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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튼 섬의 켈트족 브리튼인 Pritani (고대 브리튼어) | Briton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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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기 브리튼 섬의 민족 분포 | |||
위치 | |||
Britons
( Britanni(라틴어) | Pritani(고대 브리튼어) | Brythoniaid(고대 브리튼어) | 브리튼인 )
브리튼인은 브리튼 섬 남부에 살았던 켈트족을 말한다. 스코틀랜드를 제외한 브리튼 섬 전체에 거주했으며, 기원전 2500년~기원후 550년의 기간 동안에 브리튼섬 동안 브리튼 섬의 주류 민족이었다.
브리튼이라는 이름은 로마인이 붙인 것이 아니라 브리튼인들이 스스로를 부르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고대 P-켈트어(P-Celtic)로 Pritani는 문신을 한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브리튼인이 스스로를 부르던 이름이다. 이들은 몸에 푸른색 염료(Woad, 대청)[1]로 복잡한 문양의 문신을 하거나 그림을 그리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이름은 이미 기원전 4세기 그리스인 탐험가의 기록에서도 등장한다. 로마인이 이 이름을 Britanni로 부르면서, 브리타니는 오늘날 영국 또는 영국의 본섬을 뜻하는 '브리튼'의 어원이 되기도 했다. 현대 영어에서 Britons(브리튼인)는 역사적 종족을 말하며, British(영국인)은 현재의 국적을 말한다.[2]
오늘날의 웨일스인, 콘월인, 브르타뉴인들의 직계조상이며, 앵글로색슨족과 함께 잉글랜드인들의 공통조상이다. 영국인들의 문화와 언어는 앵글로색슨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고 스스로도 보통 켈트가 아닌 앵글로색슨이라고 생각지만, 실제 혈통은 브리튼인의 비율이 더 높다. 잉글랜드인은 대략 평균적으로 60~70% 브리튼인이며, 30~35% 앵글로색슨인이다.[3]
이들이 브리튼 섬에 넘어온 것은 기원전 2500년 경으로, 집단유전학 연구에 따르면 1세기 로마가 이 곳에 도착했을 당시 에 살고 있던 브리튼인의 90% 이상이 비슷한 시기(BC 2500)경 섬에 이주한 켈트족의 후예일 것으로 추정된다. 로마의 지배를 받기 전 이들의 말을 공통 브리튼어(Common Brittonic)이라고 하는데, 1-4세기 로마의 영향을 받은 후의 이들의 언어를 후기 브리튼어(Late Brittonic)라고 하고, 이들 로마화된 브리튼인들을 '로만 브리튼(Romano-Britons)'라고 한다. 5세기 경 앵글족과 색슨족이 바다를 건너 마주한 것은 이 로만 브리튼인이었다.
( Britanni(라틴어) | Pritani(고대 브리튼어) | Brythoniaid(고대 브리튼어) | 브리튼인 )
브리튼인은 브리튼 섬 남부에 살았던 켈트족을 말한다. 스코틀랜드를 제외한 브리튼 섬 전체에 거주했으며, 기원전 2500년~기원후 550년의 기간 동안에 브리튼섬 동안 브리튼 섬의 주류 민족이었다.
브리튼이라는 이름은 로마인이 붙인 것이 아니라 브리튼인들이 스스로를 부르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고대 P-켈트어(P-Celtic)로 Pritani는 문신을 한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브리튼인이 스스로를 부르던 이름이다. 이들은 몸에 푸른색 염료(Woad, 대청)[1]로 복잡한 문양의 문신을 하거나 그림을 그리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이름은 이미 기원전 4세기 그리스인 탐험가의 기록에서도 등장한다. 로마인이 이 이름을 Britanni로 부르면서, 브리타니는 오늘날 영국 또는 영국의 본섬을 뜻하는 '브리튼'의 어원이 되기도 했다. 현대 영어에서 Britons(브리튼인)는 역사적 종족을 말하며, British(영국인)은 현재의 국적을 말한다.[2]
오늘날의 웨일스인, 콘월인, 브르타뉴인들의 직계조상이며, 앵글로색슨족과 함께 잉글랜드인들의 공통조상이다. 영국인들의 문화와 언어는 앵글로색슨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고 스스로도 보통 켈트가 아닌 앵글로색슨이라고 생각지만, 실제 혈통은 브리튼인의 비율이 더 높다. 잉글랜드인은 대략 평균적으로 60~70% 브리튼인이며, 30~35% 앵글로색슨인이다.[3]
이들이 브리튼 섬에 넘어온 것은 기원전 2500년 경으로, 집단유전학 연구에 따르면 1세기 로마가 이 곳에 도착했을 당시 에 살고 있던 브리튼인의 90% 이상이 비슷한 시기(BC 2500)경 섬에 이주한 켈트족의 후예일 것으로 추정된다. 로마의 지배를 받기 전 이들의 말을 공통 브리튼어(Common Brittonic)이라고 하는데, 1-4세기 로마의 영향을 받은 후의 이들의 언어를 후기 브리튼어(Late Brittonic)라고 하고, 이들 로마화된 브리튼인들을 '로만 브리튼(Romano-Britons)'라고 한다. 5세기 경 앵글족과 색슨족이 바다를 건너 마주한 것은 이 로만 브리튼인이었다.
2016년도 영국의 집단유전학 연구결과에 따르면, 심지어 본인들을 앵글로색슨이라고 생각했던 잉글랜드에게도 브리튼인(켈트인)의 유전적 기여도가 평균적으로 과반이 넘는다고 한다. 영국 유전학 연구(PoBI)의 클러스터 분석에 따르면, 북서부와 웨일스 접경지는 브리튼인 혈통이 압도적이며, 동남부로 갈수록 게르만(앵글로색슨) 혈통이 섞이는 양상을 보인다.
아래 연구 결과를 첨부한다. 참고로 웨일스는 90~100%로 거의 순수한 브리튼인의 후예이며, 잉글랜드 북부/서부 역시 75~85%로 압도적인 브리튼인 지역이다. 중부는 65~75%, 동부/남부는 60~65%정도의 분포를 보이는데, 주로 색슨족왕국들이 몰려있던 남부와 이스트 앵글리아의 동부가 그나마 비율이 높다.
잉글랜드 전체로 보아도 대략 60~70%의 유전자가 고대 브리튼인(켈트인)의 것이며, 앵글로색슨이 약 25~30%, 기타 데인족(바이킹), 프랑스의 노르만, 로마등이 다 합쳐봐야 5~10%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아래 연구 결과를 첨부한다. 참고로 웨일스는 90~100%로 거의 순수한 브리튼인의 후예이며, 잉글랜드 북부/서부 역시 75~85%로 압도적인 브리튼인 지역이다. 중부는 65~75%, 동부/남부는 60~65%정도의 분포를 보이는데, 주로 색슨족왕국들이 몰려있던 남부와 이스트 앵글리아의 동부가 그나마 비율이 높다.
잉글랜드 전체로 보아도 대략 60~70%의 유전자가 고대 브리튼인(켈트인)의 것이며, 앵글로색슨이 약 25~30%, 기타 데인족(바이킹), 프랑스의 노르만, 로마등이 다 합쳐봐야 5~10%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 각 주/카운티 별 유전자 기여 비율 펼치기 · 접기 ]
1. 노스웨스트 잉글랜드(North West England) : 잉글랜드에서 브리튼인 혈통이 가장 진하게 남아있는 지역
- 컴브리아 (Cumbria): 약 85% (영국 내 최고 수준, 웨일스와 유전적으로 유사)
- 랭커셔 (Lancashire): 약 72~75%
- 체셔 (Cheshire): 약 75% (웨일스 접경지)
- 그레이터 맨체스터/머지사이드: 약 70% (산업화시기 아일랜드계인 유입으로 실제는 더 높을 것으로 본다.[4])
2. 노스이스트 잉글랜드 (North East England) : 고대 노섬브리아아 지역
- 노섬벌랜드 (Northumberland): 약 75~78% (고대 노섬브리아(앵글족) 왕국의 북부 중심지)
- 타인 위어 (Tyne and Wear): 약 75%
- 더럼주 (County Durham): 약 75%
3. 요크셔&험버 (Yorkshire and the Humber) : 바이킹(데인족) 왕조의 중심지
- 노스 요크셔 (North Yorkshire): 약 70~73% (고대 노섬브리아(앵글족)의 남부 중심지)
- 웨스트/사우스 요크셔 (West/South Yorkshire): 약 70%
- 이스트 라이딩 오브 요크셔 (East Riding): 약 65~68% (해안가로 갈수록 게르만계 비중 소폭 상승)
4. 웨스트 미들랜즈 (West Midlands) : 고대 머시아(앵글족) 왕국의 서부
- 슈롭셔 (Shropshire): 약 75~80% (웨일스 경계선으로 브리튼계 매우 강세)
- 헤리퍼드셔 (Herefordshire): 약 80%
- 스태퍼드셔/워릭셔 (Staffordshire/Warwickshire): 약 70%
- 웨스트 미들랜즈(주)(버밍엄 등): 약 65~70% (앵글족 혼합 비율이 꽤 높다.)
5. 이스트 미들랜즈 (East Midlands) : 고대 머시아(앵글족) 왕국의 동부 + 데인로(Danelaw) 영향
- 더비셔 (Derbyshire): 약 70% (펜닌 산맥 영향으로 브리튼계 잔존)
- 레스터셔/노팅엄셔 (Leicestershire/Nottinghamshire): 약 65%
- 링컨셔 (Lincolnshire): 약 60~62% (바이킹 및 앵글로색슨 유전자 유입이 잉글랜드 내에서 높은 편)
6. 사우스웨스트 잉글랜드 (South West England) : 콘월과 데번을 중심으로 '서부 브리튼'의 정체성이 강하다.
- 콘월 (Cornwall): 약 80~83% (독자적인 서부 켈트 클러스터로 브리튼인비중이 높음)
- 데번 (Devon): 약 80%
- 서머싯 (Somerset): 약 75%
- 글로스터셔 (Gloucestershire): 약 70~75%
- 도싯/윌트셔 (Dorset/Wiltshire): 약 65~70%
- 햄프셔 (윈체스터 등): 약 65% (고대 웨식스(색슨)의 남부 중심지)
7. 이스트 오브 잉글랜드 (East of England) : 드디어 앵글로색슨 유전자가 가장 많은 지역.
