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파셋 댐 붕괴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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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대, 프랑스의 리비에라에서 프레쥐스로 흐르는 레이랑(Reyran)강은 겨울에는 물이 넘쳐났으나 여름에는 말라 바닥이 보일 정도로 수량 차이가 심해 겨울에 물을 저장해 둘 필요성이 있었고, 덤으로 관광객도 모을 레저시설을 만들 겸 댐을 짓기로 했다. 1947년, 지역 정부는 댐 디자인 담당으로 프랑스의 유명한 엔지니어였던 안드레 코윈(André Coyne)을 불렀고, 프로젝트는 Department Var에서 담당했다.
그렇게 1952년 4월 공사를 시작해 1954년 10월 공사를 끝낸 말파셋 댐은 프레쥐스에서 약 12km 상류 지점에 폭 1.5 ~ 6.76m, 높이 66.5m, 길이 223m에 달하는 규모로 지어지게 되었다.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아치형태로 지어져 댐에 물이 대용량으로 저장되었고, 물의 무게가 댐의 벽을 눌러도 특유의 아치 형태가 막을 수 있었다. 저수용량은 최대 5,000만 m³에 달했다. 댐의 오른쪽은 협곡의 산에 그대로 붙어있었으나, 왼쪽은 댐을 지으면서 협곡과 댐 사이에 틈이 생겨서 콘크리트 다리를 만들어 막아야 했다.
댐 아래에는 물이 너무 차지 않게 따로 빼내는 곳도 지어졌다. 당시엔 가장 얇으면서도 가장 높은 댐이었다. 하지만 댐이 지어진 곳의 지형이 좋지 않았다. 기초지반의 암반에 석탄기의 암층이 기반암인 편마암을 덮고 있었는데, 편마암은 물이 없는 댐 자체의 무게는 견뎌냈으나, 물이 차오르면서 무거워진 댐의 무게를 견디기엔 벅찼다. 하지만 후술하듯이 물이 다 차기까지 너무 오래 걸리는 바람에 해당 문제가 당시엔 발견되지 못했다.
댐이 다 지어지고도 물이 다 차기까지는 약 5년이 걸렸다. 몇년 동안 물이 조금씩 차오르면서 댐의 오른쪽에 금이 조금씩 가기 시작했다. 1959년 11월에는 폭우가 오면서 물이 더 차올랐고, 댐을 다 채우기까지 높이 7m 정도만 남은 상태에서 금이 더 커져 물이 새기까지 했다. 그러다가 12월이 되자, 500mm에 달하는 엄청난 양의 폭우가 내렸다. 댐의 직원이었던 안드레 페로(André Ferro)는 수문을 열어 물을 어느 정도 빼야 한다고 말했으나, 채우는 데 몇 년이나 걸린 물을 빼기란 힘든 결정인 데다가, 하류에서 당시 고속도로를 만드는 중이라 물을 함부로 빼면 공사에 지장이 생길 수 있기에 기각당했다. 폭우로 인해 꼭대기까지 7m만 남았던 물은 하루만에 4m로 거리를 좁혔다. 나중에 가서야 수문을 열어 물을 빼긴 했으나 수위가 고작 cm 단위로 내려갔다.
그러다가 1959년 12월 2일 수요일 오후 9시 13분, 금이 갔던 댐의 오른쪽 부분이 무너졌다. 순식간에 높이 40m, 너비 500m에 달하는 엄청난 양의 물이 시속 70km의 속도로 아래를 향해 들이닥쳤다. 초대형 쓰나미가 되어버린 물은 댐 아래에 있었던 마을과 고속도로, 숲, 빌딩 등을 모조리 쓸어버리고 20분 만에 프레쥐스에 들이닥쳤다. 물이 들이닥치면서 전기가 먼저 끊겼고, 언덕 아래의 주택들과 농장, 공장까지 전부 물에 쓸려나갔으며, 인근을 지나던 열차도 물에 휩쓸려 탈선했다. 물은 최종적으로 지중해까지 흘러가면서 건물 155채를 무너뜨렸고, 796채에 피해를 줬다.
프랑스 정부는 군대까지 출동시켜서 희생자들을 수습하고, 부상자와 이재민을 도왔다. 유럽 인근 국가에서도 피해자들을 도왔다. 이재민들을 위한 대피소를 지었고, 음식과 물을 공급했다. 보트와 헬기, 그리고 트럭을 동원해 시신을 수습해 옮겼다.
