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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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간기(1918~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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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기구
로마 진군
Marcia su Roma
March on R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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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1]
장소
원인
국가 파시스트당의 영향 확산
교전국 및 세력
지휘관
병력
이탈리아 왕국군 로마 주둔군
검은 셔츠단 약 60,000명
피해
없음
없음
결과
진군 성공, 무솔리니의 수상 취임
 

1. 개요2. 진행3. 결과4. 여담

 

1. 개요[편집]

 
1922년 10월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끄는 국가 파시스트당과 당의 친위대인 정치깡패 조직 검은 셔츠단이 집권을 위해 일으킨 쿠데타. 당시 이탈리아의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진압을 선택하는 대신 무솔리니가 총리 직에 오르는 것을 승인하면서 별다른 유혈사태 없이 종결됐으며 이후 이탈리아 왕국제2차 세계 대전 종전까지 파시스트 당의 일당독재 체제에 놓였다.
 

2. 진행[편집]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이탈리아는 심각한 이념 대립으로 인해 극도의 사회혼란이 빚어졌고 이런 상황에서 1919년 전직 사회주의자 출신이었던 베니토 무솔리니이탈리아 전투 파쇼라는 알 수 없는[3] 정치 단체를 결성했다. 그리고 이 단체를 호위하기 위한 사설 경비 조직으로 행동대(Squadra d'Azione)라는 단체를 조직하고 이 조직은 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 셔츠단이라는 이름의 단체로 재탄생했다.

전역자, 실업자 출신으로 이루어진 검은 셔츠단은 1920년 밀라노에서 일어난 노동자들의 파업을 무자비하게 때려잡았고 이에 실업가와 지주들은 이탈리아 전투 파쇼를 적극적으로 후원하기 시작했다. 이를 기반으로 1921년 총선에서 무솔리니와 전투 파쇼는 원내에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한편 1922년에는 전투 파쇼는 민족주의적인 색채를 가미하여 국가 파시스트당(Partito Nazionale Fascista)으로 명칭을 바꿨다. 계속된 사회 혼란에 지쳐 있었던 이탈리아인들은 강력한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로마 제국의 부흥'과 같은 장밋빛 미래를 약속한 무솔리니에게 열광했다. 1920년 이전 파시스트 국민당의 회원은 1만명 남짓이었으나 1922년 중반엔 70만 이상의 당원을 자랑하면서 급속히 세를 불렸다. 거리마다 검은 셔츠단이 좌파 세력들을 두들겨팼다.

이런 상황에서 좌파 세력들의 최후의 반격으로 총파업이 1922년 7월 31일 발생했지만 무위로 돌아갔다. 이는 오히려 좌파의 결속력 약화와 더불어 무솔리니의 정치적 영향력 확대로 이어졌다. 같은 해 10월 22일 나폴리에서 진행 중이었던 전당대회에서 무솔리니는 '우리의 목표는 간단하다. 이탈리아를 통치하자.'며 검은 셔츠단과 당원들에게 로마로 진군할 것을 명령했다.[4] 당시 이탈리아의 총리였던 루이지 팍타는 일찍이 무솔리니에게 장관 자리를 제안한 졸리티 총리의 대행자로 이미 다수당 지위를 잃어서 거의 힘이 없었다. 다만 파시스트의 권력획득 과정을 수수방관했다는 일부 오해와는 달리 로마 진군에 단호하게 대응하기로 결정해 알프스에서 5개 정예대대를 불러 로마 수비를 강화하고 경찰과 철도청 직원들을 동원해 로마로 들어오는 파시스트들의 열차를 정지하고 이들을 검문하기로 했다.

이것 때문에 2만명 이상의 파시스트들의 로마 진군이 좌절되었고 도보로 진입을 시도한 9천명도 악천후와 물자 부족으로 인해 변변찮은 성과를 보였다. 하지만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팍타가 제출한 계엄령안을 거부했으며 거기에 군대를 동원하는 것도 거부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불과 400명에 불과한 경찰력만으로 2만명의 파시스트들이 무력화되었는데 이때 검은셔츠단의 무장 상태는 정말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개인화기조차 제대로 구비가 안 돼서 몽둥이 같은 것을 들고 있었던 사람들도 무척 많았다. 즉 정규군만 동원하면 진압하는 것 자체는 무리가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국왕의 거부에 팍타는 총리직에서 사임했다.