- 노퍽/서퍽 (Norfolk & Suffolk): 약 55~58% (고대 동앵글리아(앵글족) 중심지. 앵글로색슨 비율이 영국에서 가장 높은 지역.)
- 에식스주 (Essex): 약 60% (고대 에식스(색슨)왕국 중심지)
- 케임브리지셔 (Cambridgeshire): 약 60%
8. 사우스 이스트 잉글랜드 & 런던 (South East & London) : 대륙과의 교류가 잦은 수도 지역
- 켄트 (Kent): 약 60% (고대 켄트 왕국(주트족)의 땅. 이후 노르망디 프랑스계 유입)
- 서리/서식스 (Surrey/Sussex): 약 63~65% (과거 서식스(색슨)왕국의 중심지)
- 옥스퍼드셔/버킹엄셔 (Oxfordshire/Buckinghamshire): 약 65%
- 런던 (London): 약 60~65% (화이트 브리티시 기준이나, 현대에는 워낙 국제적이라 측정 의미가 퇴색됨)
- 컴브리아 (Cumbria): 약 85% (영국 내 최고 수준, 웨일스와 유전적으로 유사)
- 랭커셔 (Lancashire): 약 72~75%
- 체셔 (Cheshire): 약 75% (웨일스 접경지)
- 그레이터 맨체스터/머지사이드: 약 70% (산업화시기 아일랜드계인 유입으로 실제는 더 높을 것으로 본다.[4])
2. 노스이스트 잉글랜드 (North East England) : 고대 노섬브리아아 지역
- 노섬벌랜드 (Northumberland): 약 75~78% (고대 노섬브리아(앵글족) 왕국의 북부 중심지)
- 타인 위어 (Tyne and Wear): 약 75%
- 더럼주 (County Durham): 약 75%
3. 요크셔&험버 (Yorkshire and the Humber) : 바이킹(데인족) 왕조의 중심지
- 노스 요크셔 (North Yorkshire): 약 70~73% (고대 노섬브리아(앵글족)의 남부 중심지)
- 웨스트/사우스 요크셔 (West/South Yorkshire): 약 70%
- 이스트 라이딩 오브 요크셔 (East Riding): 약 65~68% (해안가로 갈수록 게르만계 비중 소폭 상승)
4. 웨스트 미들랜즈 (West Midlands) : 고대 머시아(앵글족) 왕국의 서부
- 슈롭셔 (Shropshire): 약 75~80% (웨일스 경계선으로 브리튼계 매우 강세)
- 헤리퍼드셔 (Herefordshire): 약 80%
- 스태퍼드셔/워릭셔 (Staffordshire/Warwickshire): 약 70%
- 웨스트 미들랜즈(주)(버밍엄 등): 약 65~70% (앵글족 혼합 비율이 꽤 높다.)
5. 이스트 미들랜즈 (East Midlands) : 고대 머시아(앵글족) 왕국의 동부 + 데인로(Danelaw) 영향
- 더비셔 (Derbyshire): 약 70% (펜닌 산맥 영향으로 브리튼계 잔존)
- 레스터셔/노팅엄셔 (Leicestershire/Nottinghamshire): 약 65%
- 링컨셔 (Lincolnshire): 약 60~62% (바이킹 및 앵글로색슨 유전자 유입이 잉글랜드 내에서 높은 편)
6. 사우스웨스트 잉글랜드 (South West England) : 콘월과 데번을 중심으로 '서부 브리튼'의 정체성이 강하다.
- 콘월 (Cornwall): 약 80~83% (독자적인 서부 켈트 클러스터로 브리튼인비중이 높음)
- 데번 (Devon): 약 80%
- 서머싯 (Somerset): 약 75%
- 글로스터셔 (Gloucestershire): 약 70~75%
- 도싯/윌트셔 (Dorset/Wiltshire): 약 65~70%
- 햄프셔 (윈체스터 등): 약 65% (고대 웨식스(색슨)의 남부 중심지)
7. 이스트 오브 잉글랜드 (East of England) : 드디어 앵글로색슨 유전자가 가장 많은 지역.
- 노퍽/서퍽 (Norfolk & Suffolk): 약 55~58% (고대 동앵글리아(앵글족) 중심지. 앵글로색슨 비율이 영국에서 가장 높은 지역.)
- 에식스주 (Essex): 약 60% (고대 에식스(색슨)왕국 중심지)
- 케임브리지셔 (Cambridgeshire): 약 60%
8. 사우스 이스트 잉글랜드 & 런던 (South East & London) : 대륙과의 교류가 잦은 수도 지역
- 켄트 (Kent): 약 60% (고대 켄트 왕국(주트족)의 땅. 이후 노르망디 프랑스계 유입)
- 서리/서식스 (Surrey/Sussex): 약 63~65% (과거 서식스(색슨)왕국의 중심지)
- 옥스퍼드셔/버킹엄셔 (Oxfordshire/Buckinghamshire): 약 65%
- 런던 (London): 약 60~65% (화이트 브리티시 기준이나, 현대에는 워낙 국제적이라 측정 의미가 퇴색됨)
Brittonic (브리튼어)
Old British 라고도 한다. 이들의 언어는 고대 브리튼어이며, 켈트족의 두 계통 중에서는 P-켈트어(P-Celtic)에 해당한다. 당시 북부 스코틀랜드에 살던 픽트인의 언어와는 꽤 가까우며, 아일랜드에 살던 게일인의 언어와는 좀 거리가 있는 편이다.
로마의 지배를 받기 전 이들의 말을 공통 브리튼어(Common Brittonic)이라고 하는데, 전형적인 고대 P-켈트어이다. 1-4세기 로마의 지배를 받은 후의 이들의 언어를 후기 브리튼어(Late Brittonic)라고 하고, 이들 로마화된 브리튼인들을 '로만 브리튼(Romano-Britons)'라고 한다. 후기 브리튼어는 그 이전의 켈트어에서 꽤 많이 바뀌었는데, 현대 웨일스어를 통해 재구했을 때 단어의 15%정도가 바뀌었다고 본다. 주격, 목적격 등을 나타내는 변형 어미인 격(Case)이 소멸하고 단어 앞부분에 강세를 주는 식으로 강세가 이동했다. 그러나 아직 웨일스의 브리튼 사람들과는 방언 수준으로 말이 통했던 것으로 추정된다.[5]
켈트어는 크게 Q-Celtic과 P-Celtic으로 나뉘는데, Q-Celtic가 좀더 오래된(먼저 이동한)집단이라 고어 켈트, P-Celtic가 나중에 이동한 집단이라고 해서 신어 켈트라고 한다. 브리튼어, 그리고 현대의 웨일스어는 전형적인 신 켈트어 P-Celtic에 해당한다.
당시 브리타니아에는 남부의 브리튼인과 북부의 픽트인이 살고 있었으며, 바다 건너 아일랜드에는 게일인이 살고 있었는데, 브리튼인과 픽트인은 모두 P-Celtic이지만, 게일인은 Q-Celtic이었다. 이 게일인들이 5세기 경 바다를 다시 건너 브리튼 섬 북서부에 침략자로 등장하는데, 그것이 스코트인이다. 아일랜드의 게일인이 서쪽에서 바다를 건너 넘온 것이다. 스코트인은 나중에 9세기 경 브리튼 섬 북부의 스코트족이 픽트족을 정복 흡수하고 북쪽에 눌러앉는데, 그래서 브리튼 섬 북부의 이름이 스코틀랜드가 된 것이다. 참고로 언어는 지배층인 Q-켈트어가 자리잡았지만, 실제 유전자 기여 비율은 픽트족 40~50%, 스코트족(게일인) 20~30%, 바이킹 10~15%, 앵글로색슨 10~15%이다.
해서 현재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언어의 조상은 게일어이며, Q-Celtic이고, 웨일스어, 그리고 이들이 바다건너 이동한 곳인 프랑스의 브르타뉴어는 전형적인 P-Celtic이다.
반면 주류 짐단이었던 로만 브리튼의 후기 브리튼어(Late Brittonic)는 현재 남아있지 않다. 기원전 5~6세기에 앵글로색슨인들이 수십만명이 들어닥치며 남부를 점거한 뒤로, 잉글랜드에서 브리튼어는 완전히 게르만어에 대체되어 자리를 내주고 사라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 영어의 뿌리는 서게르만어군의 앵글로색슨어이며, 이 고대 앵글로색슨인들의 언어를 고대 영어라고 한다. 이쪽은 오히려 독일 본토의 색슨인이나 프리지아인들과 말이 통했다고 한다.
Old British 라고도 한다. 이들의 언어는 고대 브리튼어이며, 켈트족의 두 계통 중에서는 P-켈트어(P-Celtic)에 해당한다. 당시 북부 스코틀랜드에 살던 픽트인의 언어와는 꽤 가까우며, 아일랜드에 살던 게일인의 언어와는 좀 거리가 있는 편이다.
로마의 지배를 받기 전 이들의 말을 공통 브리튼어(Common Brittonic)이라고 하는데, 전형적인 고대 P-켈트어이다. 1-4세기 로마의 지배를 받은 후의 이들의 언어를 후기 브리튼어(Late Brittonic)라고 하고, 이들 로마화된 브리튼인들을 '로만 브리튼(Romano-Britons)'라고 한다. 후기 브리튼어는 그 이전의 켈트어에서 꽤 많이 바뀌었는데, 현대 웨일스어를 통해 재구했을 때 단어의 15%정도가 바뀌었다고 본다. 주격, 목적격 등을 나타내는 변형 어미인 격(Case)이 소멸하고 단어 앞부분에 강세를 주는 식으로 강세가 이동했다. 그러나 아직 웨일스의 브리튼 사람들과는 방언 수준으로 말이 통했던 것으로 추정된다.[5]
켈트어는 크게 Q-Celtic과 P-Celtic으로 나뉘는데, Q-Celtic가 좀더 오래된(먼저 이동한)집단이라 고어 켈트, P-Celtic가 나중에 이동한 집단이라고 해서 신어 켈트라고 한다. 브리튼어, 그리고 현대의 웨일스어는 전형적인 신 켈트어 P-Celtic에 해당한다.
