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 7세

최근 수정 시각:
프랑스 발루아 왕조 제5대 국왕
샤를 7세
Charles VII
CharlesVII
장 푸케(Jean Fouquet)가 1450년에 남긴 초상화[1]
출생
사망
1461년 7월 22일 (향년 58세)
프랑스 왕국 므욍쉬르예브르
재위기간
프랑스 국왕
서명
샤를 7세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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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
이름
샤를 드 프랑스
(Charles de France)
배우자
앙주의 마리 (1422년 결혼)
자녀
루이 11세, 라드공드, 카트린, 욜랑드[2], 잔, 마들렌, 샤를, 마리(사생아), 샤를로트(사생아), 잔(사생아)
아버지
어머니
형제
이자벨, 잔, 샤를, 마리, 미셸, 루이, , 카트린
종교
 
 
 
 
 
 
 
 
 
 
 
 
 
 
 
 
 
 
 
 
 
 
 
 
 
1. 개요2. 생애3. 가족
3.1. 조상3.2. 왕비3.3. 정부3.4. 자녀
4. 평가
4.1. 잔 다르크와의 관계
5. 기타6. 대중 매체7. 둘러보기


 
 
 
 
 
 
 
 
 
 
 
 
 
 
 
 
 
 
 
 
 
 
 
 
 
 
 
 
 
 
 
 
 
 
 
 
 
 
 
 

1. 개요[편집]

 
 
 
 
 
 
 
 
 
 
 
 
 
 
 
 
 
 
 
 
 
 
 
 
 
 
 
 
 
 
 
 
 
 
 
 
 
 
 
 
프랑스 왕국의 국왕. 발루아 왕조의 제5대 왕으로 샤를 6세와 그의 왕비 이자보 드 바비에르 사이에서 태어났다.

프랑스의 멸망 위기까지 몰리던 백년전쟁을 결국 승리로 종결시켰으며, 귀족들이 강세를 보이던 중세시대 봉건제도에서 벗어나 중앙집권 정책을 폈다. 이에 따라 승리왕(le Victorieux)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리고 프랑스라는 국가의 정체성을 백성들에게 각인시켰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귀족들과의 갈등은 상당했고,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해서 냉혹하고 비정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는 등 어두운 면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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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가족[편집]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샤를 7세
(Charles VII)
샤를 6세
(Charles VI of France)
샤를 5세
(Charles V of France)
장 2세
(Jean II of France)
룩셈부르크의 보나
(Bonne de Luxembourg)
부르봉의 잔
(Joanna of Bourbon)
피에르 1세 드 부르봉
(Pierre Ier de Bourbon, Duc de Bourbon)
발루아의 이자벨
(Isabella of Valois)
이자보 드 바비에르
(Isabeau de Bavière)
슈테판 3세
(Stephen III, Duke of Bavaria)
슈테판 2세 폰 바이에른
(Stephen II, Duke of Bavaria)
시칠리아의 엘리사베타
(Elisabeth of Sicily)
타데아 비스콘티
(Taddea Visconti)
베르나보 비스콘티
(Bernabò Visconti)
베아트리체 레지나 델라 스칼라
(Beatrice Regina della Scala)
 
 
 
 
 
 
 
 
 
 
 
 
 
 
 
 
 
 
 
 
 
 
 
 
 
 
 
 
 
 
 
 
 
 
 
 
 
 
 
 
 
 
 
 
 
 
 
 
 
 
 
 
 
 
 
 
 
 
 
 
 
 
 
 
 
 
 
 
 
 
 
 
 
 
 
 
 
 
 
 
Marie of Anjou
 
 
 
 
 
 
 
 
 
 
 
 
 
 
 
 
 
 
 
 
 
 
 
 
 
 
 
 
 
 
 
 
 
 
 
 
 
 
 
 
 
 
 
 
 
 
 
 
 
 
 
 
 
 
 
 
 
 
 
 
 
 
 
 
 
