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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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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호 | 우강(愚岡) |
부모 | 아버지 나병헌(羅秉憲) 어머니 이름 미상 |
학력 | |
의거 | |
서훈 | |

1892년 2월 4일 황해도 재령군 북률면 남지리에서 나병헌(羅秉憲)[5]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 지역은 125년간 나석주의 가문이 소유한 토지였는데, 기름진 땅이라 농작물이 잘 자랐으며 나석주도 어릴 때부터 집안의 농사를 돕고 살았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고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세워지면서 나석주의 집안은 땅을 일제에게 빼앗기고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일제의 지독한 수탈에 한 가족이 1년을 먹기도 힘들 정도로 사정이 나빠지자 격분한 나석주는 재령군사무소로 따지러 갔지만 일제는 콧방귀를 뀌며 땅을 강제로 빼앗아 일본인에게 멋대로 양도했다. 이 사건으로 나석주는 동양척식주식회사에 대한 분노를 가지고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으며, 명신학교(明信學校)를 수학하고 북간도로 망명해, 우당 이회영 선생이 설립한 신흥무관학교에서 항일 공작원으로 활동했다.
1919년 3.1 운동 때 군자금을 마련하여 중국 상하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송금했다. 황해도 평산군에서 주재소 일본 경찰과 면장을 사살하고 북쪽 지방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일제의 요인 암살과 독립운동을 위한 군자금을 모으고 다녀서 일제가 혀를 내두르고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이에 일제는 나석주를 잡기 위해 군 병력을 증강시켰는데, 이런 움직임을 감지한 나석주는 중국으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경비 담당[6]으로 일하였다. 이후 국내에 돌아와 의거할 기회만 노리던 나석주는 김구와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던 심산 김창숙의 요청과 의열단 김원봉 단장의 명령(지시)으로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폭파 임무를 부여받고 중국인 가명인 ‘리중거’로 위장하여 밀입국했다.[7]

한동안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중국인 거주지에서 중국인 행세를 하면서[8] 기회를 엿보던 나석주는 거사일인 1926년 12월 28일[9] 권총을 신문지로 감싼 채 겨드랑이에 끼고 폭탄을 지닌 채로 명동으로 향했고 을지로 일대를 휘저은 거사를 일으켰다.
먼저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성지점[10] 로비에 들려 중국인 행세를 하며 경비 태세를 탐문했다. 이후 맞은편에 있는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11]에 들러 연말이라 사람이 바글바글[12]한 틈을 타 정신없이 은행 업무를 보던 은행원들 뒤로 폭탄을 투척했지만 폭탄은 조악한 탓에 불발되었고[13] 놀란 직원들과 사람들이 소동을 일으키자 거리의 사람들이 조선식산은행 앞으로 몰렸으나 나석주는 태연하게 “아노, 쓰미마셍.”이라고 하고 조선식산은행 밖으로 자리를 떴고 이후 은행 직원이 폭탄임을 깨달아 종로경찰서에 신고했다.
거리의 사람들이 조선식산은행으로 몰리자 상대적으로 경비가 한산해진 건너편의 동양척식주식회사에 가서 신문지로 숨겼던 권총으로 1층 수위실의 일본인 기자부터 사살했다. 직후 2층 사무실을 돌아다니면서 동양척식주식회사 직원들을 권총으로 사살했는데 먼저 총소리를 듣고 계단을 올라오는 직원 1명을 사살했고 토지개량부 기술과장실로 가서 오모리 차장과 아야다 과장을 사살했으며 옆 기술과로 들어가 권총을 마구 난사하고 폭탄 1개를 던진 다음 아래층 현관에 있던 일본인 2명에게 권총을 쐈다. 살육전을 벌이다 보니 시간이 생각보다 지체되었고 탈출할 때가 됐다고 느낀 나석주는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나와 거리를 내달렸지만 출동한 일본 경찰들과 마주치게 되었다.
나석주는 먼저 만난 경기도 경찰 경부 다하타 유이지를 사살하고 일본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면서 일본인들을 사살하며 도주했다.[14] 그러다 체력이 다했다고 느꼈는지 전봇대에 기대어 가슴에 총을 쏴서 자살을 시도하였으나 일본 경찰에 의해 병원으로 후송되었다.[15] 고등계 형사로 악명이 높았던 미와 와사부로의 심문을 받던 중 자신이 나석주임을 밝히고 순국했다. 사후 나석주의 유해는 가족들이 서울로 와서 인수해 고향인 황해도 재령군의 묘지에 유해를 매장했다.
[1] 음력으로 환산 시 1월 6일이다.[2] #[3] #[4] 참고로, 의거 직후 의사는 4시간 만에 장렬히 자결·순국하였다.[5] 1909년 서북학회(西北學會) 재령군지회 평의원으로 활동하는 등 애국계몽운동에 일약 참여한 바 있다. #[6] 정식 소속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무국 경호원이며, 임시정부 요인들과 그들의 식솔들을 보호하고 경호하는 업무를 담당했다.[7] 연이은 의열단의 의거로 항구에 경비가 삼엄하여 6개월간 입국 타이밍을 보았다고 한다.[8] 6년 이상 중국에 체류하게 되면서 제대로 된 임무를 못 해 보고 중국어 실력만 늘었다고 자조 섞인 한탄을 했다고 한다. 그만큼 유창한 중국어를 구사했다.[9] 이날은 쇼와 시대(昭和時代)가 시작된 지 3일 뒤였다.[10] 현재 하나은행 을지로2가 본점 자리.[11] 이전 이름은 농공은행(農工銀行)으로 1918년 농공은행 지점이 통합하여 식산은행이 되었다. 주요 업무는 일본인들의 사업자금, 일본인들의 식민지 정착을 위한 농토 구입자금공급 등이었으며 특히 1920년대 산미증식계획에서 각종 수리자금이나 총독부대행 수탈책으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현재 롯데백화점 본점 자리.[12] 1926년 12월 25일 다이쇼 덴노가 사망(붕어)하여 그당시 임시 공휴일이 지정되었던 것도 한몫했다.[13] 합법적으로 무기를 소지할 수 없는 신분상 폭탄 반입은 은밀하고 비밀스럽게 이루어졌는데, 당연히 폭탄들이 제대로 관리가 될 리 만무했고 이 때문에 폭탄이 습기를 먹는 등 고장나는 일이 적지 않았다.[14] 당시 총을 3발을 발사했다.[15] 당시 22발이 남았었다고 한다.[16] 을사늑약을 비통해하며 자결한 민영환, 헤이그 특사 3인방, 3.1 운동의 유관순이 대표적이다.[17] 양력으로 8월 29일이다. 공교롭게도 1910년 한일병합조약으로 경술국치가 일어난 날이기도 하다.[18] 여담으로 손종범은 서울 1945에서 박창주의 육촌 동생 역으로 박창주와 더불어 악질 친일파 연기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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