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요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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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요전쟁 麗遼戰爭 고려-거란 전쟁 | 高麗-契丹戰爭 | ||
![]() | ||
시기 | ||
장소 | 한반도 북부 및 중부 전역 | |
원인 | ||
교전 세력 | 고려 (수세) 승 | 요 (공세) 패 |
주요 인물 | ||
병력 | ||
피해 | 피해 규모 불명[17] | 피해 규모 불명[18] |
결과 | ||
3차: 거란의 완전 종속 시도 분쇄 | ||
영향 | ||
서희, 양규, 김숙흥, 강감찬 등 여러 인물이 활약한 전쟁이지만, 요나라의 주류 민족이었던 거란족은 오늘날 중국과 몽골에 흡수되어[22][23] 현존하지 않아서 고구려-수 전쟁, 고구려-당 전쟁이나 고려 시대의 여몽전쟁[24], 조선 시대의 임진왜란 및 병자호란 등 다른 주요 전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묻히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동원된 군인의 수만 봐도 상기된 전란들에 절대 뒤지지 않았던 대규모의 전란이었으며, 훗날 고려사 및 동아시아사의 1세기 이상의 전개에 큰 영향을 미친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서 망국 발해의 유민들은 요나라군으로 참전한 고청명, 고려군으로 참전한 대도수처럼 서로 싸우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맞았다. 이후 발해인들은 여·요 각국에 동화되어 사라지게 된다. 정확히 말해서 만주 일대에 남은 발해인의 정체성은 발해부흥운동을 통해 이후 건국되는 금나라때까지만 해도 살아 있었지만, 원·명시대를 거치면서 한화(漢化) 내지 소멸되었다.
한국사에서 상당히 중요한 전쟁인데, 발해가 멸망해서 만주의 주도권을 상실하게 된 뒤 중원 왕조의 도움 없이 한반도 국가와 정복왕조가 붙은 첫번째 대규모 전면전으로 2~3차 전쟁은 말 그대로 고려의 국운을 건 총력전이었다. 그래서 이전까지 중앙집권체제가 완성되지 않아 고구려·백제·신라·가야계 호족·발해 유민 등 다양한 지방 호족의 연합체처럼 엉성한 체제였던 초기의 고려는 국가 존립의 위기 앞에서 하나로 단결하여 과거 내전의 전력은 묻지 않고 모두가 총동원되어 거란의 침공을 막아냈다.
이 과정에서 고려의 국왕 현종은 이전부터 행했던 삼국 능묘의 정비를 통한 정서적인 단결 유도는 물론, 전쟁에 참전한 모든 백성을 위해 전사자 가족 지원, 유해 발굴 사업 등을 시행해 한반도의 모든 주민을 '하나의 고려인'으로 처음 단결시키는 데 성공했고, 승전 이후 고려는 단일민족국가이자 안정적인 중앙집권국가로의 이행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25]
또한, 이 전쟁으로 동아시아 지역에서 거란-송-고려의 3국간 세력 균형이 자리잡았고, 약 100여 년 동안 큰 충돌없이 안정을 취할 수 있었다. 특히 고려는 이때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다.
이 전쟁에서 망국 발해의 유민들은 요나라군으로 참전한 고청명, 고려군으로 참전한 대도수처럼 서로 싸우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맞았다. 이후 발해인들은 여·요 각국에 동화되어 사라지게 된다. 정확히 말해서 만주 일대에 남은 발해인의 정체성은 발해부흥운동을 통해 이후 건국되는 금나라때까지만 해도 살아 있었지만, 원·명시대를 거치면서 한화(漢化) 내지 소멸되었다.
한국사에서 상당히 중요한 전쟁인데, 발해가 멸망해서 만주의 주도권을 상실하게 된 뒤 중원 왕조의 도움 없이 한반도 국가와 정복왕조가 붙은 첫번째 대규모 전면전으로 2~3차 전쟁은 말 그대로 고려의 국운을 건 총력전이었다. 그래서 이전까지 중앙집권체제가 완성되지 않아 고구려·백제·신라·가야계 호족·발해 유민 등 다양한 지방 호족의 연합체처럼 엉성한 체제였던 초기의 고려는 국가 존립의 위기 앞에서 하나로 단결하여 과거 내전의 전력은 묻지 않고 모두가 총동원되어 거란의 침공을 막아냈다.