 
 
 
 
 
 
 
 
 
 
 
 
 
 
 
  • 앙투아네트 드 마젤레(1434 ~ 1474): 아녜스 소렐의 사촌. 1450년 아녜스 소렐이 급사한 후 16세의 나이에 왕실 침실 관리인을 맡던 빌르키에 남작 앙드레와 결혼했지만 실제로는 사촌의 뒤를 이어 샤를 7세의 정부가 되었다. 일설에 따르면 앙투아네트는 부르고뉴에 망명 중이던 도팽 루이에게 샤를 7세에 대한 정보를 은밀히 보냈다고 한다. 1461년 샤를 7세가 사망한 뒤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의 정부가 되었다. 도팽 시절 앙투아네트의 도움을 받았던 루이 11세는 이번에도 그녀가 프랑수아 2세의 정보를 자신에게 넘기길 바랐고 앙투아네트도 초반에는 그 명령을 충실히 따랐다. 하지만 나중에는 프랑수아 2세에게 진심으로 빠져들어, 프랑스에 대항하는 브르타뉴군의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자신이 가진 보석을 팔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루이 11세는 프랑스에 있는 앙투아네트 드 마젤레의 재산을 몰수했다고 한다.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앙주의 마리
(Marie of Anjou)
1남
루이 11세
(Louis XI)
스코틀랜드의 마거릿[3]
1녀
발루아의 라드공드
(Radegonde of Valois)
2녀
샤를루아 백작부인 카트린
(Catherine, Countess of Charolais)
2남
발루아의 자크
(Jacque of Valois)
3녀
사보이아 공작부인 욜란다
(Yolande, Duchess of Savoy)
아메데오 9세
슬하 6남 4녀[5]
4녀
부르봉 공작부인 잔
(Jeanne, Duchess of Bourbon)
3남
발루아의 필리프
(Philip of Valois)
5녀
발루아의 마르그리트
(Margaret of Valois)
6녀
발루아의 잔[6]
(Jeanne of Valois)
7녀
발루아의 마리[7]
(Marie of Valois)
8녀
발루아의 이자벨
(Isabella of Valois)
9녀
비아나 공비 마들렌
(Madeleine, Princess of Viana)
비아나 공 가스통 드 푸아[8]
슬하 1남 1녀[9]
4남
베리 공작 샤를[10]
(Charles, Duke of Berry)
아녜스 소렐
(Agnès Sorel)
1녀
타이르부르 백작부인 마리 드 코에티비
(Marie de Coétivy, Countess of Taillebourg)
타이르부르 백작 올리비에 드 코에티비
2녀
몰레브리에 백작부인 샤를로트 드 브레제[11]
(Charlotte de Brézé, Countess of Maulévrier)
몰레브리에 백작 자크 드 브레제[12]
슬하 1남
3녀
발루아의 잔
(Jeanne of Valois)
 
 
 
 
 
 
 
 
 
 
 
 
 
 
 
 
 
 
 
 
 
 
 
 
 
 
 
 
 
 
 
 
 
 
 
 
 
 
 
 

4. 평가[편집]

 
 
 
 
 
 
 
 
 
 
 
 
 
 
 
 
 
 
 
 
 
 
 
 
 
 
 
 
 
 
 
 
 
 
 
 
 
 
 
 
한국에서는 조선선조처럼 대개 운좋게 잔 다르크를 얻어 위기에서 벗어나자, 그녀를 질투해 발목만 잡다가 토사구팽해버린 배은망덕한 왕으로서의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한 인물이다. 하지만 결코 무능한 인물이 아니었고 일방적으로 잔 다르크 덕만 보지도 않았다. 샤를 7세는 아주 유능한 정치가이자 전시 지도자로, 잉글랜드와의 전쟁에서 최종 승리하여 백년전쟁을 종식시키고, 하나의 프랑스를 형성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잔과 노선이 갈라진 부분에 대해서도 최소한 전쟁 수행 측면에선 비판받지 않는다. 공세종말점이나 정치, 전략에 대한 고려 자체가 없었던 잔이 내세운 강경노선보다 결과적으로 샤를 7세의 노선이 옳은 선택이었음을 현대 역사가들에게 인정받고 있기 때문.

