목민들 중에서는 최고의 혈통이다보니 청나라 황가에서도 보르지긴트 씨족의 여인들을 아내로 맞이하여 몽골의 피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당장 숭덕제의 왕비도 보르지긴트 씨였다. 물론 이는 엄밀히 말하면 이집트와 청나라 간에 서로 사정이 다르다보니 그렇게 된 거고(상술한 대로 칭기즈 칸의 씨족인 보르지긴 씨는 원이 멸망해서 몽골 고원으로 쫒겨나긴 했어도 여전히 남아 있었고 중원을 지배한 위상도 어디가지 않아서 격도 높았다. 반면 이집트의 흑인 파라오 가문은 그 정도로 혈통이 높이 평가받지 않았다.) 클레오파트라 7세가 흑인 혈통일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보고 있다.[20] 옷을 보면 알 수 있다. 소위 상상하는 이집트나 그리스, 로마 스타일이 아니다.[21] 사실 이상한 것도 아닌 게 천일야화에 나오는 중국 왕조도 실제 중국과는 전혀 다르게 아랍풍으로 그려져 있다.[22] 카이사리온과 달리 이쪽은 일부러 죽였을 가능성은 적다. 옥타비아누스의 입장에서 카이사리온은 유일한 카이사르의 후계자로 남기 위해서 반드시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될 위험분자이자 라이벌이었지만, 안토니우스의 아들들은 정치적으로 입지가 없어 문제될 것도 없었기 때문.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은 안토니우스의 전 부인이자 옥타비아누스의 누이인 옥타비아가 데려다 키웠다고 한다.[23] 주왕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상나라 마지막 군주 제신과 그의 아내 달기에 관련된 흉악한 기록들은 주나라가 크게 과장했다는 설이 현재 역사학계의 중론이다. 여기서 소개되는 클레오파트라의 악행들도 이와 비슷한 사정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토록 망국의 군주들에 관한 고대의 기록들은 왜곡되거나 과장되었을 확률이 높기 때문에 각별한 주의를 요한다.[24] 이후 로마 제국→통일 이슬람 제국을 거쳐 중세 무렵 이집트가 독립된 지위를 되찾은 시기가 있긴 하지만 중세의 이집트 독립 왕조인 파티마 왕조맘루크 왕조는 '이게 이집트 정체성을 가진 독립왕조인가? 아니면 이슬람 정체성의 이슬람 왕조가 이집트 지역을 독립적으로 통치하는 것인가?'가 모호한 면이 있고, 뭣보다 이들은 파라오라는 명칭을 절대로 쓰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거쳐 근대에 이르러서야 '이집트 정체성의 독립국가'가 다시 형성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고대 이집트의 종식 이후 파라오는 거의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지 않았다. 중세의 기독교(콥트교)/이슬람 문화에서 파라오란 '이교도 풍습의 상징'이었고 그 영향이 남아있는 현대에도 파라오의 의미는 긍정적이지 않다. 예를 들어 호스니 무바라크의 독재와 장기집권을 까는 이들이 흔히 그를 '파라오' 라고 부른다. 그래서 클레오파트라가 "마지막 파라오" 가 되는 것이다.[25] 애초에 클레오파트라라는 이름부터가 그리스식 이름이다. 그리고 그녀가 속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지배층인 그리스인들만 우대하고 피지배층인 이집트인을 철저히 개무시했을 정도로, 고대 이집트 문명의 탈을 쓴 헬레니즘계 왕조였다.[26] 특히 투탕카멘이나 람세스 2세고대 이집트의 전형으로 많이 거론된다.[27] 특히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클레오파트라의 스테레오타입을 만들어낸 영화 클레오파트라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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