당시 브리타니아에는 남부의 브리튼인과 북부의 픽트인이 살고 있었으며, 바다 건너 아일랜드에는 게일인이 살고 있었는데, 브리튼인과 픽트인은 모두 P-Celtic이지만, 게일인은 Q-Celtic이었다. 이 게일인들이 5세기 경 바다를 다시 건너 브리튼 섬 북서부에 침략자로 등장하는데, 그것이 스코트인이다. 아일랜드의 게일인이 서쪽에서 바다를 건너 넘온 것이다. 스코트인은 나중에 9세기 경 브리튼 섬 북부의 스코트족이 픽트족을 정복 흡수하고 북쪽에 눌러앉는데, 그래서 브리튼 섬 북부의 이름이 스코틀랜드가 된 것이다. 참고로 언어는 지배층인 Q-켈트어가 자리잡았지만, 실제 유전자 기여 비율은 픽트족 40~50%, 스코트족(게일인) 20~30%, 바이킹 10~15%, 앵글로색슨 10~15%이다.
해서 현재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언어의 조상은 게일어이며, Q-Celtic이고, 웨일스어, 그리고 이들이 바다건너 이동한 곳인 프랑스의 브르타뉴어는 전형적인 P-Celtic이다.
반면 주류 짐단이었던 로만 브리튼의 후기 브리튼어(Late Brittonic)는 현재 남아있지 않다. 기원전 5~6세기에 앵글로색슨인들이 수십만명이 들어닥치며 남부를 점거한 뒤로, 잉글랜드에서 브리튼어는 완전히 게르만어에 대체되어 자리를 내주고 사라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 영어의 뿌리는 서게르만어군의 앵글로색슨어이며, 이 고대 앵글로색슨인들의 언어를 고대 영어라고 한다. 이쪽은 오히려 독일 본토의 색슨인이나 프리지아인들과 말이 통했다고 한다.
브리튼인은 BC 2500년경 유럽대륙에서 넘어온 벨 비커 문화사람들에 의해 기원한다.
벨 비커 문화는 중부 유럽에 널리 퍼진 문화 양식으로, 이후 여러 켈트족을 형성한 선조 집단으로 비정된다. 단, 단일한 혈통의 민족집단은 아니었으며, 여러 민족과 언어를 가진 부족들이 원시 인도유럽인의 교역 네트워크를 따라 연결되면서 형성된 일련의 집단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전적 추정으로는 꽤나 단일한 집단이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여러 집단이 유입되기보다는 주로 90%이상이 BC 2500년경 유입된 한 집단의 후손이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브리튼 섬 전역에 분포했던 이 켈트인들은, 대략 기원전 800년경 철기 시대가 이 지역에 도달할 즈음부터 분화되기 시작한다. 유럽 대륙과 계속 네트워크를 유지하며 최신 문물을 받아들였던 쪽이 브리튼인으로, 북부 스코틀랜드에서 원형을 유지했던 쪽이 픽트족으로 분화한다. 이 분화 시기를 대략 BC 800 ~ BC 100 정도로 추정한다.
이들은 스스로를 '문신을 한 사람들'이라는 뜻의 프리타니(Pritani)라고 일컬었는데, 이 단어는 기원전 4세기 그리스인 탐험가 피테아스(Pytheas)에 의해 세상에 알려진다. 피아테스가 브리튼 섬을 방문했을 때, 원주민들이 스스로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그리스어로 '프레타니케(Pretanike)'라고 전한 기록이 남아있다. 로마인들은 여기서 P발음을 B로 바꾸어 브리타니(Britanni)라고 불렀으며, 이 이름이 현재까지 이어져오게 되었다.
반면 픽트족(Picts)의 이름은 라틴어 'Picti(색칠된)'인데, 이름 뜻은 사실 브리튼인과 동일하지만, 로마인들이 붙인 이름이 굳어지면서 현재에도 픽트족으로 불리게 되었다. 즉, 이 두 민족집단은 사실 같은 뿌리이고, 같은 풍습을 공유하던 사람들이다. 언어 역시 동일한 P-Celts로, 갈리아지방의 켈트인들과 같은 계열이었으마, 1세기 경까지는 픽트족과 브리튼인 사이는 서로 어느정도 대화가 통하는 방언연속체에 가까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벨 비커 문화는 중부 유럽에 널리 퍼진 문화 양식으로, 이후 여러 켈트족을 형성한 선조 집단으로 비정된다. 단, 단일한 혈통의 민족집단은 아니었으며, 여러 민족과 언어를 가진 부족들이 원시 인도유럽인의 교역 네트워크를 따라 연결되면서 형성된 일련의 집단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전적 추정으로는 꽤나 단일한 집단이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여러 집단이 유입되기보다는 주로 90%이상이 BC 2500년경 유입된 한 집단의 후손이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브리튼 섬 전역에 분포했던 이 켈트인들은, 대략 기원전 800년경 철기 시대가 이 지역에 도달할 즈음부터 분화되기 시작한다. 유럽 대륙과 계속 네트워크를 유지하며 최신 문물을 받아들였던 쪽이 브리튼인으로, 북부 스코틀랜드에서 원형을 유지했던 쪽이 픽트족으로 분화한다. 이 분화 시기를 대략 BC 800 ~ BC 100 정도로 추정한다.
이들은 스스로를 '문신을 한 사람들'이라는 뜻의 프리타니(Pritani)라고 일컬었는데, 이 단어는 기원전 4세기 그리스인 탐험가 피테아스(Pytheas)에 의해 세상에 알려진다. 피아테스가 브리튼 섬을 방문했을 때, 원주민들이 스스로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그리스어로 '프레타니케(Pretanike)'라고 전한 기록이 남아있다. 로마인들은 여기서 P발음을 B로 바꾸어 브리타니(Britanni)라고 불렀으며, 이 이름이 현재까지 이어져오게 되었다.
반면 픽트족(Picts)의 이름은 라틴어 'Picti(색칠된)'인데, 이름 뜻은 사실 브리튼인과 동일하지만, 로마인들이 붙인 이름이 굳어지면서 현재에도 픽트족으로 불리게 되었다. 즉, 이 두 민족집단은 사실 같은 뿌리이고, 같은 풍습을 공유하던 사람들이다. 언어 역시 동일한 P-Celts로, 갈리아지방의 켈트인들과 같은 계열이었으마, 1세기 경까지는 픽트족과 브리튼인 사이는 서로 어느정도 대화가 통하는 방언연속체에 가까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스코틀랜드의 게일인은 훨씬 먼 계통으로, C-Celts에 속한다. 이들의 언어는 유럽에 비커 문화가 퍼지던 시기에 이베리아 반도 맨 끄트머리에 있어서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보존되었는데, 기원전 500년경 이베리아반도에서 철기 문명과 함께 브리튼섬을 거치지 않고 바로 아일랜드로 넘어가게 되면서, 전혀 다른 언어를 유지하게 되었다.[6]
브리튼인들은 기원전 5~1세기, 바다 건너 새로 등장한 사람들을 Gwyddel(구이델)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야생의 사람들'이라는 뜻이었다. 게일인들이 이 말을 자신들을 칭하는 데에 그대로 음차해 사용하면서, Goídel(고이델)이 되고, 현대에는 스스로를 게일인(Gael)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편, 이들은 기원후 4세기 경, 바다를 건너 브리튼섬의 서안을 약탈하기 시작하는데, 이를 두고 로마인들이 부르던 이름이 Scotti(약탈자)였기 때문에, 바다를 건넌 게일인을 부르는 이름은 스코트족으로 굳어지게 된다.
기원전 1세기(BC 55), 카이사르의 1차 브리타니아 원정이 있었다. 상륙은 했지만 폭풍으로 선박이 손상되어, 진격하지 못하고 찍먹하고 돌아간다. 이듬해(BC 54), 카이사르가 2만의 병력으로 다시 한번 상륙해서 진격했지만, 다시 찍먹하고 돌아온다. 애초에 정복이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는 이를 로마 본토에서 이를 '미지의 섬 정복 시도'라며 대대적으로 선전하면서, 브리타니아는 로마인의 관심을 끌게 된다.
본격 정복은 서기 43년 클라우디우스에 의해 진행된다. 그는 4만의 병력을 이끌고 남부의 콜체스터를 점령했으며, 런디니움을 건설하고 주둔군을 상주시킨다. 그러나 60-61년 보디카(Boudica)의 반란으로 두 도시가 불탔다. 이 시점이 위기였지만, 결국 로마가 진압한다.
이후 로마는 약 3만정도의 주둔군을 상주시켰으며, AD 122 하드리아누스 성벽을 건설해 선을 긋고, 속주의 체제를 안정화하기 시작한다. 2~3세기에 걸쳐 브리튼섬에는 로마식 도로가 깔리고, 상수도와 하수도, 공중목욕탕과 도시가 건설되고, 저택들이 세워진다. 화폐와 로마의 것들이 도입되어 하나의 경제를 이루었다.
고대 로마 제국의 브리튼 정복 이후 로만 브리튼에서 브리튼인들은 로마 제국에 우호적이었으며, 브리튼 문화와 로마 문화가 융합한 로만 브리튼 문화(Romano-British culture)가 성행했다. 또한 브리튼어도 라틴어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4세기 말 브리타니아에는 조금씩 위험이 찾아온다. 367년 서부해안의 스코트와 동쪽해안의 색슨, 북쪽 국경의 픽트가 동시에 침입하는 일이 있었다. 당시 이런 색슨족의 공세에, 로마는 브리타니아를 방어하는 데에 꽤 애를 먹고 있었다. 그러던 4세기말, 395년 테오도시우스 사망 후에 동로마와 서로마가 분리되고. 5세기 초 406년, 훈족에 밀려나온 반달족, 수에비족, 알란족이 라인강을 방어선을 넘어 갈리아를 침공한다. 그러면서 서로마 전역에서의 전례없는 혼란기가 계속된다. 틈을 타 407년, 브리타니아 주둔군 사령관 콘스탄티누스 3세는, 갈리아를 자신이 먹을 생각을 하고 주둔군을 이끌고 갈리아로 넘어간다. 410년, 서코트족이 이탈리아 본토까지 침공해 들어오자, 로마 황제 호노리우스는 브리타니아에 '스스로 방어하라'고 통보하며 사실상 철수를 선언한다.