잔 다르크가 죽은 후, 결국 샤를은 조르주 드 라 트레무아유의 숙청을 시작으로 왕권 강화에 성공하여 전쟁수행의 주도권을 확실히 잡았다. 그 이후로 자신이 원하는대로 판을 짰고, 궁극적으로 프랑스의 완승을 이끌어냈다. 잔 다르크의 생전 위업 역시 샤를의 대대적인 지원이 있어서 가능했던 것이며 잔의 커리어 후반기, 파리 수복 관련해서는 명백히 샤를 7세의 결정이 옳았음이 오늘날 학자들의 정론이다. 또한 잔 다르크와의 관계 또한 단순하게만 해석할 수는 없으며, 자세한 내용은 후술한다.

많은 노력 끝에 완성한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중앙집권적이고 조세를 확보할 수 있는 정책을 펴서 프랑스의 봉건시대를 사실상 끝내게 만들고 근대로 나아가게 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지나치게 계산적인 행보로 부하들을 이용하다가 나중에는 매몰차게 버리거나 숙청하는 일도 많았기에, 냉혈한이라는 비판도 받는다.[13] 다만 샤를이 버리거나 숙청한 인물들 상당수는 왕권에 위협이 될 정도의 권세를 탐한 인물들이었고, 아르튀르 드 리슈몽처럼 철저히 절대왕권 아래에서 허용되는 수준의 권력에 만족하던 이들은 끝까지 버려지지 않고 살아남았다.[14]

구국 영웅을 이용하다가 버렸다는 인식 때문에 1세기 후 지구 반대편에 태어날 조선 제14대 임금 선조와 자주 비교되는 군주이나, 사실 이런 비교는 지나친 면이 있다. 전시지도자로서 최악의 모습을 많이 보여준 선조와는 달리, 샤를 7세는 선조와 비교도 안될만큼 최악의 환경에서 즉위하고도 일관되게 책임감 있는 행보를 보였다. 잔 다르크가 죽은 후에도 온갖 개혁으로 나라를 내부로부터 안정시키고, 수십년 동안 항전하여 기어이 본인의 능력으로 대승리를 이끌어내는 등 전시지도자로서 훌륭한 인물이었다. 전시 군주라는 차이점을 제외하고 보면, 권력자들을 상대로는 냉혹한 숙청도 불사하며 왕권을 강화했지만 백성들에게는 평화와 안정된 민생을 안겨준 자애로운 명군이었다는 점에서 오히려 태종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잔 다르크가 유명해서 샤를 7세는 그냥 우유부단하고 무능한 왕, 배은망덕한 왕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인터넷의 발달과 함께 수많은 인물들이 재평가되고 이것이 순식간에 퍼져나가는 시대에 들어서면서, 잔 다르크 역시 결점이나 실수를 했음이 알려지고, 동시의 샤를 7세의 업적이 재평가를 받기도 한다. 사실 이전부터 전문가들은 샤를 7세를 무능한 왕이 아니라 노회하고 날카로운 정치가, 멸망 위기에 처한 나라를 지켜내면서 왕권 강화까지 이뤄낼만큼 신중하고 계산적인 인물로 보고 있었고, 이것이 현대에 들어서 일반인들에게도 퍼진 것. 그는 4대에 걸쳐서 선대 왕들이 해내고자 했지만 실패한 일을 자기 대에 이루어 프랑스를 강하게 만들었고, 로마시대 이후 프랑스 왕 최초로 상비군을 만들어 이를 굳히는 데 성공했으며, 왕권을 강화했다. 즉 샤를 7세는 유럽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인물들 중 하나였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능력과 업적에 대한 학계와 대중의 재평가가 이루어졌지만 이것과 별개로 현대 21세기에 이르러서도 샤를 7세 개인의 대중적 인식과 인기, 매력과 호감도는 역대 프랑스 왕들을 통틀어 여전히 매우 나쁘다. 존재 자체만으로 신화 같은 삶과 존재감을 뿜어낸 프랑스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구국 영웅이자 성녀인 잔 다르크를 재판에서 구해주지 않고 방치한 모습은 여전히 토사구팽으로 보일 여지가 많아서 개인의 인상 자체는 비호감에 머무르고 있다. 생전에 그려진 프로필 상단의 초상화와 어진도 객관적으로 봐도 속내를 알 수 없는 교활하고 얍삽해 보이는 못생긴 비주얼도 샤를 7세의 부정적인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데에 적지 않게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15] 누구 하나 구해주는 이 없이 잔혹하게 화형당해 잿더미로 사라진 잔 다르크의 최후와 희생이, 계산적이고 때로는 냉혹하며 비정하기까지 했던 샤를 7세의 모습과 더욱 대비가 된 탓에 현대인들에게는 여러모로 미움을 받는 왕이다.

