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몬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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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몬 시대(縄文時代)는 일본의 신석기 시대로서 기원전 14000년 ~ 기원전 300년에 해당 한다.[1]를 지칭하는 구분이다. 일본의 구석기 시대와 조몬 시대를 구분하는 기준은 토기의 출현, 수혈 주거의 보급, 패총의 형식 등을 들 수 있다. 조몬 시대의 끝은 지역에 따라 다르나 기본적으로는 야요이 시대의 등장과 함께 막을 내린 것으로 본다.
조몬 시대의 '조몬'은 조몬 시대의 토기를 장식한 새끼줄 문양인 '승문'(일본말로 조몬)에서 나온 말인데 한국의 빗살무늬 토기와 매치되는 유물들로, 조몬 토기의 경우 한반도 후기 신석기 토기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일본 각지의 신석기 유적에는 이러한 승문 문양의 토기가 많이 출토되고 있다. 조몬이 발음이 じょうもん이기 때문에 외래어 표기법을 무시하고 죠몽이라 쓰는 경우도 있다.
한반도 중남부는 원래 한국어족이 선주민이 아니었다. 고시베리아인, 조몬인 소수 등이 거주하고 있었다. 예맥족도 요서에 기원전 2세기에 출현했다. 이미 신석기 시대 장강에서 온 정체불명의 언어를 쓰는 하플로 그룹 O1b2 집단이 한반도 중남부를 거쳐 신석기 시대 말기인 일본에 가서 쌀, 토목, 관개, 청동기 등을 전달해주고 이후 야요이 시대가 열리게 된다.
기원전 1만 4600년 즈음 해수면 상승 때문에 한반도와 일본 열도가 완전히 분리되었다. 이때 고립되어 일본에 정착한 사람들이 문화를 이루고 이를 조몬 문화라 한다. 해수면 상승으로 내륙 깊숙이 파고든 해안가, 즉 후미가 많아졌는데 이 때문에 조몬인들의 어업활동이 증가하여 자연스레 패총을 비롯한 수산업과 관련된 유적들이 많이 보이고 있다. 또한 침엽수림이 활엽수림으로 대체되면서 맷돼지, 사슴을 비롯한 중소형 동물들이 번창하기 시작, 사냥 역시 발달하였는데, 일본인들이 당시 먹은 고기의 과반수가 멧돼지와 사슴이다. 단 정주생활의 흔적이 발견된 아오모리 지역에선 날다람쥐나 토끼같은 소형 동물을 주식으로 한 것으로 추정된다. 활엽수림의 도토리, 밤 등을 채취, 재배해서 먹었는데 이를 위해 토기가 발전했다. 또한 이러한 열매를 갈아 과자로 만들어 먹거나, 간혹 다진 고기를 섞어 미트볼 비슷하게 만든 것도 발견된 바 있다. 현대 일본에서는 이를 '조몬 쿠키'라고 부르며, 재현품을 만들어 파는 곳도 있다. 또한, 연혈토광이라 불리는 훈제, 집석이라 불리는 찜 요리를 한 흔적도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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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유산 일본 북부의 조몬 유적군"에서 제시한 정주의 단계 |
거주 문화로는 수혈주거지라 해서 땅을 파서 5~6명 단위의 가족 생활을 했다. 3가족이 들어갈 수 있는 큰 주거지도 발견되었는데 학계에선 이를 회의장으로 추측하고 있다.
조몬시대의 전반기에는 수 개에서 수십 개의 수혈주거가 하나의 취락을 이루었으나, 중후반기로 가면서 수십 개에서 백을 넘는 취락이 형성되었다. 특히 산나이마루야마 유적은 발견된 주거만 500개가 넘는다. 조몬시대 전중반기엔 기온이 올라가 인구가 늘어나고 취락이 많아지면서 그 지역의 거점취락이 형성되고 취락의 부속시설도 현저해진다. 조몬시대 후반기에 기온이 낮아져 거점취락은 줄어들었지만 대신 여러 취락이 분산되어 공동의 제사터와 묘지를 건설, 관리, 유지하는 체제가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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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몬의 여신상(야마가타현 니시노마에 유적 출토) | 발치와 연치 | 굴장 |
종교는 초기 신토를 믿었다고 하며 애니미즘과 샤머니즘에 바탕을 두었다고 한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아이누 종교와 연관지어보려고 하지만 기록이 많지 않은 관계로 확실한 건 없다. 최근에는 신사나 제사 의식에 있어서 연속성을 보이는 고고학적 유물들을 바탕으로 야요이 및 고훈 시대 이후의 신토와 조몬인들의 신토의 연속성에 주목하는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단적으로 후지산에 대한 신앙도 조몬 시대의 제사 유물이 발견되어 이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한편 조몬인의 유골을 살펴보면 대부분 앞니와 송곳니가 약속이나 한듯이 빠져 있거나 포크 모양으로 갈려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전자를 발치, 후자를 연치라고 부른다. 확실하지 않지만 조몬 사회의 일원으로서 인정한다는 성인식의 일환으로 행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장례 문화로는 토광묘, 굴장이 대표적이다. 굴장은 시신의 손발을 구부려 매장하는 것으로 시신의 복부나 머리에 돌을 올려 놓기도 한다. 그 이유로는 죽은 사람이 되살아 나는 것을 대비한다는 설과 반대로 죽은 영혼이 육체로부터 빠져나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라는 설이 있다. 그 외에 주목할 만한 것으론 집단묘로 추정되는 환상열석 형태의 무덤이 있는데 큐슈를 제외한 일본 전역에서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으며 아키타의 오유 환상열석이 유명하며 국가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또 집을 재활용한 폐옥묘 장례가 있었는데 이는 급사한 사람들을 처리하기 위한 방식으로 추정된다.
한편 조몬인의 유골을 살펴보면 대부분 앞니와 송곳니가 약속이나 한듯이 빠져 있거나 포크 모양으로 갈려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전자를 발치, 후자를 연치라고 부른다. 확실하지 않지만 조몬 사회의 일원으로서 인정한다는 성인식의 일환으로 행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장례 문화로는 토광묘, 굴장이 대표적이다. 굴장은 시신의 손발을 구부려 매장하는 것으로 시신의 복부나 머리에 돌을 올려 놓기도 한다. 그 이유로는 죽은 사람이 되살아 나는 것을 대비한다는 설과 반대로 죽은 영혼이 육체로부터 빠져나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라는 설이 있다. 그 외에 주목할 만한 것으론 집단묘로 추정되는 환상열석 형태의 무덤이 있는데 큐슈를 제외한 일본 전역에서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으며 아키타의 오유 환상열석이 유명하며 국가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또 집을 재활용한 폐옥묘 장례가 있었는데 이는 급사한 사람들을 처리하기 위한 방식으로 추정된다.