본격 정복은 서기 43년 클라우디우스에 의해 진행된다. 그는 4만의 병력을 이끌고 남부의 콜체스터를 점령했으며, 런디니움을 건설하고 주둔군을 상주시킨다. 그러나 60-61년 보디카(Boudica)의 반란으로 두 도시가 불탔다. 이 시점이 위기였지만, 결국 로마가 진압한다.
이후 로마는 약 3만정도의 주둔군을 상주시켰으며, AD 122 하드리아누스 성벽을 건설해 선을 긋고, 속주의 체제를 안정화하기 시작한다. 2~3세기에 걸쳐 브리튼섬에는 로마식 도로가 깔리고, 상수도와 하수도, 공중목욕탕과 도시가 건설되고, 저택들이 세워진다. 화폐와 로마의 것들이 도입되어 하나의 경제를 이루었다.
고대 로마 제국의 브리튼 정복 이후 로만 브리튼에서 브리튼인들은 로마 제국에 우호적이었으며, 브리튼 문화와 로마 문화가 융합한 로만 브리튼 문화(Romano-British culture)가 성행했다. 또한 브리튼어도 라틴어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4세기 말 브리타니아에는 조금씩 위험이 찾아온다. 367년 서부해안의 스코트와 동쪽해안의 색슨, 북쪽 국경의 픽트가 동시에 침입하는 일이 있었다. 당시 이런 색슨족의 공세에, 로마는 브리타니아를 방어하는 데에 꽤 애를 먹고 있었다. 그러던 4세기말, 395년 테오도시우스 사망 후에 동로마와 서로마가 분리되고. 5세기 초 406년, 훈족에 밀려나온 반달족, 수에비족, 알란족이 라인강을 방어선을 넘어 갈리아를 침공한다. 그러면서 서로마 전역에서의 전례없는 혼란기가 계속된다. 틈을 타 407년, 브리타니아 주둔군 사령관 콘스탄티누스 3세는, 갈리아를 자신이 먹을 생각을 하고 주둔군을 이끌고 갈리아로 넘어간다. 410년, 서코트족이 이탈리아 본토까지 침공해 들어오자, 로마 황제 호노리우스는 브리타니아에 '스스로 방어하라'고 통보하며 사실상 철수를 선언한다.
Sub-Roman Britain ( Dark Age Britain, 410~)
407년 로마군이 철수하고 410년 로마가 브리튼섬을 포기하자 당장에 브리튼 섬에는 권력과 안보 공백이 발생한다. 이것이 알려지고 픽트족은 남쪽으로 밀고내려왔으며, 스코트족(게일인)들은 서부 해안을 약탈하다 못해 넘어와 정착하기 시작한다.
410~420년대, 당장에 브리튼 섬에는 권력과 안보 공백이 발생한다. 이것이 알려지고 픽트족은 남쪽으로 밀고내려왔으며, 스코트족(게일인)들은 서부 해안을 약탈하다 못해 넘어와 정착하기 시작한다. 아일랜드의 성인 성 패트릭이 아일랜드로 납치된 것도 이 무렵이다. 이런 침입들에 대응하지 못하고 로마식 행정 체계가 붕괴하면서, 당시 로마가 건설한 대도시는 20여개에 달했고, 각 도시의 지방 의회가 각각 군대를 조직해 지역 방어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브리튼인 도시 중심의 친로마파(당시 전체 인구의 15%이나 모여 있음)와 농촌의 반로마파(인구의 80%이나 흩어져 있음)가 싸우기 시작했고, 각지에서 서로 칭왕을 하면서 여러 소왕들이 다투는 군웅할거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안그래도 매년마다 오던 색슨족은, 처음에는 여름에 와서 약탈하고 겨울에 돌아갔지만, 점차 해안가나 외딴 곳에 임시 기지를 만들고 머물기 시작한다.
430년대, 이런 혼란 속에서 반로마파의 보티건(Vortigern)이 강력한 군웅으로 등장해 남부와 중부 브리튼의 대부분을 장악한다. 보티건은 사실상 '브리튼의 왕'처럼 군림했고, 로마 귀족 가문 출신이던 유력자 암브로시우스(Ambrosius Aurelianus)와 대립한다. 그러던 중 북부 픽트족의 압박이 너무 거세지자, 보티건은 이이제이 전략을 사용하기로 결정하고 주트족을 불러들인다. 주트족이나 앵글족은 그 이전까지는 색슨족과는 달리 항상 해안에 찾아오는 약탈세력은 아니었으며, 북해의 약탈자는 주로 색슨족이었다. 특히 주트족은 색슨족과는 좀 거리가 있는 데인족과 가까운 북게르만 계열로, 북쪽을 막아주면 땅을 내어주겠다는 보티건의 말을 듣고 넘어온 것이다.
449년, 수백년 뒤 재구성된 이야기에 따르면, 주트족의 지도자 헹기스트와 호르사(Hengist & Horsa) 무리가 세 척의 배에 나눠 타고 브리튼섬에 넘어온다. 수백 년 뒤 전해지는 전승에 따르면, 헹기스트(Hengist)는 섬에 도착하자마자 두가지를 파악한다. "이 땅은 생각보다 훨씬 비옥하고 넓다." "주인들(브리튼인)들이 군사적으로 매우 나약하고 분열되어 있다." 그래서 헹기스트는 보티건에게, "픽트족을 완벽히 막으려면 병력이 더 필요하다"고 핑계를 대면서, 남부까지 내려온 픽트족(Picts)을 무참히 깨부수고 북쪽으로 밀어내는 동시에 고향(독일 북부/덴마크)에 있는 친척과 다른 색슨, 앵글 부족들에게 전령을 보내 전사들을 더 불러모았다고 전해진다.
450년, 색슨족은 자신들이 싸워준 값에 비해 식량(Annona)과 보급이 턱없이 부족하다며 불만을 터뜨린다. 보티건은 이렇게 많은 인구가 올 줄 몰랐고, 약속한 식량을 다 대줄 수 없었다. 보급이 중단되자, 이들은 정착지인 타넷(Thanet)섬을 넘어 주변 브리튼인 마을들을 약탈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450년 색슨 반란의 시작이다. 상황이 험악해지자 보티건은 협상을 제안한다. 색슨족은 협상을 받아들이고, 평화 회담을 위해 브리튼 귀족 300명과 색슨족 지도자들이 무기 없이 만났으나, 헹기스트가 "Nimet eure saxes!(너희의 단검을 뽑아라!)"라고 외치자, 옷 속에 숨겨온 단검을 꺼낸 색슨족들이 브리튼 귀족 300명을 그 자리에서 몰살했다고 한다. 이를 전승에서는 긴 칼의 밤(The Night of Long Knives)이라고 전다.
이는 물론 정사가 아니고 후대에 덧붙여진 설화에 가까운 이야기이나, 어쨌든 이 시기를 전후로 색슨족, 앵글족 인구가 상당히 유입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미 4세기 말~5세기 초, 로마가 철수하기 이전부터 이미 색슨족 특유의 장신구가 브리튼 동부에서 발견된다. 게르만족의 유입은 이미 수십년에 걸쳐 서서히 진행된 인구 이동이었으며, 보티건은 그 중간에 특정 용병 집단과 '공식 계약'을 맺어 기록에 남게 된 인물이다.
적어도 보티건이 '브리튼 지배층이 게르만 용병과 계약했고', '식량 분쟁으로 불만이 쌓여 갈등이 있었으며', '게르만 세력이 봉기해 파괴적 전투로 이어지고'. 이후 전투가 장기화되다가 490년대 바돈 성 전투에서 일단락된다는 것. 까지는 길다스(Gildas)의 당대 기록에서 명확하게 언급된다. 구체적인 년도와 인명은 후대에 재구된 것이지만, 뼈대 자체는 분명한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용병의 반란에 대해서도, 배신보다는 보티건 쪽의 '경제적 파산'때문이라고 해석되기도 한다. 보티건 정권은 로마식 세금 징수 체계가 붕괴하면서 용병들에게 약속한 식량(Annona)을 지급할 수 없었다. 폭동은 계획된 정복 전쟁이라기보다, 월급(식량)이 밀린 용병들의 폭동으로 시작되어 점차 번진 것으로 해석된다. 특히, 통제 불가능한 이주민 흐름 중 일부를 '용병'으로 공인해버리면서, 이들이 구분가지 않게 되어 이주민 흐름을 막을 수 없게 만들었다는 것이 뼈아픈 실책으로 거론된다.
450년 경 색슨 용병들의 반란이 시작된 후, 보티건은 권위를 잃고 서부 산간 지역으로 도주하거나 세력이 급격히 위축되었다. 무정부상태를 맞은 로마 도시들은 불탔고, 살아남은 브리튼인들은 산이나 동굴, 숲으로 숨어들었다. 길다스는 이를 "살육의 폭풍"이라고 묘사한다. 콘웰쪽의 브리튼인 상류층과 성직자들이 브르타뉴로 이주해간 것도 이 시기이다.[7]그나마 살아남은 브리튼인들을 규합한 것은 '로마의 마지막 인물'인 암브로시우스 아우렐리아누스였다고 한다.
약 460년경 색슨족이 약탈을 마치고 자신들의 정착지(켄트 등 동남부)로 돌아가려 할 때, 암브로시우스가 이끄는 브리튼 연합군이 이들을 기습하여 격퇴한다. 이 승리는 색슨족을 섬에서 완전히 몰아낸 것은 아니었지만, 색슨족에 대한 공포를 깨뜨린 첫 번째 사건이었고, 이 이후로 브리튼인들도 정신을 차리고 조금씩 규합되어 색슨족에 대항하기 시작한다. 암브로시우스는 로마 귀족 출신으로, 오합지졸이었던 브리튼 피난민들에게 로마 군단(Legion) 식의 대열과 방패술을 훈련시키고, 지형과 전술을 활용하여 매복과 기습을 하였으며, "우리는 로마 시민이다"라는 정체성을 강조하며, 보티건의 실정으로 흩어졌던 민심을 하나로 묶었다고 한다.