다만 이 정도로 부정적인 인식은 후대에 잔 다르크의 드라마틱하면서도 비극적인 일생이 부각되다보니 생긴 것이고, 당대의 프랑스 백성들에 샤를 7세는 존경 받는 명군이었다. 멸망 직전까지 몰려있던 나라를 기어이 승전국으로 만들고, 부국강병과 민생 안정을 모두 이뤄낸 군주를 백성들 입장에서 존경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16] 잔 다르크의 죽음에 대해서도 그녀에게 사형을 선고한 피에르 코숑과 이단 재판을 명령한 랭커스터의 존이 욕을 먹었지, 구하지 못한 샤를 7세가 딱히 비난을 받지는 않았었다.
 
 
 
 
 
 
 
 
 
 
 
 
 
 
 
 
 
 
 
 
 
 
 
 
 
 
 
 
 
 
 
 
 
 
 
 
 
 
 
 
 
 
 
 
 
 
 
 
 
 
 
 
 
 
 
 
 
 
 
 
 
 
 
 
 
 
 
 
 
 
 
 
 
 
 
 
 
 
 
 
국내에서는 샤를 7세와 잔 다르크의 관계를 선조와 이순신의 관계처럼 단순하게 보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이 두 사람의 관계는 훨씬 복잡하고 해석이 많이 갈린다. 이순신에 대한 노골적인 불신과 박대를 보였던 선조와는 달리, 샤를 7세는 적어도 기록상으로는 잔에게 그런 태도를 보였다는 근거가 전혀 없다. 샤를 7세가 잔을 버렸다는 인식이 생긴 원인은 콩피에뉴 공방전에서 포로로 잡힌 잔을 구하지 않았다는 부분 때문인데, 이때 부르고뉴 측에서 몸값을 제시했는데도 불구하고 프랑스 궁정에서 그 몸값을 지불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샤를 7세가 왜 잔의 몸값을 지불하지 않았는지, 그 당시 프랑스 궁정에서 잔을 두고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공식적으로 기록이 남은 것이 없다. 그나마 그 당시 프랑스 궁정의 상황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은, 베네치아 공화국의 상인이자 연대기 작가였던 안토니오 모로시니가 남긴 기록이다. 당시 베네치아 상인들은 프랑스 궁정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기에, 외부인들이 알 수 없는 궁정 내의 상황들을 접하기가 쉬웠다. 그리고 모로시니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샤를 7세는 잔에게 완전히 관심을 끊어버렸다는 인식과는 달리, 부르고뉴에 "프랑스에 있는 부르고뉴 포로들의 대우는 잔 다르크가 받는 대우에 달렸다"는 말을 전하여 잔의 신변 보호를 시도했다고 한다. 또한 부르고뉴 측에서 제안한 잔의 몸값을 당시 프랑스의 재정상태로 지불하기는 어려웠기에, 몸값을 깎는 식의 협상도 고려했다고 한다.#[17] 다만 그 협상이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 이유는 불명이다. 다만 설령 샤를이 잔을 진심으로 구하고 싶었다 해도, 궁정 귀족들이 반대를 했다면 당시의 약한 왕권으로는 억누를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명확히 기록에 남겨진 것들만 보면, 샤를 7세는 잔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우호적인 태도만 보였다. 