이 과정에서 고려의 국왕 현종은 이전부터 행했던 삼국 능묘의 정비를 통한 정서적인 단결 유도는 물론, 전쟁에 참전한 모든 백성을 위해 전사자 가족 지원, 유해 발굴 사업 등을 시행해 한반도의 모든 주민을 '하나의 고려인'으로 처음 단결시키는 데 성공했고, 승전 이후 고려는 단일민족국가이자 안정적인 중앙집권국가로의 이행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25]
또한, 이 전쟁으로 동아시아 지역에서 거란-송-고려의 3국간 세력 균형이 자리잡았고, 약 100여 년 동안 큰 충돌없이 안정을 취할 수 있었다. 특히 고려는 이때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펴낸《(신편) 한국사》등의 서적, 공무원 시험 등 주요 공식 시험 및 학술 논문 등에서는 '여요전쟁'으로 칭하고 있다. 일부 한국사 교과서에서는 '거란의 침입'이라는 단어로 통용된다.
거란이 처음으로 고려에 침입한 993년부터 귀주대첩으로 전쟁이 끝나는 1019년 당시까지 사용한 이름은 '거란'이었다. 당시 거란인들은 자신들이 세운 국가의 명칭을 두고 민족명에서 유래한 '거란'과 요태종 시기에 명명한 '요(遼)'를 혼용했는데,《요사》성종 2년(983년)에는 '국호를 다시 거란으로 바꾸었다'는 기록이 있다. 거란이라는 국호를 다시 '요'로 되돌린 건 1066년 도종 때인데, 그나마 요가 국호이던 시절에도 귀족들은 거란어를 사용했기에, 한자로는 '요'라고 표기해도 거란어로는 '모스 키탄'(대거란)이라고 칭했다. 따라서 정작 전쟁 중에는 '요'라는 국호를 사용한 적이 없다(거란이나 요나라 문서 참고).[26] 한국에서도 고려-거란 전쟁이라는 명칭이 공식적으로는 아니지만 일부 쓰이기도 한다. 예로 안주섭의 명지대 박사 논문 제목은〈고려-거란 전쟁사 연구〉이다.
거란이 처음으로 고려에 침입한 993년부터 귀주대첩으로 전쟁이 끝나는 1019년 당시까지 사용한 이름은 '거란'이었다. 당시 거란인들은 자신들이 세운 국가의 명칭을 두고 민족명에서 유래한 '거란'과 요태종 시기에 명명한 '요(遼)'를 혼용했는데,《요사》성종 2년(983년)에는 '국호를 다시 거란으로 바꾸었다'는 기록이 있다. 거란이라는 국호를 다시 '요'로 되돌린 건 1066년 도종 때인데, 그나마 요가 국호이던 시절에도 귀족들은 거란어를 사용했기에, 한자로는 '요'라고 표기해도 거란어로는 '모스 키탄'(대거란)이라고 칭했다. 따라서 정작 전쟁 중에는 '요'라는 국호를 사용한 적이 없다(거란이나 요나라 문서 참고).[26] 한국에서도 고려-거란 전쟁이라는 명칭이 공식적으로는 아니지만 일부 쓰이기도 한다. 예로 안주섭의 명지대 박사 논문 제목은〈고려-거란 전쟁사 연구〉이다.
통상 이 세 번의 전면전을 여요전쟁으로 보고, 이후에 발생한 거란의 침입은 국지전 수준으로 본다.
1023년, 요나라는 통수 야율해령, 상곤 과노를 파견해 모모국령으로부터 침략해 진격하게 하면서 임아 소고구와 비장 대광일 등은 군사를 거느리고 고산령을 통하여 들어가게 해 고려를 공격하게 했다.
윤 10월 말일에 달리하에 이르렀지만, 적을 만나지 못해 돌아왔다. 이 달에 홍파지령에서 적과 만났는데, 낙타와 말이 매우 많이 죽었다고 한다.