주트족은 449년 켄트지방에 확고히 정착해 기반을 다진 후, 영토 확장보다는 그 지역의 농경과 무역에 더 집중한 것으로 보인다. 주트족은 애초에 다른 색슨족이나 앵글족과는 문화적, 언어적으로 약간의 차이가 있었고, 초기 반란 이후로는 동쪽에 터를 잡고 영토확장이나 정복에는 크게 참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앵글족은 주트족 북쪽의 앵글리아에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남부의 색슨족과는 거리가 더 있었다. 당시 브리튼인 기록자인 길다스(Gildas)는 침략자들을 싸잡아서 '사초네스(Saxones, 색슨인들)'라고 적었기 때문에 정확히 확인할 길은 없지만, 실제로 브리튼인과 주로 싸운 것은 남부의 색슨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5세기 말에는 남부의 서식스(Sussex)를 다스리던 색슨족의 왕 아엘라(Aelle)가 게르만계 부족들 사이에서 가장 강력한 권위자인 브레트왈다(Bretwalda, 패자)로 군림하고 있었다.길다스의 기록에서, 이 승리(암브로시우스의 첫 승리) 이후로 어떤 때는 브리튼인이 이기고, 어떤 때는 적(색슨족)이 이기는 일진일퇴의 공방이 바돈 산 전투까지 이어졌다고 묘사되어 있다. 약 40여년간의 긴 전쟁기 끝에, 브리튼인은 바돈 산 전투에서 아엘라의 색슨족을 격퇴하여 진격을 저지하는 데 성공한다. 바돈 산의 위치에 대해서는 의견이 많지만, 대체로 남서부의 로마 온천도시 바스근처일 것으로 추정한다. 주도 세력은 아엘라의 '남부 색슨 연합군'(Sussex)이었다. 인근의 에식스와 초기 웨식스는 참여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주트족과 앵글족은이 참여했다는 근거는 희박하다.
바돈 산 전투에서 색슨족은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색슨족은 도망갈 곳이 없는 산악 지형에서 포위된 채 일방적인 학살을 당했다. 기록자 길다스는 이 전투를 '악당들에 대한 거의 마지막이자 가장 거대한 도살'이라고 묘사했다. 이 전투가 단순한 격퇴가 아니었음은 역사적 사실들로도 증명된다. 색슨족의 주요 추장들과 숙련된 전사 집단이 이 전투에서 거의 다 죽었으며, 이후 약 50년 동안 남부 색슨족 왕국의 이름이 기록에서 거의 사라졌다. 410년부터 500년까지 서쪽으로 밀고 들어오던 게르만족의 전선이 딱 멈췄고, 일부 기록과 고고학적 정황에 따르면, 바돈산 대패 이후 일부 색슨족들이 다시 유럽 대륙(갈리아 등)으로 도망치는 '역이주' 현상까지 벌어졌다. 즉, 단순히 싸움에서 격퇴하는 것이 아니라, 색슨족의 군사적 역량이 한 세대(약 50년) 동안 마비될 정도의 상당한 타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 브리튼인 쪽의 전투 지휘관은, 정확히 정해지지 않았다. 약 300~400년이 흐르고 나서, 이 지휘관이 아서(Authur)였다는 기록이 처음 등장하는데, 실제 암브로시우스의 휘하에 아서라는 부관이 존재했는지, 혹은 그저 만들어진 인물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어쨌든, 암브로시우스가 살아 있었다면 그가 지휘관이었을 수도 있고, 혹은 이미 암브로시우스가 첫 기록에 등장한 시점인 440년으로부터 이미 시간이 50년이나 흐른 시점이니만큼, 지도자가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다고 해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암흑시대 한복판인 만큼 전후에 딱히 비교해볼만 기록이 없기 때문에, 아서왕의 실존여부에 관계없이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그냥 이 인물을 아서왕에 비정하곤 한다.
407년 로마군이 철수하고 410년 로마가 브리튼섬을 포기하자 당장에 브리튼 섬에는 권력과 안보 공백이 발생한다. 이것이 알려지고 픽트족은 남쪽으로 밀고내려왔으며, 스코트족(게일인)들은 서부 해안을 약탈하다 못해 넘어와 정착하기 시작한다.
410~420년대, 당장에 브리튼 섬에는 권력과 안보 공백이 발생한다. 이것이 알려지고 픽트족은 남쪽으로 밀고내려왔으며, 스코트족(게일인)들은 서부 해안을 약탈하다 못해 넘어와 정착하기 시작한다. 아일랜드의 성인 성 패트릭이 아일랜드로 납치된 것도 이 무렵이다. 이런 침입들에 대응하지 못하고 로마식 행정 체계가 붕괴하면서, 당시 로마가 건설한 대도시는 20여개에 달했고, 각 도시의 지방 의회가 각각 군대를 조직해 지역 방어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브리튼인 도시 중심의 친로마파(당시 전체 인구의 15%이나 모여 있음)와 농촌의 반로마파(인구의 80%이나 흩어져 있음)가 싸우기 시작했고, 각지에서 서로 칭왕을 하면서 여러 소왕들이 다투는 군웅할거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안그래도 매년마다 오던 색슨족은, 처음에는 여름에 와서 약탈하고 겨울에 돌아갔지만, 점차 해안가나 외딴 곳에 임시 기지를 만들고 머물기 시작한다.
430년대, 이런 혼란 속에서 반로마파의 보티건(Vortigern)이 강력한 군웅으로 등장해 남부와 중부 브리튼의 대부분을 장악한다. 보티건은 사실상 '브리튼의 왕'처럼 군림했고, 로마 귀족 가문 출신이던 유력자 암브로시우스(Ambrosius Aurelianus)와 대립한다. 그러던 중 북부 픽트족의 압박이 너무 거세지자, 보티건은 이이제이 전략을 사용하기로 결정하고 주트족을 불러들인다. 주트족이나 앵글족은 그 이전까지는 색슨족과는 달리 항상 해안에 찾아오는 약탈세력은 아니었으며, 북해의 약탈자는 주로 색슨족이었다. 특히 주트족은 색슨족과는 좀 거리가 있는 데인족과 가까운 북게르만 계열로, 북쪽을 막아주면 땅을 내어주겠다는 보티건의 말을 듣고 넘어온 것이다.
449년, 수백년 뒤 재구성된 이야기에 따르면, 주트족의 지도자 헹기스트와 호르사(Hengist & Horsa) 무리가 세 척의 배에 나눠 타고 브리튼섬에 넘어온다. 수백 년 뒤 전해지는 전승에 따르면, 헹기스트(Hengist)는 섬에 도착하자마자 두가지를 파악한다. "이 땅은 생각보다 훨씬 비옥하고 넓다." "주인들(브리튼인)들이 군사적으로 매우 나약하고 분열되어 있다." 그래서 헹기스트는 보티건에게, "픽트족을 완벽히 막으려면 병력이 더 필요하다"고 핑계를 대면서, 남부까지 내려온 픽트족(Picts)을 무참히 깨부수고 북쪽으로 밀어내는 동시에 고향(독일 북부/덴마크)에 있는 친척과 다른 색슨, 앵글 부족들에게 전령을 보내 전사들을 더 불러모았다고 전해진다.
450년, 색슨족은 자신들이 싸워준 값에 비해 식량(Annona)과 보급이 턱없이 부족하다며 불만을 터뜨린다. 보티건은 이렇게 많은 인구가 올 줄 몰랐고, 약속한 식량을 다 대줄 수 없었다. 보급이 중단되자, 이들은 정착지인 타넷(Thanet)섬을 넘어 주변 브리튼인 마을들을 약탈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450년 색슨 반란의 시작이다. 상황이 험악해지자 보티건은 협상을 제안한다. 색슨족은 협상을 받아들이고, 평화 회담을 위해 브리튼 귀족 300명과 색슨족 지도자들이 무기 없이 만났으나, 헹기스트가 "Nimet eure saxes!(너희의 단검을 뽑아라!)"라고 외치자, 옷 속에 숨겨온 단검을 꺼낸 색슨족들이 브리튼 귀족 300명을 그 자리에서 몰살했다고 한다. 이를 전승에서는 긴 칼의 밤(The Night of Long Knives)이라고 전다.
이는 물론 정사가 아니고 후대에 덧붙여진 설화에 가까운 이야기이나, 어쨌든 이 시기를 전후로 색슨족, 앵글족 인구가 상당히 유입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미 4세기 말~5세기 초, 로마가 철수하기 이전부터 이미 색슨족 특유의 장신구가 브리튼 동부에서 발견된다. 게르만족의 유입은 이미 수십년에 걸쳐 서서히 진행된 인구 이동이었으며, 보티건은 그 중간에 특정 용병 집단과 '공식 계약'을 맺어 기록에 남게 된 인물이다.
적어도 보티건이 '브리튼 지배층이 게르만 용병과 계약했고', '식량 분쟁으로 불만이 쌓여 갈등이 있었으며', '게르만 세력이 봉기해 파괴적 전투로 이어지고'. 이후 전투가 장기화되다가 490년대 바돈 성 전투에서 일단락된다는 것. 까지는 길다스(Gildas)의 당대 기록에서 명확하게 언급된다. 구체적인 년도와 인명은 후대에 재구된 것이지만, 뼈대 자체는 분명한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용병의 반란에 대해서도, 배신보다는 보티건 쪽의 '경제적 파산'때문이라고 해석되기도 한다. 보티건 정권은 로마식 세금 징수 체계가 붕괴하면서 용병들에게 약속한 식량(Annona)을 지급할 수 없었다. 폭동은 계획된 정복 전쟁이라기보다, 월급(식량)이 밀린 용병들의 폭동으로 시작되어 점차 번진 것으로 해석된다. 특히, 통제 불가능한 이주민 흐름 중 일부를 '용병'으로 공인해버리면서, 이들이 구분가지 않게 되어 이주민 흐름을 막을 수 없게 만들었다는 것이 뼈아픈 실책으로 거론된다.
450년 경 색슨 용병들의 반란이 시작된 후, 보티건은 권위를 잃고 서부 산간 지역으로 도주하거나 세력이 급격히 위축되었다. 무정부상태를 맞은 로마 도시들은 불탔고, 살아남은 브리튼인들은 산이나 동굴, 숲으로 숨어들었다. 길다스는 이를 "살육의 폭풍"이라고 묘사한다. 콘웰쪽의 브리튼인 상류층과 성직자들이 브르타뉴로 이주해간 것도 이 시기이다.[7]그나마 살아남은 브리튼인들을 규합한 것은 '로마의 마지막 인물'인 암브로시우스 아우렐리아누스였다고 한다.