많은 이들의 의심을 받고 있던 잔을 믿어주고 전장으로 보내줬고, 랭스에서 대관식을 치른 후에는 그녀의 소원대로 동레미의 세금을 영구히 면제해주기도 했다. 그리고 파리 공방전 실패 이후로 궁정 내에서 잔은 입지가 추락하고 고립된 상태였는데[18], 그 와중에도 샤를 7세는 잔에게 또 병력을 주어 생피에르르무티에 공략 임무를 맡기는 등 그녀에게 활약할 기회를 주었다. 게다가 이때 생피에르르무티에는 공략했으나 라 사리테 공략은 실패하여 반쪽짜리 성공을 거두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공로를 크게 치하하며 귀족 칭호까지 내려주었다. 콩피에뉴 공방전 당시에는 병력을 주지 않았으나, 이때는 부르고뉴와 휴전 협정을 맺은 상태였기에 중앙군을 내어주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마디로 샤를 7세는 정치적 위험조차 감수해가며 잔을 전폭적으로 지원해주었으며, 그의 생애를 통틀어 누군가를 이렇게까지 과감하게 믿고 밀어준 사례는 찾기 힘들다.

또한 훗날 샤를 7세가 잔의 명예를 회복시켜준 것을 두고도 왜 잔이 죽은지 수십년이 지나서야 했느냐, 본인의 정통성을 지키기 위한 정치적 계산에 불과했던 것 아니냐 등의 비난이 많이 나온다. 그러나 애초에 잔이 화형 당했던 루앙을 탈환한 것이 1450년이 되어서야 이루어진 일이었고, 샤를은 루앙 함락 후 몇달만에 신속히 잔이 받았던 이단 재판을 재조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샤를 입장에서는 잔의 명예 회복을 가능한 한 빠르게 시작한 것이기에, 늦었다는 비난은 부당하다. 그리고 본인의 정통성을 지키기 위한 정치적 계산이라는 말은 충분히 그럴 듯하지만, 이 부분도 좀 더 생각을 해볼 여지가 있다. 당시 샤를은 귀족들을 제압하고 왕권 강화에 성공한 강력한 군주였고, 백성들과 병사들에게 찬양을 받고 있었다. 그런 그가 아직 전쟁으로 바쁜 와중에 잔의 명예 회복을 신속하게 시작한 것을 단지 정통성을 지키기 위해서만이라고 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당시의 샤를에게는 그렇게까지 급하고 절박한 문제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정통성을 지키고픈 마음도 있겠지만, 잔을 위한 마음이 아예 없었다고 확언하기도 어렵다.

그리고 잔 또한 샤를을 '하느님이 선택한 진정한 프랑스의 왕'으로 여기며 그의 권위를 드높이기 위해 최선을 다해왔고, 그녀는 샤를의 왕권에 도움이 됐으면 됐지 위협이 될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리고 루앙에서 재판을 받을 당시에 한 신학자가 샤를 7세를 맹렬히 비난하자, 잔은 그 신학자에게 "당신은 그 선량하신 왕을 비난할 자격이 없으며, 비난을 해야겠다면 나에게만 하라"라는 식으로 받아치기도 했다.# 잔은 샤를이 자신을 버렸다 여기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마지막까지 신앙심 뿐만 아니라 샤를에 대한 충성심도 지킨 것이다. 부모에게조차 배신 당하고 평생 의심 속에서 살아야 했던 샤를 입장에서, 정치적 욕심 없이 자신을 성심껏 도와주는 잔은 도구가 아니라 정말 특별한 존재였을 가능성도 있다.

