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탁사정 卓思政 | |
출생 | 미상[1] |
사망 | 미상 |
경력 | 중랑장 급사중 동북계도순검사 어사중승 우간의대부 |
1009년 목종이 궁궐의 화재로 상심해 병이들어 정사를 돌보지 못하자 중랑장(中郞將)으로서 친종장군(親從將軍) 유방(庾方), 중랑장 류종(柳宗) · 하공진(河拱辰)과 함께 침전의 문 가까이에서 늘 숙직하며 급사중이 되었다.
강조의 정변이 일어나자 하공진과 함께 강조의 편에 섰다.
1010년 제2차 여요전쟁 당시 벌어진 서경 전투에서 동북계도순검사로서 중랑장 지채문과 함께 한기의 군사를 격파하고 임원역 남쪽에서 승려 법언과 함께 군사 9,000명을 이끌고 적군 3,000명을 살해하는 공을 세웠다. 그러나 거란의 반격으로 승려 법언이 전사하고, 전세가 불리해지자 서경을 버리고 도주했다.[2]
2차 여요전쟁 이후인 1011년 3월 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고, 4월에 우간의대부가 되었으나, 8월에 강조의 도당(徒黨; 불순한 사람의 무리)으로 몰려 박승(朴昇) · 최창(崔昌) · 위종정(魏從政) · 강은(康隱)과 함께 해도(海島)에 유배되었다. 이후의 기록은 알 수 없다.
강조의 정변이 일어나자 하공진과 함께 강조의 편에 섰다.
1010년 제2차 여요전쟁 당시 벌어진 서경 전투에서 동북계도순검사로서 중랑장 지채문과 함께 한기의 군사를 격파하고 임원역 남쪽에서 승려 법언과 함께 군사 9,000명을 이끌고 적군 3,000명을 살해하는 공을 세웠다. 그러나 거란의 반격으로 승려 법언이 전사하고, 전세가 불리해지자 서경을 버리고 도주했다.[2]
2차 여요전쟁 이후인 1011년 3월 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고, 4월에 우간의대부가 되었으나, 8월에 강조의 도당(徒黨; 불순한 사람의 무리)으로 몰려 박승(朴昇) · 최창(崔昌) · 위종정(魏從政) · 강은(康隱)과 함께 해도(海島)에 유배되었다. 이후의 기록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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