약 460년경 색슨족이 약탈을 마치고 자신들의 정착지(켄트 등 동남부)로 돌아가려 할 때, 암브로시우스가 이끄는 브리튼 연합군이 이들을 기습하여 격퇴한다. 이 승리는 색슨족을 섬에서 완전히 몰아낸 것은 아니었지만, 색슨족에 대한 공포를 깨뜨린 첫 번째 사건이었고, 이 이후로 브리튼인들도 정신을 차리고 조금씩 규합되어 색슨족에 대항하기 시작한다. 암브로시우스는 로마 귀족 출신으로, 오합지졸이었던 브리튼 피난민들에게 로마 군단(Legion) 식의 대열과 방패술을 훈련시키고, 지형과 전술을 활용하여 매복과 기습을 하였으며, "우리는 로마 시민이다"라는 정체성을 강조하며, 보티건의 실정으로 흩어졌던 민심을 하나로 묶었다고 한다.
주트족은 449년 켄트지방에 확고히 정착해 기반을 다진 후, 영토 확장보다는 그 지역의 농경과 무역에 더 집중한 것으로 보인다. 주트족은 애초에 다른 색슨족이나 앵글족과는 문화적, 언어적으로 약간의 차이가 있었고, 초기 반란 이후로는 동쪽에 터를 잡고 영토확장이나 정복에는 크게 참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앵글족은 주트족 북쪽의 앵글리아에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남부의 색슨족과는 거리가 더 있었다. 당시 브리튼인 기록자인 길다스(Gildas)는 침략자들을 싸잡아서 '사초네스(Saxones, 색슨인들)'라고 적었기 때문에 정확히 확인할 길은 없지만, 실제로 브리튼인과 주로 싸운 것은 남부의 색슨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5세기 말에는 남부의 서식스(Sussex)를 다스리던 색슨족의 왕 아엘라(Aelle)가 게르만계 부족들 사이에서 가장 강력한 권위자인 브레트왈다(Bretwalda, 패자)로 군림하고 있었다.길다스의 기록에서, 이 승리(암브로시우스의 첫 승리) 이후로 어떤 때는 브리튼인이 이기고, 어떤 때는 적(색슨족)이 이기는 일진일퇴의 공방이 바돈 산 전투까지 이어졌다고 묘사되어 있다. 약 40여년간의 긴 전쟁기 끝에, 브리튼인은 바돈 산 전투에서 아엘라의 색슨족을 격퇴하여 진격을 저지하는 데 성공한다. 바돈 산의 위치에 대해서는 의견이 많지만, 대체로 남서부의 로마 온천도시 바스근처일 것으로 추정한다. 주도 세력은 아엘라의 '남부 색슨 연합군'(Sussex)이었다. 인근의 에식스와 초기 웨식스는 참여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주트족과 앵글족은이 참여했다는 근거는 희박하다.
바돈 산 전투에서 색슨족은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색슨족은 도망갈 곳이 없는 산악 지형에서 포위된 채 일방적인 학살을 당했다. 기록자 길다스는 이 전투를 '악당들에 대한 거의 마지막이자 가장 거대한 도살'이라고 묘사했다. 이 전투가 단순한 격퇴가 아니었음은 역사적 사실들로도 증명된다. 색슨족의 주요 추장들과 숙련된 전사 집단이 이 전투에서 거의 다 죽었으며, 이후 약 50년 동안 남부 색슨족 왕국의 이름이 기록에서 거의 사라졌다. 410년부터 500년까지 서쪽으로 밀고 들어오던 게르만족의 전선이 딱 멈췄고, 일부 기록과 고고학적 정황에 따르면, 바돈산 대패 이후 일부 색슨족들이 다시 유럽 대륙(갈리아 등)으로 도망치는 '역이주' 현상까지 벌어졌다. 즉, 단순히 싸움에서 격퇴하는 것이 아니라, 색슨족의 군사적 역량이 한 세대(약 50년) 동안 마비될 정도의 상당한 타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 브리튼인 쪽의 전투 지휘관은, 정확히 정해지지 않았다. 약 300~400년이 흐르고 나서, 이 지휘관이 아서(Authur)였다는 기록이 처음 등장하는데, 실제 암브로시우스의 휘하에 아서라는 부관이 존재했는지, 혹은 그저 만들어진 인물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어쨌든, 암브로시우스가 살아 있었다면 그가 지휘관이었을 수도 있고, 혹은 이미 암브로시우스가 첫 기록에 등장한 시점인 440년으로부터 이미 시간이 50년이나 흐른 시점이니만큼, 지도자가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다고 해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암흑시대 한복판인 만큼 전후에 딱히 비교해볼만 기록이 없기 때문에, 아서왕의 실존여부에 관계없이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그냥 이 인물을 아서왕에 비정하곤 한다.
494~500년의 바돈 산 전투로 색슨족이 궤멸하고, 브리튼 섬은 약 40년간은 평화를 누렸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던 536년, 전 세계적인 기후 재앙이 닥쳤다. 소빙하기를 촉발한 북반구의 화산 대폭발은 536년, 539~540년, 547년 총 3번 연달아 일어났다. 첫 폭발이었던 536년의 아이슬랜드 분화로 화산재가 온 지구를 덮으면서 북반구 전 지역에서 '화산 겨울(Volcanic Winter)'을 만들었다. 엄청난 양의 황산염 입자가 성층권으로 뿜어져 올라가 태양광을 차단했다. 역사학자들은 이를 "인류 역사상 최악의 해" 중 하나로 꼽는다. 기록에 따르면 무려 '18개월 동안 밤이 되어 태양이 달처럼 희미해졌고, 여름에도 서리가 내렸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은 고구려, 중국, 비잔틴 제국 등 전 유라시아에서 동일하게 확인된다.
당장 농작물 수확이 불가능해지며 대기근이 닥쳤다. 특히 로마식 도시 생활을 유지하며 중앙 집권적 식량 보급에 의존하던 브리튼인들에게는 치명타였다. 이 화산재로 인한 추위와 기근은 536년에 끝난 것이 아니라 539~540년 중앙아메리카에 연이어 일어나 마야 문명의 도시들을 초살냈고, 536년과 540년의 폭발의 여파가 미처 다 그치기 전에 547년에 어딘가에서 세 번째 먼지 구름이 하늘을 덮었다. 지구 여러 곳에서 일어난 연쇄 폭발로 대기 중 황산 에어로졸이 여러 번 겹쳐 쌓이면서 빛을 차단했다. 전지구 평균 약 -0.5~1℃의 기온 하강이 있었으며, 북반구는 단기적으로 1~2℃가 급변했다. 단기 냉각은 북대서양 해류를 약화했고, 난류 유입이 끊긴 북대서양 수온은 급격히 떨어지면 빙하를 확장시켰으며, 알베도(Albedo)가 증가해 추위를 더 가속했다. 유라시아 북부는 화산에 가까웠던 데다 이 연쇄작용이 시너지를 일으켜 특히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안장왕시기까지 전성기를 달리던 고구려는, 이 재해를 맞고 12년째에, '백성들이 굶주려 서로 잡아먹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어느정도의 추위와 기근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고기후 연구에 따르면, 이 때 급격하게 어두워진 북반구의 기후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약 130년간 한랭한 상태를 유지했다고 한다. 화산이 한 구역이 아닌 여러 곳에서 연달아 터지며, 130년간 기후를 소빙하기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역사 기록이 존재하지 않아 알 수 없지만, 유럽중에서도 북쪽 아슬란랜드 가까이에 있는 브리튼섬은 참혹했을 것이다.[8] 5세기, 약 300만명대이던 브리튼섬의 인구 추정은, 30만에 달하는 게르만인들이 건너왔음애도 불구하고 6세기 말이면 100만명대로 줄어든다. 여기에는 후기 고대 소빙하기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541년, 한창 기근에 고통받는 유럽에 유스티니아누스 페스트가 퍼진다. 이집트에서 시작해 1년 뒤 콘스탄티노플을 지나, 549년에는 브리튼섬에 도달한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콘스탄티노플에서는 하루에만 5,000~10,000명씩의 사람이 죽어나갔다고 한다. 당시 이 도시의 인구는 40~50만명이었는데, 첫 번째 웨이브에서만 12~25만명의 사망자를 내는 기염을 토했다. 도시화가 되어있지 않은 게르만족들이 그나마 이 웨이브에서 덜 타격을 받은 생존자들이었고, 로마화된 도시들을 가지고 있던 지역은 직격타를 맞았다.
소빙하기는 특히 처음 10여년간 대서양 전체를 습하고 찬 공기로 덮어, 여름에도 서리가 내리고 눈이 왔다고 한다. 540년대 후반, 소빙하기가 도래한지 10년이 지나고 이제 피크를 찍은 급격한 추위와 굶주림이 지나가나 할 만할 때 즈음, 안그래도 면역력이 박살이 나 있던 브리튼섬에 페스트가 넘어온다. 역시 기록이 존재하지 않아 알 수 없지만 인구가 말 그대로 증발해버렸을 것임은 어렵지 않게 짐작해볼 수 있다. 이 때, 굶주림을 견디지 못한 브리튼인들이 또 한번 남서쪽에서 대서양을 건너 지금의 프랑스 북서부 브르타뉴(Bretagne)로 대거 이주했습니다. 브르타뉴 이주 중 가장 큰 규모의 이동으로, 이쪽으로만 약 5~10만명의 인구가 이동했다고 추산된다. 북웨일스의 패권을 가지고 있던 브리튼인의 왕 마엘군(Maelgwn)도 대역병으로 사망한다. 그는 바돈 이후 브리튼 세력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버팀목이었고, 그의 사망은 브리튼의 방어선이 무너지는 것과도 같았다.
그리고 550년대부터 브리튼섬 남부와 중부에 색슨족의 앵글족과 왕국이 확장하는 것이 고고학 증거에서 드러난다. 게르만족 계통의 대형 공동묘지가 급증하고, 무기, 브로치, 토기 양식이 6세기 중반을 기점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해안과 동부 중심이던 정착 패턴은 템즈강을 따라 내륙으로 들어가, 미들랜드까지 확장된다. 브리튼계 왕국은 섬의 서남부와 웨일스, 북부로 밀려나가고, 고고학적으로 로마계 도시의 쇠퇴가 관측된다.