요약하자면 샤를 7세가 잔을 도구로만 여기다가 배신했다는 인식은, 어디까지나 기록에 남지 않은 부분들에 대한 추측에 근거한다. 다만 샤를 7세가 왕권을 강화한 이후로는 정말 비정하고 냉혹한 면모도 보였기에, 이러한 추측에 충분히 힘이 실린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명확히 공식 기록이 남은 부분들만 보면 두 사람의 관계는 처음부터 끝까지 부정적으로 보일 여지가 없으며, 오히려 서로에 대한 마음이 진심이었다고 볼 정황들도 적지 않다. 결국 역사는 감정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기에 정답은 알 길이 없지만, 적어도 이 둘의 관계가 대중적인 인식처럼 단순하게 정의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5. 기타[편집]

 
 
 
 
 
 
 
 
 
 
 
 
 
 
 
 
 
 
 
 
 
 
 
 
 
 
 
 
 
 
 
 
 
 
 
 
 
 
 
 
샤를 7세의 치세는 조선세종 ~ 세조의 재위기간과 겹친다.

생전 영조처럼 선왕의 소생이 아니라는 루머에 시달렸다. 하지만 아버지 샤를 6세의 초상화만 봐도 샤를 7세와 붕어빵처럼 닮아서(창백한 피부와 길쭉한 코) 어디까지나 반대파의 악선전일뿐이다.

프랑스 국왕 중 처음으로 공식적인 정부를 두었다. 기독교의 영향 아래 있었던 서양에서는 제도적으로 일부일처제를 원칙으로 삼아 이나 후궁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대부분의 왕이 왕비 이외에 다른 여성을 애인으로 두기는 했지만 원론적으로 그런 행위는 부정한 불륜이자 죄악으로 여겨져 터부시됐다. 모르는 사람이 없는 공공연한 사실이라 해도 어쨌든 공식적으로는 애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샤를 7세는 아녜스 소렐이란 여성을 애인으로 삼고 궁에 두어 보란 듯이 총애를 퍼부었으며, 소렐과의 사이에서 세 명의 딸을 얻었다.[19]
 
 
 
 
 
 
 
 
 
 
 
 
 
 
 
 
 
 
 
 
 
 
 
 
 
 
 
 
 
 
 
 
 
 
 
 
 
 
 
 

6. 대중 매체[편집]

 
 
 
 
 
 
 
 
 
 
 
 
 
 
 
 
 
 
 
 
 
 
 
 
 
 
 
 
 
 
 
 
 
 
 
 
 
 
 
 
냉혹하지만 유능한 정치가였고 인간적으로도 복잡한 인물이었음에도 대중 매체에선 잔 다르크를 일방적으로 배신하는 소인배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현재 역사학계에서는 잔 다르크를 배신한 것이 아니라 애초에 구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라는 해석도 많이 나오고 있으나, 아무래도 예전에는 당시 프랑스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에 설명 등은 제쳐두고, 그냥 왕권에 위협이 되어 버린 것이라고 단순하게 설명하는 책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뤽 베송이 감독한 1999년 영화 잔 다르크에서는 존 말코비치가 연기한다.

일본 라이트노벨 및 애니메이션인 율리시스: 잔 다르크와 연금의 기사에서 샤를로트란 캐릭터로 TS당했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의 잔 다르크 캠페인에선 프랑스의 왕세자의 칭호였던 도팽으로 언급된다. 이후 중반후에 잔느가 랑스를 점령하면서 대관식을 올려 왕위에 즉위한다. 이후 파리 공성전에서 지원 병력을 보내준다면서 시민군과 정찰기병 달랑 1명만 보내는 짓을 한다. 이후 결정판 DLC로 추가된 부르고뉴쪽 캠페인에서 부르고뉴에게 붙잡힌 잔을 구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4의 백년 전쟁 캠페인에선 역시 잔 다르크가 붙잡혔을 때 돕지 않는다. 잔 다르크가 죽은 후 20년간 프랑스군을 개혁하여 새로운 정예부대와 대포를 이용해 영국군을 완전히 몰아내고 백년 전쟁을 끝낸다.