1029년, 요나라의 동경요양부에서 발해부흥운동의 하나로 대연림이 반란을 일으키고 고려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호응해 곽원이 거란으로 출정했으나 2~3개월 만에 실패했다. 그외에도 왕가도가 거란 정벌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033년, 덕종이 천리장성 구축의 일환으로, 압록강 하류의 인주(麟州)와 위원진(威遠鎭) 사이에 새로 정주(靜州)성을 쌓자, 이를 명분으로 거란이 고려를 침공했으나 성공적으로 물리쳤다.
1037년 10월, 정종 대에 거란이 수군으로 압록강에 쳐들어왔지만 별 성과 없이 돌아갔다.
1125년 요나라가 금나라에 의해 멸망했으나, 한참 뒤인 1216년에 그 유민들이 터전을 마련하고자 절박한 발악으로 압록강 일대에 영토를 가지기 위해 거란 유민들의 고려 침공이 발발했다. 쉽게 격퇴되지 않자 몽골이 군사력을 동원해 개입했고, 고려와 몽골 사이의 우호적이지 않은 첫 번째 접촉이 이루어졌다.
1023년, 요나라는 통수 야율해령, 상곤 과노를 파견해 모모국령으로부터 침략해 진격하게 하면서 임아 소고구와 비장 대광일 등은 군사를 거느리고 고산령을 통하여 들어가게 해 고려를 공격하게 했다.
윤 10월 말일에 달리하에 이르렀지만, 적을 만나지 못해 돌아왔다. 이 달에 홍파지령에서 적과 만났는데, 낙타와 말이 매우 많이 죽었다고 한다.
1029년, 요나라의 동경요양부에서 발해부흥운동의 하나로 대연림이 반란을 일으키고 고려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호응해 곽원이 거란으로 출정했으나 2~3개월 만에 실패했다. 그외에도 왕가도가 거란 정벌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033년, 덕종이 천리장성 구축의 일환으로, 압록강 하류의 인주(麟州)와 위원진(威遠鎭) 사이에 새로 정주(靜州)성을 쌓자, 이를 명분으로 거란이 고려를 침공했으나 성공적으로 물리쳤다.
1037년 10월, 정종 대에 거란이 수군으로 압록강에 쳐들어왔지만 별 성과 없이 돌아갔다.
1125년 요나라가 금나라에 의해 멸망했으나, 한참 뒤인 1216년에 그 유민들이 터전을 마련하고자 절박한 발악으로 압록강 일대에 영토를 가지기 위해 거란 유민들의 고려 침공이 발발했다. 쉽게 격퇴되지 않자 몽골이 군사력을 동원해 개입했고, 고려와 몽골 사이의 우호적이지 않은 첫 번째 접촉이 이루어졌다.
온갖 매력적인 요소는 다 갖춘 시기[28]이지만 정작 대중매체에서의 조명을 받지는 못했다. 특히 한국 사극의 근본이라 여겨졌던 KBS 대하드라마에서의 부진이 두드러지는데 이 시기를 2번(천추태후, 고려 거란 전쟁)이나 제작했음에도 2번 다 한국 사극의 기념비적인 망작으로 남았다.[29] 이쯤 되면 KBS가 여요전쟁 시기에 원한이 있는지 의심이 될 정도.
- 1973년에 방영한 드라마〈강감찬〉에서 1차부터 3차까지의 전쟁을 망라하여 다루었다고 전해지지만, 필름이 소실되는 바람에 상세한 내용을 알 수 없게 됐다.
- 2018년에 처음 출간하여 2023년에 재출간한 소설〈고려거란전쟁: 고려의 영웅들〉이 양규와 김숙흥, 그리고 현종 등을 주연으로 제2차 여요전쟁을 다루었다.
