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펼치기 · 접기 ]
| ||||||||||||||||||||||||||||||||||||||||||||||||||||||||||||||||||||||||||||||||||||||||||||||||||||||||
대한민국 제헌 국회의원 김웅권 金雄權 | |
![]() | |
출생 | |
사망 | |
본관 | |
호 | 석천(石泉) |
의원 선수 | 1 |
의원 대수 | |
1897년 경기도 파주군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하였다. 이후, 중국으로 망명해 상하이시 후장대학을 졸업했다. 이후 중국에서 귀국해 광산업에 종사했다.
8.15 광복 후인 1946년 이범석을 단장으로 하는 조선민족청년단 발족에 참여했다. 김활란, 백낙준 등과 함께 이사를 지냈고, 강인봉과 함께 총무부장으로 활동했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기도 파주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48년 10월 13일 박종남 의원이 '외군철퇴 요청에 관한 긴급동의안'을 발의하자 이에 반발하여 11월 20일 최윤동 등 90여명의 의원들과 함께 '미군 주둔 요청 결의안'을 발의하였다. 1949년 6월 21일 미국의 군사고문단과 원조를 환영하는 성명서에 이름을 올렸다
제헌 국회의원 임기가 끝난 후인 1959년 제헌의원 45명과 함께 자유당에 입당하였다. 1961년 반민주행위자공민권제한법으로 인해 공민권이 제한받을뻔 했지만 법이 제정되기 전에 사망하였다.
8.15 광복 후인 1946년 이범석을 단장으로 하는 조선민족청년단 발족에 참여했다. 김활란, 백낙준 등과 함께 이사를 지냈고, 강인봉과 함께 총무부장으로 활동했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기도 파주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48년 10월 13일 박종남 의원이 '외군철퇴 요청에 관한 긴급동의안'을 발의하자 이에 반발하여 11월 20일 최윤동 등 90여명의 의원들과 함께 '미군 주둔 요청 결의안'을 발의하였다. 1949년 6월 21일 미국의 군사고문단과 원조를 환영하는 성명서에 이름을 올렸다
제헌 국회의원 임기가 끝난 후인 1959년 제헌의원 45명과 함께 자유당에 입당하였다. 1961년 반민주행위자공민권제한법으로 인해 공민권이 제한받을뻔 했지만 법이 제정되기 전에 사망하였다.
![]()
이 저작물은 CC BY-NC-SA 2.0 KR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단, 라이선스가 명시된 일부 문서 및 삽화 제외)
기여하신 문서의 저작권은 각 기여자에게 있으며, 각 기여자는 기여하신 부분의 저작권을 갖습니다.
나무위키는 백과사전이 아니며 검증되지 않았거나, 편향적이거나, 잘못된 서술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무위키는 위키위키입니다. 여러분이 직접 문서를 고칠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의 의견을 원할 경우 직접 토론을 발제할 수 있습니다.


