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기(本紀)]
※ 21권 ~ 50권은 志에 해당. 구당서 문서 참고 [열전(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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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문공(東海文公) 徐堅 | 서견 | |
작호 | 동해군 개국공(東海郡 開國公) |
시호 | 문(文) |
성 | 서(徐) |
이름 | 견(堅) |
자 | 원고(元固) |
부친 | 서제담(徐齊聃) |
출신 | 호주(湖州) 장성현(長城縣) |
생몰 | ? ~ 729년 |
당나라의 관료로 자는 원고(元固). 서제담의 아들이었다.
서견은 어린 시절 학문을 좋아했고 경서와 사서를 널리 읽었으며 성품이 너그럽고 후덕했다. 수재(秀才)로 급제한 뒤 분주(汾州) 참군(參軍)이 되었고 만년현(萬年縣) 주부(主簿)로 전임되었다
성력(聖歷) 연간에 측천무후가 삼양궁(三陽宮)에 있을 때 어사대부(御史大夫) 양재사, 태자좌서자(太子左庶子) 왕방경(王方慶)이 동도유수(東都留守)가 되면서 서견은 판관(判官)으로 기용되었다. 측천무후는 서견에게 《당사(唐史)》의 첨삭을 명했으나 신룡정변이 일어나고 측천무후가 퇴위하면서 당사의 첨삭은 중단되었다.
중종이 복위한 뒤 서견은 다시 급사중으로 전임되었다. 당시 옹주(雍州)의 위월장(韋月將)이 무삼사의 행적에 대해 고발했다가 오히려 무삼사로부터 모함을 당하자 중종이 위월장의 처형을 명했다. 이때는 한여름이었는데 서견은 위월장의 처형을 반대하는 표를 중종에게 올렸고 중종은 서견의 주장을 받아들여 장형을 내리고 영표(嶺表)로 유배하였다.
710년, 예종이 즉위한 뒤 서견은 형부시랑(刑部侍郞)에서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가 더해졌고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로 임명되었으며 황문시랑(黃門侍郞)으로 전임되었다.
현종이 즉위한 뒤 강주(絳州) 자사로 전임되었고 5번의 전임을 거쳐 비서감(秘書監)이 되었다.
725년, 다시 좌산기상시로 전임되었다. 같은 해에 현종이 여정서원(麗正書院)을 집현원(集賢院)으로 고치면서 서견은 집현원 학사가 되었고 장열을 보좌했으며 동해군공(東海郡公)으로 봉해졌다.
서견은 729년에 죽었다. 현종은 서견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여 사람을 보내 조문했으며 태자소보(太子少保)로 추증하고 문(文)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성력(聖歷) 연간에 측천무후가 삼양궁(三陽宮)에 있을 때 어사대부(御史大夫) 양재사, 태자좌서자(太子左庶子) 왕방경(王方慶)이 동도유수(東都留守)가 되면서 서견은 판관(判官)으로 기용되었다. 측천무후는 서견에게 《당사(唐史)》의 첨삭을 명했으나 신룡정변이 일어나고 측천무후가 퇴위하면서 당사의 첨삭은 중단되었다.
중종이 복위한 뒤 서견은 다시 급사중으로 전임되었다. 당시 옹주(雍州)의 위월장(韋月將)이 무삼사의 행적에 대해 고발했다가 오히려 무삼사로부터 모함을 당하자 중종이 위월장의 처형을 명했다. 이때는 한여름이었는데 서견은 위월장의 처형을 반대하는 표를 중종에게 올렸고 중종은 서견의 주장을 받아들여 장형을 내리고 영표(嶺表)로 유배하였다.
710년, 예종이 즉위한 뒤 서견은 형부시랑(刑部侍郞)에서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가 더해졌고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로 임명되었으며 황문시랑(黃門侍郞)으로 전임되었다.
현종이 즉위한 뒤 강주(絳州) 자사로 전임되었고 5번의 전임을 거쳐 비서감(秘書監)이 되었다.
725년, 다시 좌산기상시로 전임되었다. 같은 해에 현종이 여정서원(麗正書院)을 집현원(集賢院)으로 고치면서 서견은 집현원 학사가 되었고 장열을 보좌했으며 동해군공(東海郡公)으로 봉해졌다.
서견은 729년에 죽었다. 현종은 서견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여 사람을 보내 조문했으며 태자소보(太子少保)로 추증하고 문(文)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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