국왕이 군대 동원을 거부한 이유에 대해 다양한 견해가 존재하는데 그 중에서도 정설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하나는 군대 동원이 전면적인 내전으로 발전할 것을 국왕이 우려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10~11월 로마 진군을 하기 전부터 파시스트들은 7월 총파업을 진압하면서 사실상 볼로냐, 밀라노를 위시한 이탈리아 북부의 핵심 산업도시들을 장악하다시피 했다. 반면 루이지 팍타, 졸라티 총리 등 기성 정치인들은 분열되어 있는 와중에 총리가 되어 혼란에 처한 나라를 구하고자 선뜻 나서려 하지 않았다. 즉, 총리 임명권이 있는 국왕 입장에서는 기성 정치인들을 통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고자 해도 이들이 원하지 않는 이상 이들을 선택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파시스트 아니면 공산주의자 둘 중 하나밖에 선택지가 줄어들게 된다. 여기에 더해 국왕 개인의 기억도 있는데, 선왕인 움베르토 1세는 1898년 밀라노에서의 좌익 성향 노동자들의 시위를 유혈진압했다가 2년 뒤인 1900년 무정부주의자들의 보복성 암살을 당해 사망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역사적인 경험 때문에 좌익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건 그렇다 치더라도 국왕 본인은 이미 북부 주요 도시들이 그 시절 좌익 노동자들에 비해 훨씬 더 잘 조직된 집단 손에 넘어간 상황에서 로마 진군을 유혈진압했더라도 훨씬 더 폭력적인 반발에 직면해야 했을 것임을 우려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을 볼 때 로마 진군은 그 행위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결과 여부를 떠나 파시스트들이 그걸 시도할 정도로 세를 불렸다는 점과 그 당시 이탈리아 정치권의 책임회피적 경향과 분열이라는 본질적인 한계라는 틈새를 파시스트들이 철저히 이용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즉, 로마 진군과 길거리 유혈사태를 이용해 무솔리니가 자기 말고 대안이 없다는 걸 안 정치권과 밀고 당기기 협상을 한 것이 사태의 본질이다.

다른 하나는 우파의 근간을 차지하던 자본가와 민족주의 세력들이 무솔리니를 만만히 본 채 그를 꼭두각시로 배후에서 조종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국왕을 설득했다는 것이다. 10월 28일 국왕이 무솔리니에게 총리직에 취임하여 내각을 구성해 줄 것을 요청하면서 로마 진군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무솔리니는 10월 30일 로마로 와서 국왕을 알현하였고 총리로 취임했다.
 

3. 결과[편집]

 
그래도 초기에는 좌파와 중도 세력이 의회에서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최소한의 민주주의는 운영됐지만 그것은 오래가지 못했다. 검은 셔츠단은 치안유지대로 이름을 바꾸어 공권력을 차지했다. 당연히 민중의 지팡이 역할을 하지는 않았고 공권력을 빙자한 사적인 폭력이 사회 곳곳에서 빚어졌다. 또 선거법도 파시스트당의 입맛대로 개정되어 최다정당에게 전체 의회 정원의 2/3를 준다는 정신나간 내용(아체르보법)으로 변경됐고[5][6][7] 파시즘에 반대하는 정치인들과 언론사에 대한 탄압은 백주대낮에도 자행됐다. 더불어 파시스트 정권은 청소년들의 교육에도 많은 신경을 썼는데[8] 교과서가 정권 입맛에 맞게 대폭 수정된 것은 물론이고 교사들은 무솔리니에게 충성 맹세를 해야 했다. 또 유벤투스라는 이름의 군대식으로 마개조된 단체에 학생들이 억지로 가입해야 했던 것은 덤.[9]
 

4. 여담[편집]

 
로마 진군이 진행 중이던 시점에 무솔리니는 쿠데타가 실패하면 바로 스위스로 달아나려고 밀라노[10]에 짱박혀 있었으며 심지어 행진이 개시되기 직전에 겁을 먹고 행진을 취소하라는 전보를 쳐놓고 극장에서 연극을 보고 있었다.[11] 그런데 그 전보가 제대로 전달이 안 되었다.

밀라노에 있었던 무솔리니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수상 자리를 제안하자 기차를 타고 허겁지겁 달려가느라 검은 셔츠에 모닝코트만 입은 차림으로 국왕 앞에 나타났으며 전장에서 왔으니 옷차림을 용서해 달라고 요구했다.