브리튼인은 로마식 대규모 농장시스템을 갖춘 도시인들이라서, 기후변화와 페스트에 더 취약했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 앵글로색슨인들은, 원래부터 척박한 독일 북부와 덴마크에서 온 이들이라 상대적으로 척박한 환경에도 익숙했던 것으로 보인다. 어차피 도시를 이루지 않았고, 춥고 습한 땅의 작물에 익숙했으며, 소규모 자급자족 공동체였기에 기근에 더 끈질기게 버텼을 것으로 예상된다. 당연히 앵글로색슨족도 큰 피해를 입었겠지만, 브리튼인이 당한 피해에 비하면 견딜만 했던 것으로 보인다. 역설적으로 기온이 낮아지자 북해의 파도가 일시적으로 잔잔해지거나 기압 배치가 변하면서, 독일과 덴마크에서 브리튼 섬으로 건너오기가 더 수월해졌다는 분석도 있다.
여하튼 6세기 중반, 연이은 대기근과 전염병에 브리튼 인구는 급감했고, 방어 체계는 붕괴했다. 이 빈틈으로 세를 불리고 확장한 것이 색슨족과 앵글족들이었던 것이다. 이번에 확장을 주도한 것은 웨섹스(West Saxons)의 왕 체아울린(Ceawlin)이었다. 그는 서쪽 뿐 아니라 동쪽 켄트지역과 북쪽 템스강 상류지역까지도 영역을 확장한다. 그리고 서진하는 색슨족에게 브리튼인은 맥없이 밀렸던 것 같다. 마침내 577년, 분기점이 되는 데오람 전투(Battle of Deorham)에서 체아울린과 그의 아들 쿠스와인(Cuthwine)이 이끄는 서색슨 군대는 브리튼인을 격퇴하고 서남부 글로스터셔지방을 장악한다. 이 지방은 약 80년 전, 바돈 산 전투에서 색슨족을 격멸했던 곳으로, 당시 격전지 인근의 바스(영국), 글로스터, 사이런세스터, 같은 중요 거점 도시들을 색슨족이 차지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브리튼측의 지도자들이 전사하면서, 브리튼 연합군은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고, 색슨이 브리스톨 채널의 해안선까지 진출하면서 콘월과 웨일즈 사이의 육로가 완전히 차단되었다.
육로가 끊기면서 웨일스의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된 남서부 브리튼인(둠노니아인)들은 고립된 채 웨섹스 왕국에 잠식당한다. 이 승리를 통해 색슨족은 섬의 풍요로운 남서부 평야 지대를 차지하며 '잉글랜드'라는 국가적 정체성을 확고히 굳히게 되었으며, 브리튼인의 대다수는 피지배민으로 앵글로색슨인들의 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어지는 616년, 북부 노섬브리아의 앵글족 왕 애델프리드(Aethelfrith)가 체스터를 점령하며 웨일스군을 대파한다. 이로 인해 남쪽 통로 뿐 아니라 북쪽 통로까지 끊긴 웨일스는 완전히 고립된다. 이제 웨일스는 남(콘월), 동(머시아/웨섹스), 북(노섬브리아)이 모두 앵글로-색슨 왕국들에 의해 포위된 고립지가 되었다. 그 뒤 웨일즈는 그나마 소왕국 정도 규모의 세력을 유지한 채 서쪽 땅에서 끈질기게 버텼고, '산악 지대의 민족'으로 살아가며 브리튼인으로써 중세를 맞이하게 된다.
그러던 536년, 전 세계적인 기후 재앙이 닥쳤다. 소빙하기를 촉발한 북반구의 화산 대폭발은 536년, 539~540년, 547년 총 3번 연달아 일어났다. 첫 폭발이었던 536년의 아이슬랜드 분화로 화산재가 온 지구를 덮으면서 북반구 전 지역에서 '화산 겨울(Volcanic Winter)'을 만들었다. 엄청난 양의 황산염 입자가 성층권으로 뿜어져 올라가 태양광을 차단했다. 역사학자들은 이를 "인류 역사상 최악의 해" 중 하나로 꼽는다. 기록에 따르면 무려 '18개월 동안 밤이 되어 태양이 달처럼 희미해졌고, 여름에도 서리가 내렸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은 고구려, 중국, 비잔틴 제국 등 전 유라시아에서 동일하게 확인된다.
당장 농작물 수확이 불가능해지며 대기근이 닥쳤다. 특히 로마식 도시 생활을 유지하며 중앙 집권적 식량 보급에 의존하던 브리튼인들에게는 치명타였다. 이 화산재로 인한 추위와 기근은 536년에 끝난 것이 아니라 539~540년 중앙아메리카에 연이어 일어나 마야 문명의 도시들을 초살냈고, 536년과 540년의 폭발의 여파가 미처 다 그치기 전에 547년에 어딘가에서 세 번째 먼지 구름이 하늘을 덮었다. 지구 여러 곳에서 일어난 연쇄 폭발로 대기 중 황산 에어로졸이 여러 번 겹쳐 쌓이면서 빛을 차단했다. 전지구 평균 약 -0.5~1℃의 기온 하강이 있었으며, 북반구는 단기적으로 1~2℃가 급변했다. 단기 냉각은 북대서양 해류를 약화했고, 난류 유입이 끊긴 북대서양 수온은 급격히 떨어지면 빙하를 확장시켰으며, 알베도(Albedo)가 증가해 추위를 더 가속했다. 유라시아 북부는 화산에 가까웠던 데다 이 연쇄작용이 시너지를 일으켜 특히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안장왕시기까지 전성기를 달리던 고구려는, 이 재해를 맞고 12년째에, '백성들이 굶주려 서로 잡아먹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어느정도의 추위와 기근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고기후 연구에 따르면, 이 때 급격하게 어두워진 북반구의 기후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약 130년간 한랭한 상태를 유지했다고 한다. 화산이 한 구역이 아닌 여러 곳에서 연달아 터지며, 130년간 기후를 소빙하기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역사 기록이 존재하지 않아 알 수 없지만, 유럽중에서도 북쪽 아슬란랜드 가까이에 있는 브리튼섬은 참혹했을 것이다.[8] 5세기, 약 300만명대이던 브리튼섬의 인구 추정은, 30만에 달하는 게르만인들이 건너왔음애도 불구하고 6세기 말이면 100만명대로 줄어든다. 여기에는 후기 고대 소빙하기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541년, 한창 기근에 고통받는 유럽에 유스티니아누스 페스트가 퍼진다. 이집트에서 시작해 1년 뒤 콘스탄티노플을 지나, 549년에는 브리튼섬에 도달한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콘스탄티노플에서는 하루에만 5,000~10,000명씩의 사람이 죽어나갔다고 한다. 당시 이 도시의 인구는 40~50만명이었는데, 첫 번째 웨이브에서만 12~25만명의 사망자를 내는 기염을 토했다. 도시화가 되어있지 않은 게르만족들이 그나마 이 웨이브에서 덜 타격을 받은 생존자들이었고, 로마화된 도시들을 가지고 있던 지역은 직격타를 맞았다.
소빙하기는 특히 처음 10여년간 대서양 전체를 습하고 찬 공기로 덮어, 여름에도 서리가 내리고 눈이 왔다고 한다. 540년대 후반, 소빙하기가 도래한지 10년이 지나고 이제 피크를 찍은 급격한 추위와 굶주림이 지나가나 할 만할 때 즈음, 안그래도 면역력이 박살이 나 있던 브리튼섬에 페스트가 넘어온다. 역시 기록이 존재하지 않아 알 수 없지만 인구가 말 그대로 증발해버렸을 것임은 어렵지 않게 짐작해볼 수 있다. 이 때, 굶주림을 견디지 못한 브리튼인들이 또 한번 남서쪽에서 대서양을 건너 지금의 프랑스 북서부 브르타뉴(Bretagne)로 대거 이주했습니다. 브르타뉴 이주 중 가장 큰 규모의 이동으로, 이쪽으로만 약 5~10만명의 인구가 이동했다고 추산된다. 북웨일스의 패권을 가지고 있던 브리튼인의 왕 마엘군(Maelgwn)도 대역병으로 사망한다. 그는 바돈 이후 브리튼 세력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버팀목이었고, 그의 사망은 브리튼의 방어선이 무너지는 것과도 같았다.
그리고 550년대부터 브리튼섬 남부와 중부에 색슨족의 앵글족과 왕국이 확장하는 것이 고고학 증거에서 드러난다. 게르만족 계통의 대형 공동묘지가 급증하고, 무기, 브로치, 토기 양식이 6세기 중반을 기점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해안과 동부 중심이던 정착 패턴은 템즈강을 따라 내륙으로 들어가, 미들랜드까지 확장된다. 브리튼계 왕국은 섬의 서남부와 웨일스, 북부로 밀려나가고, 고고학적으로 로마계 도시의 쇠퇴가 관측된다.
브리튼인은 로마식 대규모 농장시스템을 갖춘 도시인들이라서, 기후변화와 페스트에 더 취약했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 앵글로색슨인들은, 원래부터 척박한 독일 북부와 덴마크에서 온 이들이라 상대적으로 척박한 환경에도 익숙했던 것으로 보인다. 어차피 도시를 이루지 않았고, 춥고 습한 땅의 작물에 익숙했으며, 소규모 자급자족 공동체였기에 기근에 더 끈질기게 버텼을 것으로 예상된다. 당연히 앵글로색슨족도 큰 피해를 입었겠지만, 브리튼인이 당한 피해에 비하면 견딜만 했던 것으로 보인다. 역설적으로 기온이 낮아지자 북해의 파도가 일시적으로 잔잔해지거나 기압 배치가 변하면서, 독일과 덴마크에서 브리튼 섬으로 건너오기가 더 수월해졌다는 분석도 있다.
여하튼 6세기 중반, 연이은 대기근과 전염병에 브리튼 인구는 급감했고, 방어 체계는 붕괴했다. 이 빈틈으로 세를 불리고 확장한 것이 색슨족과 앵글족들이었던 것이다. 이번에 확장을 주도한 것은 웨섹스(West Saxons)의 왕 체아울린(Ceawlin)이었다. 그는 서쪽 뿐 아니라 동쪽 켄트지역과 북쪽 템스강 상류지역까지도 영역을 확장한다. 그리고 서진하는 색슨족에게 브리튼인은 맥없이 밀렸던 것 같다. 마침내 577년, 분기점이 되는 데오람 전투(Battle of Deorham)에서 체아울린과 그의 아들 쿠스와인(Cuthwine)이 이끄는 서색슨 군대는 브리튼인을 격퇴하고 서남부 글로스터셔지방을 장악한다. 이 지방은 약 80년 전, 바돈 산 전투에서 색슨족을 격멸했던 곳으로, 당시 격전지 인근의 바스(영국), 글로스터, 사이런세스터, 같은 중요 거점 도시들을 색슨족이 차지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브리튼측의 지도자들이 전사하면서, 브리튼 연합군은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고, 색슨이 브리스톨 채널의 해안선까지 진출하면서 콘월과 웨일즈 사이의 육로가 완전히 차단되었다.