이나즈마 일레븐 GO 크로노스톤에서도 등장한다.

Fate/Apocrypha에선 룰러로 참전한 잔 다르크셰익스피어의 보구인 '퍼스트 폴리오'를 통해 재현된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여기서 샤를 7세는 잔 다르크의 카리스마 능력에 대해 "너는 허무맹랑한 계시를 믿게 할 수 있으면서 왜 나한테는 그러지 않았냐. 날 설득할 수 있었는데 안 했으니 네가 날 배신한 거다" 라고 적반하장으로 개소리를 하는 배은망덕하고 찌질한 개쓰레기로 묘사된다(...).[20] 그리고 Fate/Grand Order에서는 당연하게도 업보를 받아서 1장에서 잔 다르크 얼터에게 살해당했고 이후 특이점으로 변하기 전의 세계에서 죄를 쌓기 전의 유령 상태로 지내다 칼데아의 서번트가 된 잔느 얼터가 자신의 막간에서 이전에 자신이 지은 죄를 청산하고 이들이 죄를 쌓아 악령이 되기 전에 구원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해 샤를 7세들을 포함한 유령들을 퇴치한다.

마법소녀 타루토☆마기카 The Legend of Jeanne d'Arc에서도 등장. 원 역사처럼 주인공 잔 다르크(타루토)의 조력자였다가 배신하는 건 같지만, 막장 어머니에 대한 공포와 트라우마 때문에 그랬기에 참작의 여지가 있으며 이후 자신의 잘못과 실정을 진정으로 반성하고 타루토를 복권시킨다. 이자보의 기질을 물려받은 악인들인 그의 자매 비하면 인간성과 양심은 있다. 오히려 실제 역사보다 더욱 인간미 있게 그려진 편. 마기아 레코드 마법소녀 마도카☆마기카 외전에서도 자매인 라핀의 마법소녀 스토리에서 라핀이 직접 "피가 이어진 형제" 라며 샤를 7세의 존재를 언급한다.

Europa Universalis IV에서는 시작 시점 1444년에 능력치 4/2/4의 평범한 왕으로 등장.

대체역사소설 용병대장과 성녀에서는 부르고뉴에 가담한 주인공과 잔 다르크에 의해 오를레앙이 함락당하고 포로로 잡혔다.

플레잉 카드 속 K♡의 모티브로 알려져있다.
 
 
 
 
 
 
 
 
 
 
 
 
 
 
 
 
 
 
 
 
 
 
 
 
 
 
 
 
 
 
 
 
 
 
 
 
 
 
 
 

7. 둘러보기[편집]

 
 
 
 
 
 
 
 
 
 
 
 
 
 
 
 
 
 
 
 
 
 
 
 
 
 
 
 
 
 
 
 
 
 
 
 
 
 
 
 
잔 다르크 서명 화이트
잔 다르크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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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가족
관련 인물
미카엘 · 성녀 마르가리타 · 성녀 카타리나

프랑스 원정군 동료 (질 드 레 · 라 이르 · 리슈몽)


주군 (샤를 7세)
관련 장소
잔의 생가 동레미라퓌셀

오를레앙 공방전이 벌어진 곳 오를레앙 · 파테 전투가 벌어진 곳 파테

루아르 원정이 벌어진 곳 루아르 · 랭스 행진을 통해 주군 샤를이 즉위한 곳 랭스

파리 공방전이 벌어진 곳 파리 · 잔이 마지막으로 승리한 전투가 벌어진 곳 생피에르르무티에

잔이 생포된 곳 콩피에뉴 · 잔이 화형당한 곳 루앙 · 잔의 묘소 윈체스터
관련 사건
관련 물건
기록에서의
모습 및 행적
평가 및 여담
창작물

잔 다르크 서명
 
 
 