무솔리니가 취임한 후인 10월 31일에야 파시스트들은 로마로 진입하여 행진하며 유혈사태를 벌였고 이것 때문에 무솔리니는 50대의 특별수송 차량을 동원해 검은 셔츠단을 로마에서 추방해 버렸다.
 
[1] 위 사진 가운데 있는 인물은 베니토 무솔리니인데, 그는 로마 진군이 실패할까 두려워 밀라노에서 스위스 망명을 준비했으며, 도중에 로마 진군이 성공했다는 소식을 듣고 허겁지겁 달려와 찍은 연출된 사진이다. 마따끄[2] 당시 이탈리아 왕국 총리[3] 애초에 파시즘이라는 정치이념 자체가 도무지 갈피 없이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는 특성이 있지만 아직 최소한의 이념 정리도 안 된 초창기에는 이런 애매모호함이 더 컸다. 굳이 특징을 꼽아 보자면 팽창주의적인 대외정책을 추구하는 한편 대내적으로는 권위주의적이고 조합주의적인 체제를 주장했다는 점이다.[4] 여담이지만 진군을 명령하기 직전에 무솔리니는 주이탈리아 미국 대사에게 미국이 파시스트당의 집권을 환영하는지에 대해서도 물어봤다고 한다. 물론 답은 No Problem. 즉 이때만 해도 미국은 반공이라는 공통점 때문에 파시즘의 위험성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5] 1921~22년 의회 의석을 보면 이탈리아 사회당을 위시한 좌파는 123석, 중도보수 성향의 가톨릭 인민당은 108석, 졸라티가 이끄는 국민블록(졸라티와 본인은 그냥 중도우익 자유주의자지만 좌익의 득세에 위협을 느껴 파시스트당을 비롯한 다른 우파와 연립했다.)이 105석을 차지했다. 무솔리니 국가파시스트당은 국민블록에 참여해 35석을 차지했고, 20석은 무솔리니 부하가 아닐 뿐이지 성향은 국가파시스트당과 별로 다르지 않은 이탈리아 민족주의 협회가 차지했다.[6] 무솔리니도 그렇고 그 이전 수상도 그렇고 정권은 국민블록이 쥐긴 했는데 막상 의회 의석이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부가 구성되기가 쉽지 않았고 이 상황 자체에 염증을 느끼는 사람들은 굉장히 많았다. 의회에서 확실한 무솔리니 편은 535석 중 좁게는 37석, 많게는 107석이 다였기 때문에 로마진군 직후의 무솔리니도 여기서 자유롭지 않았다. 그렇다고 일반 국민과 달리 의회제 국가에서 의원들에게 피마자유를 먹이는 건 어렵다. 지금 시점에야 25%만 먹으면 2/3가량의 의회의석을 보장하는 일견 막장적인 내용이 통과된 데에는 사실상의 무정부상태에 염증을 느끼는 일반 국민여론이 그만큼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파시스트들이 당근과 그 외에도 몽둥이, 피마자유로 거리 민심을 쥔 것도 있고[7] 좌파야 아체르보법에 당연히 비판적이었고 사실상 중간에 낀 가톨릭 인민당이 누구 편을 들어주느냐에 따라 달린 건데, 원래 가톨릭 인민당을 이끌던 스투르초 신부는 반파시스트 성향이었지만 무솔리니는 이걸 노리고 라테란 조약을 포함해 친가톨릭 정책을 펴기로 한다. 이 때문에 당내 민심이 친무솔리니로 기울어 스투르초는 물러나고 가톨릭 인민당이 아체르보법에 몰표를 던지게 되어 해당 법이 통과된다.[8] 이는 단순히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나치 독일프랑코 스페인, 소련, 북한, 중국을 비롯한 전체주의 국가에서 매우 자주 보이는 성향이다. 기성 세대들은 포기하더라도 자라나는 새싹들에게는 자신들의 이념을 철저히 세뇌시키겠다는 뜻이다.[9] 유벤투스 FC와는 상관없다. 애초에 유벤투스는 청년을 의미하는 라틴어 단어이며 고대 로마 시절에도 아우구스투스에 의하여 동명의 청소년 단체가 운영됐다.[10] 밀라노는 원래 파시스트 당사가 있던 곳이었고, 파시스트당 기관지인 이탈리아의 인민 본사도 거기 있었다.[11] 사실 겁 먹은 것도 사실이긴 한데 이런 식으로 극장에서 연극을 보는 것도 협상 과정에서의 블러핑의 일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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