[1] 1차 여요전쟁[2] 2~3차 여요전쟁[3] 1차 여요전쟁[4] 2차 여요전쟁(통주 전투)[5] 2차 여요전쟁[6] 3차 여요전쟁(귀주대첩)[주살] 7.1 7.2 [9] 1차 여요전쟁 (섭정)[10] 2차 여요전쟁(친정)[11] 1차 여요전쟁[12] 2~3차 여요전쟁[13] 안융진 전투같은 소규모 국지전이 있었으나 대규모 전면전 없이 서희의 외교 담판으로 끝났다.[14] 통주 전투 동원 병력을 중심으로 집계한 수치[15] 귀주 대첩 동원 병력 208,300명을 중심으로 집계한 수치[16] 기록에 과장해서 서술하는 호왈의 일종으로 추정되고 있다. 실제 병력을 60,000명 정도로 추정하기도 한다.[17] 다만 2차 여요전쟁 당시 통주 전투 한 곳에서만 고려군 전사자가 30,000명이나 발생했음이 확인된다.[18] 다만 3차 여요전쟁 당시 귀주대첩에서 100,000명의 거란군이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음이 확인된다.[19] <거란 성종의 고려 친정(親征) 배경에 대한 새로운 관점- 거란의 정세 분석을 중심으로> 권용철,《동방학지》, 2021, vol., no.197, pp. 1-25 (25 pages)[20] 1019년부터 1109년 고려의 여진 정벌 및 1125년 금나라-송나라 연합군에 의한 요나라의 멸망까지 약 100여년 동안 힘의 균형에 의한 평화기였다. 동시기 다른 지역에서는 지속적으로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것과 대조된다.[21] 거란의 침입이라고도 한다.[22] 종족적으로 보자면 거란은 광의의 몽골계여서 몽골쪽으로 좀 더 많이 흡수되었다고 할 수 있다.[23] 다만 다우르족이 거란족의 후계 민족이라는 학설이 있다.[24] 이 쪽도 상대적으로 묻히는 경향은 있다.[25] 다만 삼국의 유민의식은 무신정권 시기까지도 남아 그 무렵까지 지속해서 부흥운동이 일어나긴 했다. 물론 후삼국시대와는 비교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약세화된 것은 사실이나, 보통 이러한 유민의식이 온전히 사라진 계기는 여몽전쟁이라고 평가된다.[26] 다만, 하나의 국체를 끊임없이 유지한 나라의 국호가 여러 번 바뀌었을 때,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이름이 그 국체의 전(全) 시기를 대표하게 되는 경우는 흔하다. 대표적으로 고구려만 해도 장수왕 때부터 국호가 고려로 바뀌게 되었는데, 훗날의 왕건의 고려와 따로 구별하기 위해 이름 변경 이후에도 고구려라고 총칭하고 있다. 백제는 성왕 때 국호를 남부여로 변경했다는 기사가 존재하지만 여전히 백제라고 불린다. 비슷하게 당대에는 전혀 사용되지 않았던 명칭임에도 후대인들의 편의를 위한 통용명칭이 역사용어로서의 정식명칭으로 자리잡은 경우 또한 흔하다. 예를 들자면 일본 전국시대부터 영주들이 다스리던 영지를 일컫는 번(藩)도 당대에는 쓰이지 않았지만 후대의 역사학자들이 편의를 위해 통용하던 명칭이 정식용어로 자리잡게 된 경우이며, 중국사의 수많은 국호들도 당대에는 전혀 쓰이지 않았지만 후대인들의 편의를 위해 통용된 명칭이 정식명칭으로 자리잡았다(북연, 후연, 전진, 서진 등). 한국사에서도 물론 예외는 아니라 고조선, 북부여, 동부여, 후백제 같은 정식명칭으로 자리잡은 통용명칭이 얼마든지 있다. 따라서 여요전쟁 또한 특별히 혼동을 유발하는 게 아닌 이상 후대인들의 역사용어로서는 큰 문제가 없다고 볼 수 있다.[27] 이 때의 침공도 국지도발이 아니라 명확한 작전수행목표 하에 진행한 것이므로, 각각 하나의 전쟁으로 명명하여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이 경우 교과서의 3차 전쟁은 6차 전쟁이 된다.[28] 일단 전쟁이라 볼거리가 많고, 서희, 양규, 강감찬, 현종 등 역대급 걸물들이 대활약했으며, 무엇보다 안좋은 상황에서 시작해 온갖 국가적 위기와 고난을 겪었지만 결국 다 이겨내고 최고의 전성기를 이룩했다는 고진감래 서사도 있다.[29] 천추태후는 한국 정통사극의 계보를 끊어버린 망작이고, 고려 거란 전쟁은 천추태후에서 끊어지기 시작한 한국 정통사극의 부활의 불씨를 초반부에는 잘 살리면서 명작 또는 수작으로 나가는 듯 보이다가 중후반부에는 여러 논란을 일으키면서 망가져버려 땅 밑에 묻어버릴 정도의 망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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