 
 
 
 
 
 
 
 
 
 
 
 
 
 
 
 
 
 
 
 
 
 
 
 
 
 
 
 
 
 
 
 
 
 
 
 
 
[1] 샤를 7세부터 공식적으로 프랑스 왕들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비공식적으로 그린 삽화나, 후대의 상상화나, 조각상 또는 인장 등이 전부였다.[2] 사보이아 공작 아메데오 9세와 결혼.[3]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1세의 딸.[4] 프랑스의 왕비 잔, 샤를 8세[5] 필리베르토 1세, 카를로 1세[6] 바로 아래의 마리와 쌍둥이.[7] 바로 위의 잔과 쌍둥이.[8] 푸아 백작 가스통 4세레오노르 1세의 아들.[9] 프란치스코 1세 페부스, 카탈리나 1세[10] 베리 공작, 노르망디 공작에 봉해졌다. 루이 11세에 맞서 반기를 들었지만 실패한 뒤 형과 화해하고 기옌 공작이 되었다.[11] 1477년 6월 1일 루브르 성에서 사냥꾼인 피에르 드 라베르뉴와 간통하다가 남편 자크 드 브레제에게 살해되었다. 자크는 샤를로트를 살해한 뒤 파리 의회에 소환되어 100,000리브르의 벌금형을 선고받은 뒤 1477년부터 1481년까지 투옥되었고 영지는 몰수되어 장남 루이 드 브레제에게 넘어갔다. 본래라면 왕의 이복 여동생을 살해한 것이니 처형되어야 했지만 루이 11세가 아녜스 소렐과 그녀 소생의 이복동생들에게 강한 적개심을 보였기에 이 정도로 감형되었다. 루이 11세 사후 유죄 판결이 억울하다며 항소했고, 1486년 프랑스 국왕 샤를 8세에 의해 사면되었다.[12] 피에르 드 브레제의 외아들.[13] 샤를이 잔 다르크를 비정하게 버렸다는 인식이 생긴 것 또한 이런 면모 탓이 크다.[14] 샤를 7세에게 숙청 당한 이들 중에서 정말 잘못 없이 억울하다고 볼만한 이는 자크 쾨르 정도인데, 지나친 권세를 탐하지는 않았으나 그 영향력이 너무 강해져 존재만으로도 왕권에 잠재적인 위협이 된 탓이었다. 조선으로 치면 태종에게 숙청 당한 심온과 비슷한 케이스라고 볼 수 있다.[15] 사실 젊은 시절의 초상화를 보면 인상이 매우 다르다. 프로필 상단의 초상화는 온갖 고생을 겪은 후 늙고 지친 모습이라 보면 될 것이다.[16] 특히나 귀족들의 사병을 혁파한 일은 왕권 강화에 큰 도움이 된 동시에 백성들에게도 칭송을 들었다. 당시 사병들은 일탈이 심해서 백성들을 수시로 수탈하는 강도나 마찬가지였다보니, 사병 혁파 하나로 백성들 입장에서는 치안이 너무나도 좋아졌기 때문이다.[17] 외부에는 알려지지 않은 일이므로 보여주기식 쇼일 가능성은 없다.[18] 파리 공방전 실패 후에는 그녀에게 우호적인 전우들이 각자의 영지로 돌아갔기에 더더욱 그랬다.[19] 이렇게 프랑스 왕실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왕의 정부를 메트레상티트르(maîtresse-en-titre)라고 한다. 국왕이 수많은 정부를 거느리고 있어도 메트레상티트르의 지위는 단 한 명의 정부만이 가질 수 있었다.[20] 여담으로 셰익스피어는 실제로 헨리 6세 1부에서 잔다르크를 마녀로 묘사한 실제 전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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