이 참사로 인한 사망자는 421명에 달해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 역사상 최악의 참사로 기록되었다.[1] 사망자 중 무려 135명이 어린이었다. 그리고 79명의 어린이들이 이 재해로 인해 고아가 되었다.
그렇게 1952년 4월 공사를 시작해 1954년 10월 공사를 끝낸 말파셋 댐은 프레쥐스에서 약 12km 상류 지점에 폭 1.5 ~ 6.76m, 높이 66.5m, 길이 223m에 달하는 규모로 지어지게 되었다.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아치형태로 지어져 댐에 물이 대용량으로 저장되었고, 물의 무게가 댐의 벽을 눌러도 특유의 아치 형태가 막을 수 있었다. 저수용량은 최대 5,000만 m³에 달했다. 댐의 오른쪽은 협곡의 산에 그대로 붙어있었으나, 왼쪽은 댐을 지으면서 협곡과 댐 사이에 틈이 생겨서 콘크리트 다리를 만들어 막아야 했다.
댐 아래에는 물이 너무 차지 않게 따로 빼내는 곳도 지어졌다. 당시엔 가장 얇으면서도 가장 높은 댐이었다. 하지만 댐이 지어진 곳의 지형이 좋지 않았다. 기초지반의 암반에 석탄기의 암층이 기반암인 편마암을 덮고 있었는데, 편마암은 물이 없는 댐 자체의 무게는 견뎌냈으나, 물이 차오르면서 무거워진 댐의 무게를 견디기엔 벅찼다. 하지만 후술하듯이 물이 다 차기까지 너무 오래 걸리는 바람에 해당 문제가 당시엔 발견되지 못했다.
댐이 다 지어지고도 물이 다 차기까지는 약 5년이 걸렸다. 몇년 동안 물이 조금씩 차오르면서 댐의 오른쪽에 금이 조금씩 가기 시작했다. 1959년 11월에는 폭우가 오면서 물이 더 차올랐고, 댐을 다 채우기까지 높이 7m 정도만 남은 상태에서 금이 더 커져 물이 새기까지 했다. 그러다가 12월이 되자, 500mm에 달하는 엄청난 양의 폭우가 내렸다. 댐의 직원이었던 안드레 페로(André Ferro)는 수문을 열어 물을 어느 정도 빼야 한다고 말했으나, 채우는 데 몇 년이나 걸린 물을 빼기란 힘든 결정인 데다가, 하류에서 당시 고속도로를 만드는 중이라 물을 함부로 빼면 공사에 지장이 생길 수 있기에 기각당했다. 폭우로 인해 꼭대기까지 7m만 남았던 물은 하루만에 4m로 거리를 좁혔다. 나중에 가서야 수문을 열어 물을 빼긴 했으나 수위가 고작 cm 단위로 내려갔다.
그러다가 1959년 12월 2일 수요일 오후 9시 13분, 금이 갔던 댐의 오른쪽 부분이 무너졌다. 순식간에 높이 40m, 너비 500m에 달하는 엄청난 양의 물이 시속 70km의 속도로 아래를 향해 들이닥쳤다. 초대형 쓰나미가 되어버린 물은 댐 아래에 있었던 마을과 고속도로, 숲, 빌딩 등을 모조리 쓸어버리고 20분 만에 프레쥐스에 들이닥쳤다. 물이 들이닥치면서 전기가 먼저 끊겼고, 언덕 아래의 주택들과 농장, 공장까지 전부 물에 쓸려나갔으며, 인근을 지나던 열차도 물에 휩쓸려 탈선했다. 물은 최종적으로 지중해까지 흘러가면서 건물 155채를 무너뜨렸고, 796채에 피해를 줬다.
프랑스 정부는 군대까지 출동시켜서 희생자들을 수습하고, 부상자와 이재민을 도왔다. 유럽 인근 국가에서도 피해자들을 도왔다. 이재민들을 위한 대피소를 지었고, 음식과 물을 공급했다. 보트와 헬기, 그리고 트럭을 동원해 시신을 수습해 옮겼다.
이 참사로 인한 사망자는 421명에 달해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 역사상 최악의 참사로 기록되었다.[1] 사망자 중 무려 135명이 어린이었다. 그리고 79명의 어린이들이 이 재해로 인해 고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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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위는 터키항공 981편 추락 사고(346명), 3위는 에어 프랑스 447편 추락 사고(229명). 2위는 프랑스 영토에서 발생했지만 프랑스인 사망자는 16명이었고, 3위는 말파셋 댐 붕괴사고로부터 딱 50년 후, 12월 2일의 절반 되는 6월 1일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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