육로가 끊기면서 웨일스의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된 남서부 브리튼인(둠노니아인)들은 고립된 채 웨섹스 왕국에 잠식당한다. 이 승리를 통해 색슨족은 섬의 풍요로운 남서부 평야 지대를 차지하며 '잉글랜드'라는 국가적 정체성을 확고히 굳히게 되었으며, 브리튼인의 대다수는 피지배민으로 앵글로색슨인들의 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어지는 616년, 북부 노섬브리아의 앵글족 왕 애델프리드(Aethelfrith)가 체스터를 점령하며 웨일스군을 대파한다. 이로 인해 남쪽 통로 뿐 아니라 북쪽 통로까지 끊긴 웨일스는 완전히 고립된다. 이제 웨일스는 남(콘월), 동(머시아/웨섹스), 북(노섬브리아)이 모두 앵글로-색슨 왕국들에 의해 포위된 고립지가 되었다. 그 뒤 웨일즈는 그나마 소왕국 정도 규모의 세력을 유지한 채 서쪽 땅에서 끈질기게 버텼고, '산악 지대의 민족'으로 살아가며 브리튼인으로써 중세를 맞이하게 된다.
시간이 그대로 흘러 770년 즈음, 중부 머시아(Mercia)의 앵글족 왕 오파(Offa)는 웨일스와의 경계선에 거대한 흙 성벽을 쌓다. 약 240km에 달하는 이 방벽은 이후 오파의 방벽(Offa's Dyke)이라 불리며, 앵글족의 땅과 브리튼인의 땅을 구분하는 물리적 국겨선이 되었고, 이 국경선은 이후 중세와 근대를 거쳐 현대까지 이어져내려오게 된다.
이후로 수백년, 천년이 넘는 시간 동안 고립과 저항의 시기를 지낸 웨일스인은 강력한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다.
웨일스인들은 스스로를 '동포'라는 뜻의 '컴리'(Cymry)라고 부른다. 반면 앵글로-색슨, 즉 잉글랜드인들은 그들을 '외국인/노예'라는 뜻의 '웰라스(Wealas/Wales)'가고 불렀다. 이 명칭이 현재 웨일스의 지역과 민족을 지칭하는 용어로 완전히 정착된 것은 오파의 방벽이 세워진 이후, 7왕국의 후반기인 8~10세기 무렵이다.
특히, 9세기 후반 웨식스가 앵글로-색슨 칠왕국을 통일해 나가며, 알프레드 대왕 시기 《앵글로-색슨 연대기》를 편찬하였고, 이 책에서 남은 브리튼인들을 'Waelisc'(형용사) 'Wealas'(명사)로 표기하면서, 이후로 이것이 공식적인 종족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10세기 초, 잉글랜드의 첫 번째 진정한 왕이라 불리는 애설스탠(Athelstan) 시기에 웨일스가 속국화된 조공국이 되는데, 이 때 외교 문서에서 웨일스인이라는 이름을 잉글랜드와는 다른, 독자적인 법과 언어를 가진 'Wales' 세력으로 명확히 규정하여 공식화하였고,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게 된다.
이후로도 웨일스는 하나의 통일된 국가가 아니라 기네드(Gwynedd), 포이스(Powys), 데헤이바르스(Deheubarth) 등 여러 소왕국으로 나뉘어 서로 싸우면서도, 잉글랜드에게는 힘을 합해 끈질기게 저항했왔다. 평지 전투에서는 색슨족에게 밀렸지만, 산악 지형을 이용한 게릴라전과 장궁(Longbow)을 주로 사용했으며, 비록 영토는 잉글랜드의 1/10 수준으로 줄어들었지만, 앵글로-색슨족에게 동화되지 않고 오늘날까지 웨일스어와 문화를 보존하고 있다.
이후로 수백년, 천년이 넘는 시간 동안 고립과 저항의 시기를 지낸 웨일스인은 강력한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다.
웨일스인들은 스스로를 '동포'라는 뜻의 '컴리'(Cymry)라고 부른다. 반면 앵글로-색슨, 즉 잉글랜드인들은 그들을 '외국인/노예'라는 뜻의 '웰라스(Wealas/Wales)'가고 불렀다. 이 명칭이 현재 웨일스의 지역과 민족을 지칭하는 용어로 완전히 정착된 것은 오파의 방벽이 세워진 이후, 7왕국의 후반기인 8~10세기 무렵이다.
특히, 9세기 후반 웨식스가 앵글로-색슨 칠왕국을 통일해 나가며, 알프레드 대왕 시기 《앵글로-색슨 연대기》를 편찬하였고, 이 책에서 남은 브리튼인들을 'Waelisc'(형용사) 'Wealas'(명사)로 표기하면서, 이후로 이것이 공식적인 종족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10세기 초, 잉글랜드의 첫 번째 진정한 왕이라 불리는 애설스탠(Athelstan) 시기에 웨일스가 속국화된 조공국이 되는데, 이 때 외교 문서에서 웨일스인이라는 이름을 잉글랜드와는 다른, 독자적인 법과 언어를 가진 'Wales' 세력으로 명확히 규정하여 공식화하였고,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게 된다.
이후로도 웨일스는 하나의 통일된 국가가 아니라 기네드(Gwynedd), 포이스(Powys), 데헤이바르스(Deheubarth) 등 여러 소왕국으로 나뉘어 서로 싸우면서도, 잉글랜드에게는 힘을 합해 끈질기게 저항했왔다. 평지 전투에서는 색슨족에게 밀렸지만, 산악 지형을 이용한 게릴라전과 장궁(Longbow)을 주로 사용했으며, 비록 영토는 잉글랜드의 1/10 수준으로 줄어들었지만, 앵글로-색슨족에게 동화되지 않고 오늘날까지 웨일스어와 문화를 보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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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마 제국이 쇠락하고, 게르만족의 일파인 앵글로색슨족이 브리튼 섬을 침략하자 브리튼인들의 상당수가 앵글로색슨족에 동화되었고, 나머지는 서쪽으로 물러나 현대의 웨일스와 콘월이 되었다. 저 유명한 서사시 아서 왕 전설의 배경이 앵글로색슨족의 침략 즈음이다. 브리튼인들 중 일부는 바다를 건너 프랑스 서부 브르타뉴에 정착했다. 로만 브리튼 항목 참조.
6세기 브리튼어 화자들의 이주 |
[1] 정확히는 인디고(Indigo)색 염료를 말한다. 한자로는 람(藍), 즉 쪽풀의 색이다. 동양에서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고 할 때 청(靑)색이 나온다는 그 풀이 바로 쪽풀 람(藍)으로, 남색이라고도 한다. 물론 Woad와 Indigo와 쪽풀은 각각 전혀 다른 식물이다. 하지만 풀에서 나오는 색소의 화학식이 동일하고, 정확히 같은 인디고(남)색을 내는 것이다.=(수렴 진화)[2] 영어로 Britons라고 하면 영국인(British)의 뜻이 되기 때문에 앞에 Celtic 표기를 꼭 해야한다는 말은 바보같은 말이다. 영국인들도 대부분 역사수업 듣고 구분해서 알아듣는다. 영국에서 British 말고 Britons라고 하면 '고대 켈트 조상님들'느낌이다. 형용사로 할때는 t를 두개 써서 Brittonic 이라고 한다.[3] 2016년도 이후의 집단유전학 연구결과이다. 잉글랜드인 혈통의 브리튼인(켈트인)기여도는 모든 지역에서 최소 60% 이상이며, 특히 북부/서부는 75~85%가 켈트 혈통이다. 그나마 앵글로색슨 기여도가 높은 동부/남부도 앵글로색슨 비율은 40%선에 그치며, 켈트혈통이 60%을 넘는다.[4] 아일랜드는 켈트계이다. 연구는 유입된 인구가 아닌 가능한 오래된 토착 거주민 집안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이 연구보다 실 거주민은 켈트비율이 더 높을 것이다.[5] 현재 영어와 웨일스어는 사실상 외국어이다.[6] 이에 대해서, 기층인원 자체는 2500년보다 더 이전에 먼저 아일랜드에 들어와 있었으며, 철기 문명만 500년경에 소수 인원에 의해서 전달되었다는 설도 있다. 고고학정 유적은 분명 500년 경 갑자기 등장하는데, 이베리아반도에서 브리튼섬을 전혀 거치지 않고 아일랜드로 간다는 것이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7] 규모는 적게보는 경우 1만명 정도, 많게보는 경우 3~5 명. 이 시기 이주로 인해 아르모리카의 언어가 켈트어(브리튼어)로 완전히 대체되기 시작했다.[8] 아이슬란드의 폭발은 저 동쪽 고구려에서도 지진을 일으켰다고 하는데, 바로 근처에 있는 영국에선 웬만한 도시가 붕괴했을지도 모른다.[9] 《브리타니아 열왕사》에 따르면 아서 왕의 삼촌이다. 아서 왕의 모델이라고도 하고 실존여부는 정확하지 않다.[10] 아일랜드에 처음으로 가톨릭을 전파한 사람이지만 게일인이 아닌 브리튼인이었다.[11] 게일인이라는 이야기도 있으나, 정황 상 브리튼인 부족들 중 북방 고토(Hen Ogledd)에서 강세였던 브리간테스(Brigantes) 부족일 확률이 높다.[12] 아서 왕 전설의 그 아서 왕이다. 전설속의 왕인만큼 실존여부는 확실하지 않다.[13] 문헌 및 기록 상으로 '앨런'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가장 오래된 사람이다. 실존 여부는 확실하지 않으나, 그가 6~7세기 브르타뉴에서 마지막으로 활동한 이후에 그의 이름을 사용한 군벌과 군주, 왕 등이 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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