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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
사망 |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 |
서훈 | 건국훈장 독립장 |
이상호는 1926년 2월 19일 경상북도 대구부 봉산정(현 대구광역시 중구 봉산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대구상업학교에 재학중이던 1945년 5월에 동교생 김상길(金相吉)·서상교 등과 함께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맹세하고 항일학생결사 태극단(太極團)을 조직하였다. 이때 태극단이란 명칭은 한말 이래 사용되어온 태극기를 상징하여 정한 것이며, 동 결사의 약칭으로 T.K.D를 사용하기도 했다. 이후 그와 동지들은 일본군입대 반대 등 일제식민통치에 대항하는 내용의 유인물을 만들어 뿌리면서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한편 조직확대를 위해 동지포섭 활동에 주력하였다.
이들은 1943년 4월에 김정진(金正鎭)·이준윤(李浚允)·이원현(李元鉉)·윤삼용(尹三龍) 등을 동지로 포섭한 것을 비롯하여 학교단위로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동년 5월에는 그동안 가입한 단원을 포함하여 전원이 대구시 앞산인 비파산(琵琶山) 약수터에 모여 결단식을 가졌으며, 그와 간부들은 구체적 투쟁방안에 관하여 협의하고 조직을 정비하였다.
태극단의 조직은 크게 일반조직, 특수조직으로 나누었으며 최고의결기관으로써 간부회의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일반조직은 다시 육성부(育成府) 아래 관방국(官房局)·체육국(體育局)·과학국(科學局) 등 3국을 두고, 그밑에 군사부(軍事部)·항공부(航空部) 등 10여부(部)를 두어 체계화했으며, 특수조직은 건아대(健兒隊)라 칭하여 중학교 1·2학년생과 국민학교 상급반 학생을 대원으로 가입시켜 이들을 장차 단원으로 육성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이때 그는 단장으로 선임되어 동결사를 통솔하며 지도하였다.
태극단의 투쟁방략은 조직확대를 통하여 전국의 학교와 각 지역별로 조직을 완성한 후 여론을 환기시키며 본격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는 것인데, 만약 국내에서의 투쟁이 여의치 못할 때에는 중국으로 집단 망명하여 그곳에서 항쟁을 계속한다는 계획도 세웠다. 그리하여 단원들은 용두산(龍頭山)·비파산 등 비밀장소를 이용하여 학술연구토론회·각종 체육회 등을 개최하여 동지간 유대의식과 민족적 교양의 함양 및 체력증강에 힘을 쏟았다. 또한 궁극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군사학 연구에도 정진하여 군사관계서적의 번역, 글라이더 및 폭발물 제조에 관한 연구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1943년 5월 어느 배반자의 밀고 인해 태극단의 전모가 일제 경찰에게 발각되고 말았고, 그는 이때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44년 1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단기 5년, 장기 10년형을 선고받고 김천소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2월 병보석으로 출옥하였으나 고문의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1945년 12월 9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이상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에 그를 기리는 위패를 세웠다.
이들은 1943년 4월에 김정진(金正鎭)·이준윤(李浚允)·이원현(李元鉉)·윤삼용(尹三龍) 등을 동지로 포섭한 것을 비롯하여 학교단위로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동년 5월에는 그동안 가입한 단원을 포함하여 전원이 대구시 앞산인 비파산(琵琶山) 약수터에 모여 결단식을 가졌으며, 그와 간부들은 구체적 투쟁방안에 관하여 협의하고 조직을 정비하였다.
태극단의 조직은 크게 일반조직, 특수조직으로 나누었으며 최고의결기관으로써 간부회의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일반조직은 다시 육성부(育成府) 아래 관방국(官房局)·체육국(體育局)·과학국(科學局) 등 3국을 두고, 그밑에 군사부(軍事部)·항공부(航空部) 등 10여부(部)를 두어 체계화했으며, 특수조직은 건아대(健兒隊)라 칭하여 중학교 1·2학년생과 국민학교 상급반 학생을 대원으로 가입시켜 이들을 장차 단원으로 육성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이때 그는 단장으로 선임되어 동결사를 통솔하며 지도하였다.
태극단의 투쟁방략은 조직확대를 통하여 전국의 학교와 각 지역별로 조직을 완성한 후 여론을 환기시키며 본격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는 것인데, 만약 국내에서의 투쟁이 여의치 못할 때에는 중국으로 집단 망명하여 그곳에서 항쟁을 계속한다는 계획도 세웠다. 그리하여 단원들은 용두산(龍頭山)·비파산 등 비밀장소를 이용하여 학술연구토론회·각종 체육회 등을 개최하여 동지간 유대의식과 민족적 교양의 함양 및 체력증강에 힘을 쏟았다. 또한 궁극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군사학 연구에도 정진하여 군사관계서적의 번역, 글라이더 및 폭발물 제조에 관한 연구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1943년 5월 어느 배반자의 밀고 인해 태극단의 전모가 일제 경찰에게 발각되고 말았고, 그는 이때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44년 1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단기 5년, 장기 10년형을 선고받고 김천소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2월 병보석으로 출옥하였으나 고문의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1945년 12월 9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이상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에 그를 기리는 위패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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