조몬 시대 중기를 대표하는 유물이자 특히 장식성이 뛰어난 토기로 유명하다. 1936년 우마타카 유적을 시작으로 동일본 전체에서 200곳이 넘는 유적에서 출토되었다.

흔히 일본식 토우하면 떠오르는 이 토우가 바로 조몬시대 토우다. 얼굴에 차광기(흔히 '고글' 이라고 부른 것)를 쓴 것 같은 모습 때문에 '차광기 토우'(샤코우키 도구우) 라고도 부른다. 독특한 외관 때문에 일본 대중문화에서도 자주 패러디된다. 예를 들어 디지몬 시리즈의 토우몬이나 뱀파이어 시리즈의 포보스, 무적초인 점보트3의 가이조쿠, 유희왕 듀얼몬스터즈/도마 편의 오리컬코스 슈노로스, 포켓몬스터의 점토도리, 여신전생 시리즈의 아라하바키 등.
일본 전역에서 1만 5천 개 정도 출토되었으며 조몬 시대 조기에서 만기에 이르기까지 차차 정교해지는 것이 보인다. 위의 사진은 조몬시대 만기의 토우. 당시 조몬인들은 자신을 상징하는 토우를 만들고 자신이 아프면 토우에서 아픈 부분을 찾아 부쉈기 때문에 온전한 형태의 토우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평범한 사람 형태뿐만 아닌 조개, 임산부, 곰, 원숭이를 묘사한 토우도 존재한다.
그 외에 귀걸이, 칠공예, 어린아이의 발을 찍은 점토 유적 등이 출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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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홋카이도 · 북도호쿠의 조몬 유적군"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유적군의 대표적 유적으로는 오다이야마모토 유적[4], 산나이마루야마 유적, 오유 환상열석, 가메가오카 유적 등이 있다.

1992년 아오모리현에서 실시한 유물조사 결과 조몬시대 전기와 중기에 걸친 취락 유적이 발견되었다. 건물, 도로, 무덤, 저장시설 등이 계획적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출토된 유물의 수도 2,000점, 발견된 취락만 500곳이 넘는 등 조몬시대 최대의 유적이었다. 규모 뿐만 아니라 마을 중간 부근에 길이 32m, 폭 10m의 집회소가 발견되었고, 야요이 시대의 특징으로 알고 있었던 고상가옥이 발견되었으며, 바다를 향해 뻗은 길이 420m에 폭 15m의 흙으로 포장된 도로가 발견되어 질적으로도 매우 높은 수준의 문화를 가지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이 유적의 북서쪽에는 지름 1.8m의 기둥을 박은 듯한 구멍이 6개 발견되었는데, 그 구멍에 목재기둥 6개를 세워놓고 10m 위에 고상식 건조물을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이 대형 건조물의 용도에 대해서는 종교적 의미를 가진 집회장이라는 설이 있고, 쓰가루해협을 지나는 배들의 이정표로 삼은 망루라는 설이 있다.
인근의 계곡은 쓰레기장으로 이용되었다. 이곳은 수분이 많아 공기로부터 차단되어 있었기 때문에, 토기와 석기 외에도, 통상은 남지 않는 목제품이나 칠기, 동물이나 생선의 뼈, 비늘, 식물의 씨, 나무의 열매, 기생충 알 등이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다.
아이는 죽을 때 거대한 토기 안에 넣어 주거 근처에 매장했다. 성인은 원형과 타원형 구멍에 매장했다. 성인의 무덤은 도로를 따라 양쪽에 두줄로 배치되었다.
이곳에서 출토되는 토우는 대부분 십자형 모양을 띠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이 유적의 마스코트 산마루(さんまる)도 여기서 모티브를 따왔다.
취락의 바깥에는 지름과 깊이 2m의 저장시설이 있다. 이곳에서 밤 등의 견과류나 나무열매 등이 저장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토기를 만들기 위한 점토와 화산재 채굴장도 발견되었다.
마지막으로 한반도, 규슈, 홋카이도에서 만들어진 흑요석, 비취 등의 도구가 발견된다는 점에서 동해를 무대로 한 원거리 해상 교역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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